버샤 창비청소년문학 117
표명희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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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막내, 인자 느그 집 가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친정과 시댁, 양가에 인사를 드리고 신혼집으로 향하는 내게 친정엄마가 말씀하셨다. 이제 니 집으로 가느냐고. 결혼했으니 앞으로 여기, 친정에 자주 못 올 거란 의미. 애정 표현에 서툰 엄마로선 이것이 막내딸과의 아쉬움을 표현한 최대치였다. 하지만 친정엄마가 간과한 것이 있으니 나의 살림 솜씨가 형편없다는 거다. 한동안 친정집 방문이 어려울 거란 예상과는 달리 거의 매일 내 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같은 도시, 버스로 고작 20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사랑 하는 가족, 어릴 적 추억이 가득한 집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내가 태어난 나라, 조국을 떠난다는 건 어떨까. 얼마나 큰 결심을 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까.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한 쌍의 부부, 그리고 그의 네 아이 버샤, 텔민, 세실, 나즈.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아끼고 큰아이는 동생들을 세심하고 돌보는, 그야말로 다복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환경, 머물고 있는 공간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미래를 꿈꾸기 이전에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내일도 무사하게 맞이할 수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하루에도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국제공항의 출국장이기 때문이다.


 

나누고 가르는 거라면 정말 지긋지긋하다. 우리가 이런 처지에 내몰린 것도 알고 보면 그런 구분 때문이다. 같은 무슬림도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고, 같은 수니파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고…… 그뿐인가? 군인도 정부군과 반군으로 나뉘고, 뒷배가 되는 나라도 미국과 러시아로 나뉘고……. 사소한 나누기에서 시작한 불씨가 결국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는 내전으로 치달아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까지 내몰지 않았나. -36.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언어도 통하지 않는 땅에 발을 디딘 그들은 출국장 한 켠에 여행 가방과 휘장을 둘러 임시로 거처를 꾸렸다. 조국에선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그들이지만 지금은 한 달이 넘는 동안 오직 난민 심사에서 무사히 통과하는 것만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나라는 웬만해선 난민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기다 무슬림에 대한 인식도 최악. 때문에 그들의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국경을 몇 차례 넘으면서 자금사정도 악화되었다. 그들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회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 온순한 사람들이란 인상을 주기 위해 어떻게든 우선 사람들 눈에 띄면 안되었다. 그것이 유일한 생존수칙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불회부결정이 내려지고 마는데……


 

어느새 출국장 끝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마지막 지점에 이른 것이다. 어릴 적 화려한 미로 같던 통로를 지나 이르던 황금 지붕의 모스크처럼 이곳도 내겐 해방구나 다름없다.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바깥세상이라야 드넓은 활주로가 펼쳐진 공항 마당이 전부지만……. -190


 

공항 출국장에서 난민처럼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읽으며 순간 톰 행크스가 출연했던 영화 <터미널>이 떠올랐다. 모국에서 갑자기 터진 쿠데타로 오갈 데가 없어지자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공항에서 지내는 줄거린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해서 인상적으로 봤던 기억이 난다. 그 영화처럼 소설 속 가족도 공항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렵게 끼니를 해결하고 책을 구해 낯선 언어를 익히고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명쾌한 해결책은 쉽게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설상가상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세계는 공포의 도가니가 되고 마는데...


 

거대한 우주에서 보자면 한낱 벽촌에 지나지 않을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신의 눈에 얼마나 가련하고 가소로운 존재일까. 한쪽에서는 테러와 전쟁으로 울부짖고 다른 쪽에서는 축제와 파티로 환호하는, 어수선하고 모순투성이인 이 행성이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기껏 지구의 껍데기에 달라붙어 아등바등 살아가는 가련한 피조물 아닌가. -110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으로 소설을 읽었다. 버샤가 실어증을 앓게 된 어떤 이유일까. 이 가족이 안고 있는 비밀은 대체 뭘까. 무슬림에 대한 선입관, 고정관념을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장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지만 결국 묵직한 숙제가 남겨졌다.

 


국경을 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건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살아갈 나라의 국경선 앞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갖고 서 있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 우리를 맞아줄 날을 기다리며…….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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