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 김수영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
김수영 지음, 박수연 엮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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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특징을 얘기해봐” “시의 3요소가 뭐지?”

작년 여름 제가 중학생 아들의 국어 공부를 봐줬는데요. 아이가 제일 힘들어한 것이 바로 였습니다. 아들만 그런건지 요즘 아이들 대부분이 그런건지 알 수 없지만 깊은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 모습에 그야말로 제 머리의 뚜껑이 열릴 정도였지요. 맘 같아선 그래, 시는 읽어서 느끼면 되는 거지 그냥 되는대로’ ‘니가 느끼는대로’ ‘니 맘대로 해봐!’ 외치고 싶지만 막상 시험, 점수로 연결되니 생각처럼 되질 않더군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세기에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국어 시간에 주제, 제제, 소재, 시의 운율이 어쩌구, 이 시에 드러난 심상이 무엇인가...등등 시를 완전히 분해한 다음 씹어먹듯이 외우고 시험까지 쳤는데요. 성인이 되고 보니 무엇 하나 남는 게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답니다. 하지만 이제 그걸 다시 아들에게 강요해야 하다니...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니? 작가의 생각? 작가의 의도?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출제자가 이 문제를 왜 냈는지 생각해봐야 해, 학습목표를 니 머리에 빡! 넣어두고 유추를 해봐. 그래야 문제가 풀려”...이러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김수영은 제목에 왜 폐허에를 두 번 넣었을까였습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텐데 말이죠. 김수영의 시를 모두(아니 솔직히 거의 모른다는 게 맞을 겁니다. 예전에 김수영 시집을 구입했지만 읽다가 도중에 덮어버렸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더라구요) 알지 못하는지라 짐작만 했지요. 강조하는건가? 하고요.

 


김수영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시그림집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를 손에 들고 이번엔 예전과 다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무심하고 둔해도 세월을 그냥 날로 먹지는 않았을테니 이전처럼 김수영 시 한 편 읽으면서 머리 싸매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런데 웬걸요,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거예요.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도 덮어버려? 하지만 이번엔 정말 그냥 덮고 싶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김수영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입력한 다음 시를 읽으니 그나마 조금 낫더군요.

 


음악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자

저무는 해와 같이

나의 앞에는 회색이 뭉치고

응결되고

또 주먹을 쥐어도 모자라는

이날 또 어느 날에

나는 춤을 추고 있었나 보다 - [음악 /1950.2]

 


서울에서 지주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집안은 결국 몰락했고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일본에서 김수영은 학문보다 시와 연극에 몰두하는데요. 일본에서 학병 징집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다가 광복을 계기로 귀국합니다. 그러다 6.25 전쟁으로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국에 징집되었다가 탈출에 성공하지만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히고 마는데요. 당시 수용소는 반공 포로와 공산주의 포로들이 매일 패싸움을 벌이고 수시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고초를 겪던 김수영은 3년 후 민간인 억류자로 석방되는데요. 이후로도 그의 삶은 여전히 고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이 놓여 있는 이 방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 [달나라의 장난 / 1953]

 


식민지-전쟁-독재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은 김수영에게 무척 힘겨운 나날이었습니다.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이자 예술가로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함, 무자비한 권력의 압박을 무심히 넘길 수 없었던 그는 당시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는데요. 어렵사리 4.19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이승만 독재 정권처럼 인간의 자유를 무시한 채 반공법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자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써서 신문사에 보냅니다. 북한과 남한 따로 정부가 꾸려졌으니 진정한 언론의 자유를 외친다면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면 되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걸 비판하는 시인데 당시 문단이 시의 문맥이 아니라 시의 김일성이란 단어에 치중한 탓인지 그의 사후에야 발표되었습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

나는 잠이 깰 수밖에 - [“김일성 만세”/ 1960.10,6]

 


4.19 혁명이 어떤 것도 변혁하지 못하고 그래서 사회를,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자 안타까운 마음을 시에 풀어내기에 이릅니다. 마치 혁명의 실패를 예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운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 [그 방을 생각하며/ 1960.10.30.]

 


권력으로 사람들을 짓누르는 현실에 좌절한 그에게 마지막 해방구는 술이었다고 합니다. 술에 취해 쓰러져있는 그는 종종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서라도 잊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가 꿈꾸었던 건 어떤 세상일까.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그가 남긴 마지막 시에서 그가 염원했던 것, 그가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제아무리 권력이 억압을 가해도 결코 그들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약하고 힘없는 풀일지언정 언제나 그들보다 먼저 움직이고 말겠노라고.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 1968.5.29.]

 


우리 역사의 칠흑 같은 어두운 시대를 걸으면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시인 김수영. 날카롭고 거칠고 힘찬 그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아직 소양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언제든 펼쳐볼 수 있도록 가까이에 두고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제목에 왜 폐허에를 두 번 넣었을까하는 의문은 책의 마지막에 풀렸습니다. 궁금하시다면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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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1-05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작 축하드려요

초딩 2021-11-0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단 하나의 이론 -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유산
윤성철 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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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단하나의이론 #독서모임 #인문학 #책스타그램 #책추천 #알에이치코리아

 



요즘 들어 부쩍 집이 좁게 느껴진다. 작년 2천여 권의 책을 정리한 이후로 빈 공간이 제법 보였는데 어느새 그 자리에 다시 책이 탑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는 길에 만나게 되는 돌탑엔 작은 돌 하나마다 저마다의 소망과 염원이 깃들어 있는데. 저 책탑은 어떨까. 무언가에 대한 염원이 녹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나의 욕망이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일까.

 


현재 상황이 알려주는 것, 그 해결책은 간단하다. 또다시 책을 정리할 시점이 돌아왔다. 거실과 방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서 책을 솎아내야 한다. 어떤 책을, 어떻게, 얼마나, 정리할 것인가. 지금까지 나의 기준은 딱 두 가지. 내가 이 책을 언제라도 다시 읽을 것인가. 이 책은 과연 아이들에게 추천할 만한가. 아이들의 가슴과 지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책인가. 조건에 충족한다면 보관, 아니라면 정리. 말은 간단하지만 엄청난 갈등의 시간을 맞아야 한다는 얘기다.

 


<단 하나의 이론>, 책 제목만 봤을 땐 그냥 스치고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유산이라는 부제와 표지 그림이 나를 붙잡았다. 다크블루 바탕에 거대한 산맥, 그 위의 둥근달. 그런데 그림의 방향이 왜 세로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땅(산맥)이 가로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아주 먼 곳에서 지구를 바라봤을 때 지구의 옆면 일부만을 그린 걸까. 아니면 가로를 세로로 돌리는 데서 발상의 전환을 나타낸 걸까?

 


만일 기존의 모든 과학 지식을 송두리째 와해시키는 일대 혁명이 일어나, 다음 세대에 물려줄 지식이 단 한 문장밖에 남지 않는다면, 그 문장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 7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이자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남긴 질문이다. 이 책은 이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천체물리학자, 사회학자, 미생물학자. 신경심리학자, 통계물리학자, 인지심리학자, 신경인류학자들이 모였다. 저술이나 강연 등의 방식으로 지식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전문지식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열 일을 제치고서 두 눈을 부릅떠야 할 때다.

 


신을 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호기롭게 책장을 펼치자마자 마주한 문장에서 머리가 띵해졌다. 신을 어떻게 생각하냐니. 독서모임에서 중세를 다룬 책을 읽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은 내게 이해불가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 을 과학자, 그것도 천체물리학자가 얘기하고 있다. 불시에 허를 찔렸지만 대체 무슨 얘길하려고 신을 들먹이시나 싶어 더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항상 우주라는 말에서 신을 떠올린다(17)’며 강연회에서 자주 접하는 질문으로 말문을 연 윤성철님은 영화 <두 교황>의 한 대목을 언급하면서 신과 종교에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언급하면서 그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원자를 데려온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이자 가장 작은 단위인 원자는 일정한 궤도를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그 원자가 어떻게 세상의 변화를 설명한다는 거지?

 


변함없는 공간이라던 우주가 현대에 와서는 팽창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이것 역시 이후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고정되지 않고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우주를 가리켜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든 원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규칙성을 보인다면, 이 세상은 시계와 같이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모습만 하고 있을 것이다.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규칙에서 벗어나는 일탈이 필요하다. () , 일탈은 창조의 근원이다. - 26.

 


사회학자 노명우님은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말한다. 45억 년의 지구에서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은 알타미라와 라스코의 동굴벽화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한 동굴에서 그보다 더 이른 3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남긴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탐험가의 이름을 붙인 쇼베 동굴 벽에 단순한 선으로 그린 동물들의 생생한 모습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잊는다. 그리고 이내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곳이 빛 한줄기 비치지 않는 어두운 동굴이라는 것. 전기도 없던 3만 년 전, 그림을 그린 이는 울퉁불퉁한 동굴 벽에 어떻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갖는다. 그림을 그리는 이의 곁에는 틀림없이 불을 비춰준 동료가 함께했을거란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참혹한 전쟁 중에 극단의 굶주림 속에서도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코로나19 시대를 겪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3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혼자가 아니었듯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공동의 위험에는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바이러스가 아닌 이상,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단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일깨운다. 바이러스는 말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 72

 


리처드 파인만의 질문에 대표 학자들의 답변이 수록된 <단 하나의 이론>은 이후 미생물학자 김응빈님의 유전자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생명이란 우주의 메모리 반도체이다], 신경심리학자 김학진님의 인간의 감정과 공감에 대한 [마음은 신체와 환경의 소통에 기원한다], 통계물리학자 김범준님은 물리학 이론인 열역학을 다루는 [인류 지식의 원전은 엔트로피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님의 [인간의 욕구는 전염된다], 신경인류학자 박한선님의 진화론을 영혼과 마음으로 확장시킨 [인간 정신은 진화의 결과다]로 이어지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제법 눈에 띄었다. 과학지식을 다룬 부분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워 한참 제자리에서 맴돌기도 했지만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하듯 여러 도표와 그림, 사진이 본문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도움이 되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학자들이 본문에 참고문헌으로 사용한 책이나 논문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 내용의 근거와 이해를 돕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일곱 명의 학자들이 저마다 독자들이 읽어보면 좋을 책을 추천하는 부분을 수록했으면 어떨까, 아쉬운 마음이 든다.




* 알에이치코리아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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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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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다고? 이게 뭔 말이래?"



처음 이 책이 출간되었을때 제목을 보고 어이없다고 여겼다. 대체 '아내'라는 존재를 얼마나, 어떻게 여겼기에 평생 함께 살아갈 반려자인 아내를 외출할 때 머리에 쓰는 일상용품인 모자쯤으로 여기나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보게 된 미국드라마에서 의문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어떤 남자가 한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왔는데 그 남자가 매번 의사의 머리에 모자를 툭 올리는 것이었다. 마치 집에 들어오자마자 착용했던 윗옷과 모자를 옷걸이에 걸어두는 것처럼.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자 의사는 남자에게 당신의 뇌에 이상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걸 보는 순간, 아하!했다. 그 책이 말한 것이 바로 저것이었어!! 



궁금하거나 호기심이 생긴 책은 당장 구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난 호기롭게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초반 몇 장을 읽다가 덮은 이후로, 오래도록 책은 책장 한켠에서, 높게 쌓은 책탑 무더기에 갇혀 있었다. 



대체 '병의 본질'이라든가 '새로운 병'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올리버 색스의 책은 뇌와 음악에 대해 다룬 <뮤지코필리아>, 저자 자신은 물론 편두통을 앓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는 <편두통> 이후 오랜만에 만났다.



신경학자이자 의사인 저자는 오래도록 인간이 병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의문을 가졌다. 병으로 고통받는 수없이 많은 환자들을 만나면서 그는 환자가 환자이기 이전에 자신과 똑같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어떻게 하면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뇌 혹은 신경에 크고 작은 이상으로 인해 일상생활이 힘들어져서 때로 기관이나 병원에 격리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써내려간 기록이다. 때문에 본문 곳곳에서 인간의 '뇌'와 관련된 전문용어를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첨엔 대체 무슨 의미지? 궁금해서 검색하는 정성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뿐하게 '패스'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뇌부위의 명칭이나 호르몬까지 일일이 체크하다가는 또다시 책을 덮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신경학에서는 '결손'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결손'은 어떠한 기능장애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신경학 용어이다. 기능은 정상 아니면 비정상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이다.



소설처럼 흥미진진하지도, 에세이처럼 정돈된 문장으로 마음을 다독이는 것도 아닌 글. 뇌의 여러 병증을 정리한 보고서를 일종의 에세이처럼 적어나간 글을 매일 조금씩 읽어갔다. 인간의 뇌에 대해 알게 된다는 기대나 흥미보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병증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화로 인한 치매부터 뇌경색, 사회적으로도 논란이 되고 있는 정신질병 외에도 너무나 많은 병증이 있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때에 따라 '병증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 그저 행동이 평범한 우리에 비해 조금 '독특하고' 조금 '다른' 사람들일뿐이라는 점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리는 환자의 결함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있는 능력을 거의 간과했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희귀한 존재일까? 아니면 우리가 단지 무심하게 지나쳤을 뿐일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간청하기 위해 그 부모들이 설립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무릎을 꿇었던 장면이 생각났다. 



뇌의 병증으로 인해 소소한 일상을 이어가기 힘든 사람들, 부모나 가족이 아니면 제대로 보살핌 받지 못하고 외딴섬처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언제까지 그들 부모와 가족만의 책임이라고 할 것인가. 그들 역시 인간이기에 이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보듬을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해심이 아주 깊은 사람이 그를 고용해서 정성스럽게 지도하지 않으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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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자의 일기
엘리 그리피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나무옆의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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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스릴러 소설, 정말 좋아합니다.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초등학생때입니다. 셜록홈즈와 루팡에 매료된 후로 아가사 크리스티, 앨러리 퀸,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섭렵했고 성인이 되어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우타노 쇼고, 스티그 라르손, 요 네스뵈, 존 르 카레, 마이클 코넬리, 헬렌 코벤...국적을 가리지 않고 마구 읽어댔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인문서적을 읽으면서 예전만큼 추리스릴러물을 즐기진 못하고 있는데요. 그럼 관심이 완전히 사라졌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수시로 서점의 신간 코너를 보면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나 흥미로운 책을 메모해두곤 하는데요.


 

얼마전엔 표지가 아주 인상적인 책을 봤습니다. 붉은 보름달이 뜬 깊은 밤에 이층집이 그려져 있는데요. 2층 방에 켜진 전등 불빛과 양옆의 어둠, 책상 의자가 순간적으로 투구를 쓴 무사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집을 감시하기라도 하듯 정체를 감추고 있는 검은 그림자 넷과 그 집을 향해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울부짖는 덩치 큰 개(?) 한 마리. 대체 저 이층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거기다 에드거 상 수상작’ ‘빼어난 고딕 스릴러와 같은 띠지의 문구가 더해지니 안 읽을 수가 없더군요.


 

괜찮으시면,” 낯선 사람이 말했다.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고 싶소.” - 11

 


<낯선 자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남자가 기차여행 중에 만난 이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 얘기를 해주겠다며 말문을 여는데요. 이야기가 막 흥미로워지기 시작하자마자 금방 끊기고 맙니다. 문예창작반 수업을 위해 낯선 사람이란 작품의 도입부로 선생과 학생들은 질문과 답변, 유추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데요. 공교롭게도 낯선 사람을 쓴 R.M.홀랜드의 집이 바로 그 학교 건물이었고 수업을 진행한 선생은 그 홀랜드의 전기를 집필 중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곧이어 그 선생, 클레어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같은 학교 동료이자 절친인 엘라가 살해당했다는 것. 어때요, 이것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지요? 홀랜드의 생전 집이자 학교에 감춰진 비밀은 없는지, 엘라는 무슨 이유로 살해당했는지, 이런 모든 일이 클레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지. 풀어야 할 의문, 속된 말로 떡밥이 한두 개가 아닌 거죠.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하는 건? 피해자의 주변 인물 탐문부터 하지요. <낯선 자의 일기>도 마찬가집니다. 엘라에게 불쑥 두 명의 형사(하빈더 카우어와 닐 윈스턴)가 찾아옵니다. 젊고 체구는 작지만 강한 카리스마의 하빈더는 클레어에게 엘라에 대해 묻는데요. 형식적인 것 같은 질문 속에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하빈더와 다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클레어. 하빈더는 이런 클레어에게 반감을 갖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엘라의 페이스북에 있는 ‘C는 알고 있다는 글과 시체에서 발견된 쪽지에서 템페스트의 인용구 지옥은 비었다.”는 모두 클레어에게 의심의 눈초리로 향하게 했는데요. 뚜렷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건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시간만 흐르던 어느 날, 클레어는 자신의 일기장에서 낯선 필체의 글을 발견합니다. 안녕, 클레어. 당신은 나를 모르죠.’

 


소설은 클레어와 하빈더, 그리고 클레어의 딸 조지아 세 명이 차례로 주된 화자가 되어 진행됩니다. 엘라를 중심으로 해서 사건 전후로 세 명의 인물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들 각자의 관점으로 풀어가는데요. 사람들은 하나의 일을 동시에 겪어도 저마다 생각과 기억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친이라 해도, 부모자식간이라도 마찬가진데요. 그렇게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에서 사건의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러나는 최대의 반전... 대체 엘라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일까요?


 

주된 화자인 클레어가 책을 쓰는 작가여서인지 본문 곳곳에는 여러 책이 언급되는데요. 낯선 책도 있었지만 <흰옷을 입은 여인>으로 단박에 애정작가가 된 윌키 콜린스를 만나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읽는 내내 궁금했던 건 바로 ‘R.M.홀랜드는 대체 누구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나? ‘고딕 스릴러는 뭘까? 궁금했는데요. 중세의 건축물 특유의 폐허와 같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거기에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어두운 심리가 더해진 소설을 고딕문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500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은 생각보다 금방 읽힙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몰입해서 읽을 책을 찾으신다면, <낯선 자의 일기>를 들춰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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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삭스 지리 기술 제도 - 7번의 세계화로 본 인류의 미래 Philos 시리즈 7
제프리 삭스 지음, 이종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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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벽돌책 깨기를 시도하고 있다. 700쪽이 넘어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벽돌책을 첨엔 모으는데 몰두했다. 그러다가 올해부터 일주일 몇 번씩 횟수를 정해두고 조금씩 느리게 읽어가고 있는데 은근히 재미가 있다. 어쩌다 읽는 간격이 뜸해지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렇게 읽은 벽돌책이 한 권씩 쌓여갈 때 느낌은 실로 특별하다.


 

‘7번의 세계화로 본 인류의 미래란 부제가 달린 <지리 기술 제도>. 제목을 보고 언뜻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인류는 왜 민족 간에 서로 정복하고 지배하는지, 왜 대륙마다 문명이 탄생하고 발달하는 속도가 다른지를 총기와 병균과 금속이 인류에 미친 영향을 통해 분석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유럽이 15세기 대항해시대를 맞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게 된 것은 대포로 무장한 범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하는 카를로 치폴라의 <대포 범선 제국>. 이들 책의 공통점은 ‘3’. 인류의 전체 혹은 일부의 역사 중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핵심 키워드 세 가지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이번엔 대체 어떤 것으로 전개될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프리 삭스하면 천재란 말이 떠오른다. 하버드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해서 20대에 하버드대학 최연소 정교수가 되었다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로 꼽힌다. 그의 <빈곤의 종말>을 호기심이 발동해서 덥석 집었다가 다 읽지 못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그래서 최근에 출간된 <지리 기술 제도>도 내가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염려가 됐지만 제목의 끌림이 더 강력했다. 책의 원제는 <The Ages of Globalization>, ‘세계화의 시대. 여기에 ‘7번의 세계화로 본 인류의 미래라는 부제를 더해 추측해보면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7번의 세계화, 시대로 그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지리, 기술, 제도가 아닐까. 역사서를 읽는 기분으로 도전했다.


 

이 책은 세계화의 복잡성을 다루고 있다. (16)


 

저자는 먼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역사를 바꾼 일곱 번의 세계화의 시대를 거쳤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기마 시대, 고전 시대, 해양 시대, 산업 시대, 디지털 시대. 이렇게 구분한 다음 각 시대의 특징과 어떻게 해서 다음 시대로 진행되었는지 지리, 기술, 제도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서술한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인구과잉은 곧 식량부족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멜서스의 인구론을 학계는 대체로 빗나간 예언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이 멜서스의 비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짚는다. ‘유라시아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인상적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서 부르는 유라시아에 저자는 경제적 개념을 도입해서 설명한다. 기후나 자원의 측면에서 유라시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리한 조건들을 갖고 있다고 말이다. 현재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진화하고 어디로 이동했는지 후기 구석기에 이르러 인류가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는지, 신석기 시대에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며 경작을 하게 되는데 이때 목축, 농업에 최적의 조건인 행운의 위도가 바로 유라시아였다고 말한다.


 

평이한 문장에 본문 곳곳의 지도와 그래프 덕분에 책장이 술술 넘어가던 책은 5정치의 세계화부터 내용이 복잡해지기 시작된다. 여러 나라가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대륙을 가로질러 동서양의 물자가 이동하고 그 결과 제국주의로 열강의 대열에 오르는 나라가 등장한다.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시작된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과 그로 인한 희생된 나라를 서술한 대목은 우리가 일제식민지를 겪은 아픈 역사를 지녔기 때문인지 마음이 아팠다. 일곱 번째 맞는 세계화로 저자는 디지털 혁명을 꼽는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여서 빈부격차와 불평등 문제는 갈수록 심화된다는 것에 시종일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인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일은 앞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저자는 말한다. ‘인류는 온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 광범위한 지역을 관통하여 특색 있는 다양한 상품들을 교환할 수 있다(16)’. 이 말을 우리는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해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희망을 말한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 잘 돕거나 화합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10만 년 전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형성한 추론과 협력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인류는 서로 간의 이해관계를 전보다 더 명확하게 깨닫고 있다. 이와 함께 인류의 희망은 공동의 역사와 인간 본성에서 오는 교훈을 활용하여 세계적 규모의 새로운 협력 시대를 구축하는 일에 있다. - 326.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나온 과거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듯 다가올 미래 또한 그렇지 않을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경험이 결국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미세한 변화가 폭풍우 같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는 나비효과란 말이 지닌 의미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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