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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이야기
마쓰오카 유즈루 지음, 박세욱.조경숙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7월
평점 :
나의 책읽기 스타일은 마구잡이식이다. 지인들과의 독서모임에서 여러 분야의 책으로 커리큘럼을 만들어 읽기도 하지만 그때그때 읽고 싶은 책, 기회가 닿는 책을 읽다보니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덮어버린 책도 제법 된다. 어느 한 분야나 관심있는 주제의 책만을 심도있게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를 잡는다고 우연히 읽은 몇 권의 책으로 인해 뜻밖의 귀한 정보를 얻을 때가 있다. 작년 이맘때였나? 중국여행 전문가가 쓴 실크로드에 관한 책을 읽었다.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길, 실크로드. 저자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 여러 가지 아름다운 풍경들을 사진과 함께 보여주었다. 내가 그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것은 돈황에 관해서였다. 더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을 그곳의 석굴이 어떻게 해서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러시아, 일본에 의해 유물이 약탈되었는지 그 사건의 시초, 발단과 진행과정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한 해를 넘겨 한 권의 책을 만났다. 마쓰오카 유즈루의 <돈황이야기>. 이 책에서 작년에 품었던 궁금증과 의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마쓰오카 유즈루의 <돈황이야기> 이 책은 돈황의 유물들이 어떻게 처음 발견되고 어느 나라 누구의 손을 거쳐 유출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나쓰메 소세키의 사위이자 소설가답게 저자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넣는 등 소설적인 요소가 가미했다.
<오렐 스타인이 수많은 고문서를 반출한 돈황석굴 중 제17호석굴>
“이것이 그 자랑할만한 누란경이란 말이지요. 그 세계적 탐험가 스벤 헤딘이나 오렐 스타인의 발굴로 유명하게 된.....” 이렇게 한 노인의 말로 시작한 책은 돈황의 유물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자행됐는지 알려준다. 스타인이 돈황 석굴 사원의 주지였던 왕도사에게 자신을 현장 삼장법사를 존경하는 열렬한 숭배자로 위장하여 접근한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폴 펠리오는 금전적인 대가를 제공하여 엄청난 양(목록을 만드는 데만 반세기가 걸린 막대한 분량)의 경전을 빼내는데 그 와중에 우리의 왕오천축국전을 가져간다. 그 뒤를 이어 일본의 다치바나(오타니 미션) 역시 수없이 많은 돈황 석굴의 유물을 뒤로 빼돌리는데 그 과정은 실로 어이없고도 놀라우며 그들의 약탈은 치를 떨 정도다.
<폴 펠리오. 돈황석굴 속에서 고문서 두루마리를 조사하는 모습
이 과정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사본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저자는 일본의 다치바나에겐 영국의 스타인이나 프랑스의 폴리오와는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마치 다치바나가 서구열강의 약탈 앞에 무방비로 놓인 중국의 돈황 유물들이 더 이상 약탈되지 않도록 구해냈다는 식의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불도가 어쩌구하며 다치바나의 행동을 ‘종교인치고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느니 ‘세계탐험사에 있어 최연소기록’이니 ‘목숨을 걸 그에게 감사와 감격을 올린다’는 식의 제국주의적 표현은 책을 계속 읽어나가기 거북할 정도였다. 왜냐면 발굴조사라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다치바나가 한 일은 사실 사람들이 밟지 않은 땅을 샅샅이 뒤져 보물을 선점하는 보물사냥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한 유물을 싣고 내몽골의 사막을 지나고 있다>
이 책의 띠지엔 ‘실크로드와 돈황학 입문서의 고전’이란 문구가 있고 뒷표지엔 ‘열강의 발굽 아래 유린당한 돈황의 수난사를 다룬 명저’라고 씌여있다. 과연 그럴까? 그건 누구의 관점일까,....궁금해진다.
책의 뒷부분에 수록된 번역자의 ‘돈황이야기의 한국적 의미’란 해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타니 미션의 유물들은 모두 5,000여 점이 되는데, 그 중에서 1,500여 점이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 우리나라 역시 돈황의 문물에 있어서 뜻밖의 당사국이 되어 있다. 이미 마쓰오카 유즈루의 <돈황이야기>는 저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 301쪽.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사.국. 당사국의 뜻이 뭔가. ‘국제간의 분쟁이나, 기타 교섭 사건에서 그 사건에 직접 관계가 있거나 관계한 나라.’라고 한다. 솔직히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를 당사국으로 표현한 것도 이해되지 않지만 그보다 번역을 담당한 이의 무성의에 더 화가 났다. 우리가 왜 당사국이 되었는지...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간단하게라도 조사해보고 그에 대한 자료도 함께 수록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자의 무관심에 의해 놓친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다치바나, 즉 오타니 탐험대는 3번에 걸쳐 서역탐사를 하면서 벽화를 뜯고, 무덤을 파헤친다. 석상을 고스란히 운반하자니 한계에 다다르자 그들은 석상의 머리만을 자른다. 그런 유물들을 톤 단위로 실어 본국으로 빼돌렸는데, 그렇게 수집된 유물들이 오타니의 몰락으로 뿔뿔이 흩어지는데 그 중 3/1에 해당하는(오타니의 별장에 소장되어 있던) 유물을 구하라 후사노스케가 넘겨받게 되는데 그는 바로 그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의 ‘이왕가 박물관’에 기증한다. 그 후 해방과 더불어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했던 것이 바로 우리의 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역유물인 것이다. 한권의 책을 번역하는데 있어 이런 일련의 과정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책이 일본에서 처음 발표된 시기가 1930년대인 것을 알았을 때 책 속에 일본의 제국주의를 당연시하고 미화하는 표현이 있을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깨름칙하고 씁쓸하다. 일본이 돈황의 유물을 약탈했듯 우리의 유적유물도 낱낱이 유린하고 약탈해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