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5
루이스 캐럴 원작, 마틴 가드너 주석, 존 테니엘 그림, 최인자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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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우리집에 왔다! 그것도 거대한 <앨리스>!! 집에 있는 두 권짜리 앨리스(이상한 나라/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가져와서 비교해봤다. 순간 쿡, 웃음이 나왔다. 두 권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크고 두껍다. 글자크기도 합본으로 된 <앨리스>가 오히려 더 작은데 말이다. 이유가 뭘까. 힌트는 바로 부제에 있었다. ‘마틴 가드너의 앨리스 깊이 읽기’. 즉 이 책 <앨리스>는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를 마틴 가드너가 꼼꼼하게 주석을 붙여 제작한 책이었다.




사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릴 적에 읽었다. 그리고 몇 년 전 국내의 유명출판사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완역판으로 출간했을 때 반가운 마음에 얼른 구입해서 쓰윽 훑어보고 책장에 꽂아뒀다.  자세하진 않지만 내용이 어떠하다는 건 대충 알고 있으니까 그다지 새로운 건 없을거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번에 만난 마틴 가드너의 주석판 <앨리스>는 내 기억 속의 앨리스와 뭔가 달랐다.




기본 뼈대는 비슷했다. 언니와 함께 시냇가에 갔던 앨리스가 조끼를 입고 회중시계를 찬 토끼가 “너무 늦었다”며 급히 사라지는 걸 보고 호기심에 쫓아간다. 토끼굴로 들어간 앨리스가 한없이 깊은 굴속으로 떨어지면서 이상한 나라에서의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먹거나 마신 음식에 따라 몸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이상한 동물이 나타나 말을 하는건 물론이거니와 얼굴이 물고기와 개구리처럼 생긴 하인이나 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체셔고양이(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다)를 만난다. 병사들의 몸이 카드처럼 생긴 곳에서는 여왕과 크로케 시합을 하기도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이상한 일 투성이다. 근데 정말 희한한 건 그 곳 사람들은 오히려 앨리스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거였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거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자꾸만 ‘반대’를 외치고 거대한 체스 판 위에서 게임을 했으며 시냇물을 건널 때마다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저자인 루이스 캐럴이 사랑했던 앨리스란 소녀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 몇 개의 이야기가 보태져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갖가지 모험을 이 이야기를 아이들뿐만 아니라 물리학이나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서 연구대상이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엔 단순한 판타지 동화 한 편이 뭐 그리 대단할까 여겼다. 저자의 엄청난 상상력이 과연 어디서 비롯됐는지가 더 궁금했다.




하지만 책 속에 수록된 엄청난 분량의 주석, 때론 실제 본문의 내용보다 오히려 더 많은 양을 차지하는 주석을 읽고 나선 생각이 달라졌다. <앨리스>는 단순히 판타지 동화가 아니었다. 특이하다 못해 너무 허무맹랑해서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모두 저자의 철저한 의도에 의해 씌여졌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 영국의 상황이나 풍습, 유행하던 말이나 시를 저자가 동화 속에 상징적으로 묘사해 놓거나 살짝 비틀어서 숨겨뒀는데 그걸 마틴 가드너가 콕콕 짚어가면서  일일이 설명해놓고 있었다. 마치 복잡한 수학 문제로 골머리를 싸맬 때 공부 잘하는 친구가 옆에서 문제 푸는 요령을 일러주는 것 같았다. 여긴 이런 뜻이야, 이건 그냥 말장난이야...하면서. 물론 설명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동화란 아이들을 위해 동심(童心)을 바탕으로 지은 문학작품이며 아이들의 가치관 형성에 도움이 되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라고 한다. 그런데 난 지금까지 이 ‘동화’라는 개념에 너무 얽매였던 것 같다. 한 편의 동화를 읽을 때마다 작품 속에 숨은 교훈이 뭔지 찾아내려고 애썼기 때문에 <앨리스>를 그냥 재미만을 위해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앨리스>는 한마디로 놀이다. 앨리스란 어린 소녀가 환상의 세계에서 여러 가지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며 한바탕 신나는 놀이를 벌인 것이라고. 마치 아이들이 낮에 놀이터에서 열심히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앨리스 역시 이상한 나라와 거울나라에서 재밌게 놀다가 돌아오는 거라고...지금은 우선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편이 어른인 나에게도 좋으니까. 무엇보다 그래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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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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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번, 큰아이의 학부모 모임에 나간다. 작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 1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는 걸 계기로 만나게 됐다. 그 모임에 참석하는 엄마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나이가 대부분 삼십대 후반에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전업주부이거나 평일 낮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전문적인 일을 한다. 남편은 평균소득을 웃도는 안정된 직업이라 생활도 여유롭다. 비교적 생활수준이 높은 동네라서 아이들 교육에도 열성적이다. 어쩌다 뒤늦게 모임에 합류한 난 매번 겉도는 느낌이 든다. 나이는 차치하더라도 육아단계를 벗어난 그녀들에 비해 난 자유롭지 못하다. 외출할 때마다 기저귀며 갈아입을 옷을 챙겨야하고 모임에 나가서도 아이 뒤꽁무니 쫓아다니기 바쁘다. 그녀들만큼 풍족하지 않고 세련되지도 않다. 나이에 걸맞는 옷차림에 아이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날씬한 그녀들을 보면 늘 부러웠다. 모델하우스처럼 정갈하고 깔끔한 살림은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녀들의 하루는 도대체 어떨지 궁금했다. 나와 같은 24시간을 보내는 게 맞을까. 의문이 들었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는 제목에서부터 마음이 끌렸다. ‘완벽한 하루’. 어떤 하루를 완벽하다고 하는지 알고 싶었다.




여기 다섯 명의 여자가 있다. 줄리엣,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공부도 잘했던 그녀는 주위의 기대와 달리 평범한 교사가 되었다. 같은 교사지만 성공가도를 달리는 남편에 비해 자신은 능력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 오직 남편을 위해 희생해야하는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여긴다. 알링턴파크에서 가장 좋은 집에 사는 어맨다는 하루 종일 집안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일에 몰두한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듯이. 메이지는 혼잡한 런던을 떠나고 싶어 알링턴파크로 이사 왔지만 그 곳에서도 여전히 안정감을 찾지 못한다. 반면에 크리스틴은 주변 지역보다 삶의 질이 높은 알링턴파크에서의 생활을 만족해한다. 사교적인 성격으로 여러 사람과의 모임을 주선하는 걸 즐기지만 언제나 외로움을 느끼고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넷째 아이를 임신한 솔리는 경제적인 이유로 남는 방에 외국인 학생을 들인다. 그녀는 한동안 머물다 가는 몇 명의 외국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다.




영국의 어느 주택가, 알링턴파크. 그곳에서 살아가는 다섯 명의 여자들의 삶을 그린 소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책은 다섯 명의 단 하루 동안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큰 사건이나 사고 없는 하루가 이어지지만 줄리엣을 비롯한 다섯명의 여자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않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인해 우울해하고 불만과 분노로 가득차 있었으며 팽팽한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그녀들의 분노가 언제 어떤 계기로 폭발하는 건 아닌지 책을 읽는 내내 불안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불편했다.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를 통해 나의 완벽하지 못한 하루를 보는 듯했다. 내 속에 감춰져있는 우울하고 불안한 심리, 분노로 가득찬 마음이 다섯 명의 이름을 빌어 불쑥 불쑥 나타날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나 역시 줄리엣처럼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고 어맨다처럼 자신의 삶에 침범하거나 위협하는 이가 있다면 죽여버리고 싶은 잔인한 충동을 느낀다. 메이지처럼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고 솔리와 같은 고민, 여자로서의 매력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우며 크리스틴처럼 나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책 속, 알링턴마을에 비가 내리듯 내 마음 속에서도 하루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간혹 집에 놀러오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 “어머, 아직도 거실에 결혼사진을 걸어두고 계시네요. 사이가 정말 좋으신가봐요.” 그럼 난 이렇게 말한다. “벽에서 떼면 짐이잖아요. 딱히 보관할 곳도 없고...” 사실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니, 거의 대부분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얼굴에 화사한 생기가 감돌고 가슴엔 열정을 갖고 있던 내 젊은 시절의 사진에서 위안을 느끼기 위해서다.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노라고 보여주는 전시용인 셈이다.




하지만 난 정말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내가 예전의 모습에서 떠올려야할 것은 젊음이나 날렵한 몸매가 아니라 ‘꿈’이었다. 작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 내 미래를 위한 꿈. 그 꿈을 언제부턴가 잊고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됐다. 앞으로 한걸음 내 딛으려면 지금의 모습과 삶,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내 존재를 먼저 인정해야 하는데 그걸 줄곧 거부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완벽하지 않은 지금을, 오늘이 늘 불만이었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에 완벽한 하루는 없었다. 줄리엣과 어맨다, 솔리, 크리스틴 그리고 메이지. 그녀들의 결코 완벽하지 않은 하루를 봤지만 내일은 어떨까. 언제쯤이면 그녀들은 자신을 찾고 사랑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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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 아우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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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읽을 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편이 한마디 한다. “거, 참....(표지가) 그렇네. 여자 표정이나 동작이 도도한 것도 아니고...거만한 것도 아니고...비호감인데...도대체 무슨 책이고?” <스토리텔링의 비밀>.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나의 느낌도 남편과 비슷했다. 한껏 부풀린 머리(가발인지, 모자인지 알 수 없지만)에 위로 치켜올라간 검은 안경, 그 속에 시선이 살짝  아래로 바라보는 눈동자(왠지 보바리부인의 분위기를 풍기는), 그리고 여자의 손! 기다란 담뱃대가 아니라 어울릴 것 같은 손가락에 펜대가 끼어져 있다. “참, 그렇다”는 남편의 표현이 딱이네...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만 보고선 이 책을 읽으려고 생각하지 못했을텐데 뭔가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게 있었다. 노란 띠지에 적힌 ‘이야기꾼이 되고자 하는 당신에게 추천하는 책’이란 문구와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란 부제였다. 스토리텔링이 ‘이야기꾼’을 나타내는 건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가 무슨 상관이 있지? 의문이 들었다.



<스토리텔링의 비밀> 이 책은 한마디로 시나리오를 잘 쓰고 싶은 사람을 위한 지침서이자 ‘시학’입문서다. 여기서 한가지, 털어놓을 게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시학’을 모른다. ‘시학’이란 말만 들어봤지 그게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책을 읽다보니 글을 쓰고 싶고 기왕이면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의외로 큰 수확을 거둘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어느 유명 감독은 미국의 대학에서 강의교재로 사용하는 ‘시학’을 가리켜 “42페이지로 구성된 시나리오를 쓰기에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최고의 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좋은 지침서가 된다는 것이다. 2천년도 더 된 책이 말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걸까.



책은 모두 33개의 소제목으로 이뤄져 있다. 서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한 부분을 인용하고 본문에서는 그 인용문을 설명하는 방식인데 대부분 영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 봤던 영화일 경우에는 수월하게 넘어갔지만 보지 못했던 영화가 나오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책에는 <시학>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단어가 몇 가지 나온다. 먼저 ‘비극’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슬픈 드라마’가 아니라 ‘진지한 드라마’란 의미이며 비극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플롯(plot)을 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훌륭한 작가는 이야기를 위해 일하고, 시원찮은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일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고 빈번하게 거론되는 것이 바로 ‘액션 아이디어’다. 시나리오의 가장 근본이 되는 ‘액션 아이디어’는 행동을 이야기의 아이디어로 여기는 개념이다. 즉 행동이 사람, 인물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시나리오 작가는 등장인물의 대사보다 각각의 인물이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중점을 둬야한다는 강조한다. 한마디로 등장인물의 대사 역시 행동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실제로 플롯을 구성하는데 어떤 원칙이 있으며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겪는 ‘불행’이나 ‘공포’가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더욱 살릴 수 있다는 것 등을 <죠스>, <대부>, <죽은 시인의 사회>, <터미네이터>, <록키>, <아메리칸 뷰티> 등과 같은 영화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거리가 있었다. 내가 원하고 추구하는 글이 ‘책’과 가깝다면 이 책은 영상화된 글, 영화를 위한 글, ‘시나리오’를 쓰는 것에 대해 풀어내고 있었다. 물론 그 두 가지 글은 서로 다르지만 아주 큰 공통점을 지닌다. 지금까지 읽었던 글쓰기에 관한 책에서 나왔던 것처럼  역시 ‘플롯’이 가장 중요한 것. 코바늘에 걸린 실을 어떻게 잇고 연결하느냐에 따라 문양이 제각각인 레이스가 나오듯 이야기의 얼개를 어떻게 짜맞춰가느냐에 이야기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플롯, 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한동안은 극장에서 영화 한편을 보더라도 머리 속에선 저자의 말이 맴돌 것 같다. 이 영화의 ‘액션 아이디어’는 뭐지? 저 사람에게 닥친 불행은 어떤 사건으로 연결되는 걸까?...으아, 생각만해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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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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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이네요. 낳으실 건가요?”....“에~에??” “차~암, 낳을 거냐고요!” “네!! 낳을 건데요!”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기 전에 임신이 확실한지 소변검사를 받았는데 뜬금없이 간호사가 물었다. 임신인데, 낳을 거냐고. 뭐 이런 해괴망칙한 말을 다 하나 싶었다. 가뜩이나 대기실 분위기가 싸늘해서 긴장되는데 이상한 질문만 해대니 화가 치밀었다. 당연한 걸 왜 물어보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서른이 넘었지만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나와 상대적으로 늙어보이는 신랑, 우리의 관계를 원조 비스무리한 걸로 오해한 거였다. 다행히 큰아이를 건강하게 낳았고. 6년 후 작은 아이가 태어났다. 건강하고 밝고 예쁜 아기가 또 한명의 우리 가족이 되었다.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 처음엔 이 책이 소설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순히 임신과 출산에 관한 책이겠거니...했다. 근데 틀린 생각이었다. 아니, 절반은 맞춘 셈이다.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이란 소설로 유명한 작가 가이도 다케루가 이번엔 산부인과의 의료체제에 메스를 들이댔다. 생명이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음을 던지고 있다. 자, 이제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유전자 왈츠’란 서장과 본문, 최종장까지 책은 모두 15장으로 이뤄져있는데 마치 학술서의 구성이나 차례를 보는 듯하다. 이야기의 배경이 데이카대학과 마리아클리닉이 번갈아 등장하는데 ‘얼음마녀’라 불리는 소네자키 리에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데이카대학 산부인과 소속의사인 리에는 불임치료, 인공수정 분야에서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받은 재원이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 게임을 계획하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리에는 도쿄 데이카대학의 발생학 강의를 하면서 마리아 클리닉에 외래 진료를 나간다. 몇 달 후면 문을 닫게 될 마리아 클리닉에 5명의 임산부가 찾아온다. 19살의 미성년자인 유미, 28살의 커리어우먼 다카코, 34살에 둘째를 임신한 미네코, 불임시술 5년째 마흔을 눈앞에 두고 임신한 히로코와 인공수정 시술을 받아 쌍둥이를 임신한 55세의 미도리. 나이를 비롯해 직업, 환경이 다른 이들은 저마다 다른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다.




유미는 낙태를 생각했지만 리에가 보여준 영상자료를 보고 출산을 결심하게 되고 원치않는 임신을 한 다카코는 과로 끝에 결국 유산을 하고 눈물을 흘린다. 미네코는 둘째가 딸이기를 바라지만 태아가 태어나자마자 죽는 무뇌증이란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히로코는 어렵사리 임신에 성공했지만 이번에도 습관성 유산이 되는건 아닐까 고민한다. 또 리에의 상사인 기요카와 부교수는 리에가 대리모 출산에 손을 댔다는 소문에 초고령산모인 미도리가 대리모일거라고 의심하게 되는데....




임신과 출산. 여자라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보험회사로부터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생명을 잉태한다는 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두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전후 병원진료를 받으면서 아무 이상없이 건강할거란 진단을 받았던 아기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이상한 징후를 보이거나 기형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책에서 리에가 ‘어째서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의문을 품었던 것처럼 임신과 출산은 기적에 가까울만큼 신비로운 과정이란 걸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은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의료사고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의 사정도 일본과 다르지 않다. 작은 군 단위의 마을에 사는 친구는 몇 년전 둘째 임신했을 때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려면 가까운 도시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도로사정도 썩 좋지 않아서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씩 다닐 때마다 늘 불안하다는 친구의 말에 “에이, 설마....?”하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가이도 다케루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다. 이 책을 이미 읽은 지인은 그의 전작에 비해 이 책은 재미나 감흥이 떨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내겐 무척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야기의 전개나 등장인물,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사건들이 물론 작위적이란 느낌은 들지만 임신과 출산에 관련된 의료체제를 비롯해 불임시술에 대한 정부시책이나 방침, 대리모에 관한 문제들을 이만큼 잘 버무려놓은 작품은 드물거란 생각이 든다.




책을 덮고 뒤표지를 넘기니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생명의 탄생을 지배하는 것은 신인가, 아니면 의사인가?’ 이 물음에 과연 정답이 있을까..싶다.




확실한 건 유산이나 불임의 아픔을 겪지 않고 두 아이가 모두 건강하게 태어난 것이 내게 더할나위 없는 행운이란 걸 알게 됐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 기억해두고 싶은 대목.




"임신이란 기본적으로 여성과 아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여성에게 임신이란 의학이 아니에요." - 16쪽.




"다시 말해 여러분은 엄마의 몸속에서 500분의 1, 아빠의 몸속에서는 5억분의 1이라는 좁은 관문을 뚫은 엘리트 유전자, 들인 셈입니다." - 20쪽.




어째서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지? 단 한 개의 단세포인 수정란에서 이렇게도 복잡한 물체가 만들어지는데. 그리고 단 한 지점에서라도 유전자 복제에 실수가 발생하거나 또는 한 쌍의 염색체 비분리 현상만 일어나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데. 하나의 세포가 이렇게 복잡한 물체가 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느 만큼의 분기점을 정확하게 돌파해야만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정상적으로 태어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 60쪽.




“...태어나는 순간에는 살아 있는 거죠?” 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 낳겠어요.”....

“저, 낳겠습니다.”....

“전, 이 아이한테 10개월을 살았다는 증거로 이 세상의 빛을 보여 주고 싶어요.” - 237 ~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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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앤드 커맨더 1 오브리-머투린 시리즈 1
패트릭 오브라이언 지음, 이원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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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온다.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기분 좋은 바람을 일으킨 범인은 바로 <마스터 앤드 커맨더>였다. 모두가 잠든 밤, 사방이 조용한 시각인데도 검푸른 깊은 바다, 망망대해를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나아가는 범선을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어~이, 돛이 팽팽하도록 항로를 유지하란 말야!”




예전에 러셀 크로우란 배우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를 봤는데 거기에 원작소설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다.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작품은 이 소설이 처음인데 책 날개의 저자 소개를 보니 영국에선 저명한 번역가이자 소설가로 알려져 있었다.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해군을 무대로 탄생한 소설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미완성 유작을 포함해 모두 21권이다. 특히 저자의 치밀한 묘사와 화려하고 풍부한 어휘가 소설을 더욱 실감나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책은 아름다운 총독 관저에서 열리는 음악회로 시작된다. 음악에 몰입한 잭 오브리가 박자를 맞추자 ‘박자 좀 제대로 맞추라’며 핀잔을 주는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앞으로 잭 오브리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또 한명의 주인공 스티븐 머투린이다. 자존심 강한 오브리에게 실로 불쾌한 일이었지만 그때의 첫만남은 서로에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건장한 체격의 해군 대위인 잭은 뱃사람으로서는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지만 매번 승진할 기회를 놓치고 머투린 역시 당시 재정상태가 최악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신경이 예민한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브리가 함장 임명장을 받으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오브리는 이른 아침부터 선원들을 소집해야한다거나, 그전에 제일 먼저 감사인사를 먼저 드려야 한다며 들뜬 기분을 만끽한다. 어깨에 새 견장을 달고 거리에 나선 오브리는 머투린을 만나 잠깐 대화를 나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서로가 악기를 연주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한 두 사람은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오브리의 행운이 오래가진 못했다. 그가 줄곧 데리고 있던 부하 선원들을 전임 함장이 모두 데려갔다는 것이다. 능력있는 부관과 선원들을 순식간에 빼앗긴데다 출항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골머리를 앓던 오브리는 우연히 머투린이 의사란 사실을 알고 그에게 자신의 배에 군의관이 되어 함께 바다로 나가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괴물처럼 이상하게 생긴 새나 물고기를 볼 수 있고 더불어 나포 상금도 벌 수 있다는 말과 함께. 하루하루의 생활조차 버거웠던 머투린은 오브리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때마침 제임스 딜런이 부관으로 오면서 출항준비는 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이어 바다에 들어선 소피호의 항해는 순풍에 몸을 실은 듯 순조로웠다. 또 나포를 거듭하는 사이 오브리를 비롯한 소피호 선원들은 바다 위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지만 곧 위기에 빠지는데...






책의 주인공인 오브리와 머투린, 그들의 성격은 정반대다. 오브리가 큰 덩치만큼이나 호탕하고 자신만만하지만 울컥하는 성급한 면을 지닌 반면 머투린은 내성적이고 소심하지만 차분한 성격이어서 오브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인데 서로 다른 면을 지니고 있는 오브리와 머투린은 서로 존중하며 우정을 쌓아간다. 또 초반엔 차마 뱃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던 소피호의 선원들이 차츰 뱃사람의 면모를 드러내고 오늘 잠잠하던 바다가 언제 표정을 바꾸어 이빨을 드러낼지 알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함장 오브리에게 존경과 절대적인 신뢰, 믿음을 보여주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총 21권이나 되는 해양장편 소설의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21부작 미니시리즈의 초반 1,2부만 본 셈인데 무척 만족스럽다. 몇 가지 단점을 갖고 있지만 매력적인 주인공들과 바다 위란 낯선 배경, 적함과 대치하고 전투를 치르는 장면 등 소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다만 이 소설의 특성상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 선원들 저마다의 역할이나 배의 구조, 항해에 관한 지식을 언급하는 대목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지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읽는 속도가 다소 떨어지지만 그 부분을 넘어서면 곧 순풍이 분다. 헐리웃 영화를 연상시키는 박진감 넘치고 긴박감 있게 진행되는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 오브리와 머투린을 비롯한 소피호 선원들의 내일은 어떠할지, 19세기 초 바다 위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을 소피호가 앞으로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 기대가 됐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친정아버지가 떠올랐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외항선원이셨던 아버지는 1년에 한두달 휴가 받아 집에 오시면 멀미가 난다고 하셨다. 바다가 아닌 뭍에서 멀미가 난다니...어릴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아버지의 마음이, 심정이 이해가 됐다. 고작 두어달 되는 동안에도  파도로 넘실대는 바다를 잊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대형범선의 모형키트를 가져오셔서 집에 계신 동안 만드셨다. 작은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몸체를 만든 다음 색을 칠하고 서로 어지럽게 늘어진 돛을 연결하고 나면 선원 각자의 역할에 맡는 위치에 사람을 배치하셨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대형범선 5척과 항공모함, 실제 아버지가 타셨던 선박 등 모두 7척의 배를 만드셨다. 지금 우리집엔 아버지가 제일 마지막으로 만드신 실제 선박의 축소한 배가 장식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의 손길이 머물렀을 모형 선박을 자꾸 바라보게 됐다. 켄터키 할아버지처럼 푸짐한 체격의 아버지가 콧등에 돋보기를 끼고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작은 부품들을 조립하던 생전의 모습이 떠올라 콧등이 시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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