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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임신이네요. 낳으실 건가요?”....“에~에??” “차~암, 낳을 거냐고요!” “네!! 낳을 건데요!”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기 전에 임신이 확실한지 소변검사를 받았는데 뜬금없이 간호사가 물었다. 임신인데, 낳을 거냐고. 뭐 이런 해괴망칙한 말을 다 하나 싶었다. 가뜩이나 대기실 분위기가 싸늘해서 긴장되는데 이상한 질문만 해대니 화가 치밀었다. 당연한 걸 왜 물어보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서른이 넘었지만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나와 상대적으로 늙어보이는 신랑, 우리의 관계를 원조 비스무리한 걸로 오해한 거였다. 다행히 큰아이를 건강하게 낳았고. 6년 후 작은 아이가 태어났다. 건강하고 밝고 예쁜 아기가 또 한명의 우리 가족이 되었다.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 처음엔 이 책이 소설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순히 임신과 출산에 관한 책이겠거니...했다. 근데 틀린 생각이었다. 아니, 절반은 맞춘 셈이다.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이란 소설로 유명한 작가 가이도 다케루가 이번엔 산부인과의 의료체제에 메스를 들이댔다. 생명이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음을 던지고 있다. 자, 이제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유전자 왈츠’란 서장과 본문, 최종장까지 책은 모두 15장으로 이뤄져있는데 마치 학술서의 구성이나 차례를 보는 듯하다. 이야기의 배경이 데이카대학과 마리아클리닉이 번갈아 등장하는데 ‘얼음마녀’라 불리는 소네자키 리에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데이카대학 산부인과 소속의사인 리에는 불임치료, 인공수정 분야에서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받은 재원이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 게임을 계획하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리에는 도쿄 데이카대학의 발생학 강의를 하면서 마리아 클리닉에 외래 진료를 나간다. 몇 달 후면 문을 닫게 될 마리아 클리닉에 5명의 임산부가 찾아온다. 19살의 미성년자인 유미, 28살의 커리어우먼 다카코, 34살에 둘째를 임신한 미네코, 불임시술 5년째 마흔을 눈앞에 두고 임신한 히로코와 인공수정 시술을 받아 쌍둥이를 임신한 55세의 미도리. 나이를 비롯해 직업, 환경이 다른 이들은 저마다 다른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다.
유미는 낙태를 생각했지만 리에가 보여준 영상자료를 보고 출산을 결심하게 되고 원치않는 임신을 한 다카코는 과로 끝에 결국 유산을 하고 눈물을 흘린다. 미네코는 둘째가 딸이기를 바라지만 태아가 태어나자마자 죽는 무뇌증이란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히로코는 어렵사리 임신에 성공했지만 이번에도 습관성 유산이 되는건 아닐까 고민한다. 또 리에의 상사인 기요카와 부교수는 리에가 대리모 출산에 손을 댔다는 소문에 초고령산모인 미도리가 대리모일거라고 의심하게 되는데....
임신과 출산. 여자라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보험회사로부터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생명을 잉태한다는 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두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전후 병원진료를 받으면서 아무 이상없이 건강할거란 진단을 받았던 아기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이상한 징후를 보이거나 기형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책에서 리에가 ‘어째서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의문을 품었던 것처럼 임신과 출산은 기적에 가까울만큼 신비로운 과정이란 걸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은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의료사고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의 사정도 일본과 다르지 않다. 작은 군 단위의 마을에 사는 친구는 몇 년전 둘째 임신했을 때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려면 가까운 도시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도로사정도 썩 좋지 않아서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씩 다닐 때마다 늘 불안하다는 친구의 말에 “에이, 설마....?”하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가이도 다케루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다. 이 책을 이미 읽은 지인은 그의 전작에 비해 이 책은 재미나 감흥이 떨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내겐 무척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야기의 전개나 등장인물,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사건들이 물론 작위적이란 느낌은 들지만 임신과 출산에 관련된 의료체제를 비롯해 불임시술에 대한 정부시책이나 방침, 대리모에 관한 문제들을 이만큼 잘 버무려놓은 작품은 드물거란 생각이 든다.
책을 덮고 뒤표지를 넘기니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생명의 탄생을 지배하는 것은 신인가, 아니면 의사인가?’ 이 물음에 과연 정답이 있을까..싶다.
확실한 건 유산이나 불임의 아픔을 겪지 않고 두 아이가 모두 건강하게 태어난 것이 내게 더할나위 없는 행운이란 걸 알게 됐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 기억해두고 싶은 대목.
"임신이란 기본적으로 여성과 아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여성에게 임신이란 의학이 아니에요." - 16쪽.
"다시 말해 여러분은 엄마의 몸속에서 500분의 1, 아빠의 몸속에서는 5억분의 1이라는 좁은 관문을 뚫은 엘리트 유전자, 들인 셈입니다." - 20쪽.
어째서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지? 단 한 개의 단세포인 수정란에서 이렇게도 복잡한 물체가 만들어지는데. 그리고 단 한 지점에서라도 유전자 복제에 실수가 발생하거나 또는 한 쌍의 염색체 비분리 현상만 일어나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데. 하나의 세포가 이렇게 복잡한 물체가 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느 만큼의 분기점을 정확하게 돌파해야만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정상적으로 태어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 60쪽.
“...태어나는 순간에는 살아 있는 거죠?” 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 낳겠어요.”....
“저, 낳겠습니다.”....
“전, 이 아이한테 10개월을 살았다는 증거로 이 세상의 빛을 보여 주고 싶어요.” - 237 ~ 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