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한 달에 한번, 큰아이의 학부모 모임에 나간다. 작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 1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는 걸 계기로 만나게 됐다. 그 모임에 참석하는 엄마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나이가 대부분 삼십대 후반에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전업주부이거나 평일 낮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전문적인 일을 한다. 남편은 평균소득을 웃도는 안정된 직업이라 생활도 여유롭다. 비교적 생활수준이 높은 동네라서 아이들 교육에도 열성적이다. 어쩌다 뒤늦게 모임에 합류한 난 매번 겉도는 느낌이 든다. 나이는 차치하더라도 육아단계를 벗어난 그녀들에 비해 난 자유롭지 못하다. 외출할 때마다 기저귀며 갈아입을 옷을 챙겨야하고 모임에 나가서도 아이 뒤꽁무니 쫓아다니기 바쁘다. 그녀들만큼 풍족하지 않고 세련되지도 않다. 나이에 걸맞는 옷차림에 아이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날씬한 그녀들을 보면 늘 부러웠다. 모델하우스처럼 정갈하고 깔끔한 살림은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녀들의 하루는 도대체 어떨지 궁금했다. 나와 같은 24시간을 보내는 게 맞을까. 의문이 들었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는 제목에서부터 마음이 끌렸다. ‘완벽한 하루’. 어떤 하루를 완벽하다고 하는지 알고 싶었다.




여기 다섯 명의 여자가 있다. 줄리엣,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공부도 잘했던 그녀는 주위의 기대와 달리 평범한 교사가 되었다. 같은 교사지만 성공가도를 달리는 남편에 비해 자신은 능력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 오직 남편을 위해 희생해야하는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여긴다. 알링턴파크에서 가장 좋은 집에 사는 어맨다는 하루 종일 집안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일에 몰두한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듯이. 메이지는 혼잡한 런던을 떠나고 싶어 알링턴파크로 이사 왔지만 그 곳에서도 여전히 안정감을 찾지 못한다. 반면에 크리스틴은 주변 지역보다 삶의 질이 높은 알링턴파크에서의 생활을 만족해한다. 사교적인 성격으로 여러 사람과의 모임을 주선하는 걸 즐기지만 언제나 외로움을 느끼고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넷째 아이를 임신한 솔리는 경제적인 이유로 남는 방에 외국인 학생을 들인다. 그녀는 한동안 머물다 가는 몇 명의 외국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다.




영국의 어느 주택가, 알링턴파크. 그곳에서 살아가는 다섯 명의 여자들의 삶을 그린 소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책은 다섯 명의 단 하루 동안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큰 사건이나 사고 없는 하루가 이어지지만 줄리엣을 비롯한 다섯명의 여자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않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인해 우울해하고 불만과 분노로 가득차 있었으며 팽팽한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그녀들의 분노가 언제 어떤 계기로 폭발하는 건 아닌지 책을 읽는 내내 불안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불편했다.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를 통해 나의 완벽하지 못한 하루를 보는 듯했다. 내 속에 감춰져있는 우울하고 불안한 심리, 분노로 가득찬 마음이 다섯 명의 이름을 빌어 불쑥 불쑥 나타날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나 역시 줄리엣처럼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고 어맨다처럼 자신의 삶에 침범하거나 위협하는 이가 있다면 죽여버리고 싶은 잔인한 충동을 느낀다. 메이지처럼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고 솔리와 같은 고민, 여자로서의 매력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우며 크리스틴처럼 나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책 속, 알링턴마을에 비가 내리듯 내 마음 속에서도 하루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간혹 집에 놀러오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 “어머, 아직도 거실에 결혼사진을 걸어두고 계시네요. 사이가 정말 좋으신가봐요.” 그럼 난 이렇게 말한다. “벽에서 떼면 짐이잖아요. 딱히 보관할 곳도 없고...” 사실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니, 거의 대부분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얼굴에 화사한 생기가 감돌고 가슴엔 열정을 갖고 있던 내 젊은 시절의 사진에서 위안을 느끼기 위해서다.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노라고 보여주는 전시용인 셈이다.




하지만 난 정말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내가 예전의 모습에서 떠올려야할 것은 젊음이나 날렵한 몸매가 아니라 ‘꿈’이었다. 작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 내 미래를 위한 꿈. 그 꿈을 언제부턴가 잊고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됐다. 앞으로 한걸음 내 딛으려면 지금의 모습과 삶,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내 존재를 먼저 인정해야 하는데 그걸 줄곧 거부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완벽하지 않은 지금을, 오늘이 늘 불만이었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에 완벽한 하루는 없었다. 줄리엣과 어맨다, 솔리, 크리스틴 그리고 메이지. 그녀들의 결코 완벽하지 않은 하루를 봤지만 내일은 어떨까. 언제쯤이면 그녀들은 자신을 찾고 사랑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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