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비슷한 것으로 우언(寓言)이라는 것이 있는데, '천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나온 "장자(壯子)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해의 천제(天帝)를 숙(儵 *)이라 하고, 북해의 천제는 홀(忽)이라 하며, 중앙의 천제는 혼돈(混沌이라 한다. 숙과 홀은 자주 혼돈에게 놀러갔는데, 혼돈이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고도 치밀하였다. 어느 날 숙과 홀이 어떻게 하면 혼돈의 은덕에 보답할 수 있을까 하고 의논하기를, '사람은 모두 다 눈,코,귀,입 등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음식을 먹고 하는데, 혼돈에게는 구멍이 하나도 없으니 뭔가 부족함이 있지. 우리가 가서 그를 위해 구멍을 몇 개 뚫어주는 게 어떨까'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둘은 도끼와 끌 등을 가지고 가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주게 되었는데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 이레 만에 일곱 개의 구멍을 다 뚫게 되었다. 그러나 불쌍한 혼돈은 그의 친구들이 구멍을 뚫어주자 도리어 가엾게도 영원히 잠들어 버렸다. 

- p20, 중국신화전설 1, 위앤커, 전인초/김선자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16)


寓言 살우, 말씀언 


*儵 빠를 숙

    잿빛(靑黑繪), 남해임금(南海帝), 독화당하다(禍毒), 갑자기(忽), 빠르다(速)

    攸(바 유) + 黑(검을 흑)    

** 忽 소홀히 할 홀

      잊다, 홀연, 돌연, 문득, 다하다, 멸하다, 올(누에 입에서 나오는 실)

      勿(말 물) + 心(마음 심)

*** 混沌 섞일 혼, 어두울 돈

      混 [혼]섞이다(雜), 흐리다(濁), 합하다(合), 덩어리지다(氣末分)

         [곤]오랑캐이름(西戎名)

          水(물 수) + 昆(맏 곤, 형 곤)

      沌 [돈]어둡다(不明貇), 기운 덩어리(元氣未分), 혼돈(混沌), 엉기다(不開通貌), 물기운(水勢形容), 돌다(轉轉), 막히다(不通塞)

          水(물 수) + 屯(진칠 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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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지음 / 아침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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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예술 전공자가 파리에서 유학경험을 쓴 쪽글들을 모은 책이다. 

발화되는 순간 사라지는 중인 말처럼, 상연되는 순간 사라지는 극예술-무용, 연극, 오페라 같은-에 대한 이야기는 애틋하다. 

그렇지만, 나는 극예술을 별로 즐긴 경험이 없는 촌사람이고, 문화라는 걸 짝짓기 춤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저자처럼 비장해지지도 애틋해지지도 아련해지지도 않는다. 살짝 물러서서 그런 감상들을 구경한다. 

극장, 극예술이 오랜 역사성을 가진 나라로 유학이라는 걸 간 사람인데, 나는 그 오랜 역사성이 자본주의와 얼마나 결합해 있는지 놀라면서 구경한다. 오페라를 소개하는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장 끌로드 아저씨)를 읽을 때는 와 극장을 잘 아는 건 표 살 때 좋겠네, 저 아저씨는 표를 얼마나 많이 사고 얼마나 많은 공연을 본 걸까, 궁금해하면서 구경했다. 돈을 받고 공연을 팔아 온 도시의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돈을 내고 공연을 구경해 온 도시의 관객들이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건가, 생각했다. 영화관에서 좌석배치에 따라 다른 요금을 매기겠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던 우리 나라 상황이 떠올라서, 그 섬세하고 세세한 요금의 차등을 상상하면서 그걸 수용하는 사람들의 성정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여전히 복불복이라거나 운인 여기의 삶을 나는 더 선호하고 있다.

오래 서양식으로 공부한 저자의 어떤 이원론적 태도는 충돌하는 말들이 된다. 모계에서 부계로 전환되었다는 페미니즘의 언설을 자신의 언어로 해석해내려던 노력(비극의 탄생)은 무언가 거대한 혼돈이 되어버린다.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물성과 여성이라는 은유적 실체를 일치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나는 그 이야기가 결국 언어로 쓰여지면서 오해를 증폭시킨다고 생각해버린다. 이원론적 방식으로 쌓아올린 서구문명의 두 갈래 길에 과학과 철학 반대편에서 복잡다단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문학과 예술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몸을 가진 실체인 극예술이 극단으로 흐른 거라고 생각한다.(극장과 테러)


무언가 상대적이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거 같은 강자와 약자에 대한 말들 같아서 시학에 대한 저자의 의문을 옮겨 적는다. 

신기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래, 비극이란 관객보다 고귀한 인물의 고통을, 희극이란 그보다 저급한 인물의 고통을 다루는 것으로 규정된다. 모두 고통인 것은 매한가지이나 인물에 대한 나의 거리가 다른 것이다. 고귀한 이의 고통에는 몰입하므로 슬퍼지고, 저급한 이의 고통에는 거리를 두므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이 원리가 나는 언제나 기이했다. 사람은 어째서 늘 당연한 듯 거룩함 쪽에 이입하는가. 윤리적 우위라는 허상에 마음을 기대는 일은 어쩌면 그리도 쉬운가 -p102, '테러와 극장'


장르로서 오페라를 받아들인 이야기는 나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적어 둔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정 게임의 문제다. 오페라 관객으로서 나는 그 게임에 참여하기를 오래도록 부인해왔던 것이다. 반면 수많은 이들은 자발적으로 거기 참여하기 위해 그토록 긴 세월 극장을 찾아왔다. 이 생각을 하면 코끝이 찡해지는데, 왜냐하면 누군가 '믿는 체 하려는 것'은 결국 그가 '믿고 싶은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싶은가. 아마도 나로부터 먼 것. 멀어서 찬란한 것. 그것을 꿈꾸게 해주는 데 본디 예술의 임무가 놓여 있던 것은 아닌지. 애초에 그래서 인간은 허구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닌지. -p146- 147 '장 끌로드 아저씨'


나는 강자와 약자도 상대적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섣불리 대신 말하지도 곁에 서겠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글 속의 어떤 태도-약하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혹은 결국 옳다?-가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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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그랬어 221호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지음 / 고래가그랬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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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그랬어,를 동생이 구독해주고 있다. 아이들이 안 봐서 이제 하지 말라고 해야 하나 싶었는데, 둘째가 그래도 이것 저것 보나 보다. 221호가 온 날 내가 퇴근했더니, '교장 선생님이 우산을 부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뭔 소리지, 싶었는데, '1990 무화과 나무'라는 만화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생일선물로 받은 예쁜 우산 때문에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순이는 우산을 펼쳐들고 학교에 갔는데, 학교 앞에서 비는 이미 그쳤고 교장선생님은 번잡한 등교길에 우산을 접으라고 하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말을 못 들은 것 뿐인데, 교장선생님은 우산을 빼앗아 부순다. 만화를 보고 내게 묻던 아들처럼, 순이도 친구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기분만 나쁘다. 순이는 우울한 마음이 되어서 집에 오는 길에 우산을 고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우산을 고쳐 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괴로운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기다'라고 말해 준다. 그러면서, 괴롭고 해결책이 없을 때는 잊는 것도 좋다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은 잊어도 좋다고, 똥을 밟은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해 준다. 잘 고쳐진 우산을 받고 순이는 상했던 마음도 고쳐진 기분이 되면서 만화는 마친다. 


처음, 트라우마,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안타까워 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참 나,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아무데나 가져다 붙인 트라우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기도 한다. 잊어도 좋을 일을 복기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세태인 거 같아서 저런 말을 책 속에서 만나니까 너무 좋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모욕하면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에 한 법륜스님의 대답을 기억하고 있다. '상대가 똥을 내게 줬으면, 받지 말고 버려야 한다, 그걸 자꾸 들여다보면서 괴로울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하셨었지. 마음 속으로 '반사'를 날리고 조용히 내 자신의 마음 속에 평화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를 내 자신이 왜 자꾸 괴롭히는가. 똥을 밟은 거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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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랩 걸

https://blog.aladin.co.kr/hahayo/13372988

여기서 저자는 아이에게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럼 도대체 엄마란 뭘까? 엄마가 뭐길래, 아빠가 되겠다고 하는 걸까?

남자여서 아빠고, 여자여서 엄마인 게 아니라면, 과연 엄마는 뭘까?











2.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054698

완벽한 엄마는 아이에게 성장할 공간을 주지 못한다. 

엄마는 필요에 반응하되, 어리석음을 연기?하여 아이가 스스로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아빠는 추상 세계-사회-에 존재하지만, 엄마는 아이와 함께-가정- 존재하는 어른이기 때문에 너무 완전한 어른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에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완벽한 어른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 사는 아이는 어른이 되는 걸 두려워하고, 어른이 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한다. 평화로운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점점 자라지 못하는 어른이 가득 차는 것은, 길어진 수명과, 직접 살아내기보다 이야기를 구경하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책 속에는 역시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어 아이들을 비웃고 대신 해 주는 아빠도 등장하기는 한다. 부모란 역설인가 싶기도 하네.  



3. 젠더

https://blog.aladin.co.kr/hahayo/13206446

명백하게 아이의 잘못이라고 해도, 엄마는 아이를 감싸고 아빠는 아이를 야단친다,고 가족을 묘사한다. 

엄마인 나는 남편이 아이를 혼낼 때마다, 아이의 대변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 엄마인 나는 내가 아이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자만한다. 

엄마와 아이의 연결은 아빠와 아이의 연결보다 동물적이고 직접적이고, 감정적이다. 








4. 파친코

https://blog.aladin.co.kr/hahayo/13512685


선자는 노아를 결국 이해하지 못한다.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을 주고, 먹이고 입히면서 물적 필요를 충족시키지만, 추상의 영역에서 엄마는 무력하다. 









5.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https://blog.aladin.co.kr/hahayo/10227225

엄마와 아빠,는 상징하자면, 

속과 성일까. 

자연과 문명일까. 

땅과 하늘일까. 

감성과 이성일까. 








읽지 않은 책 중에 '엄마됨을 후회함'이라는 책이 있고 이 책을 읽고 마립간님이 남긴 서평(https://blog.aladin.co.kr/maripkahn/8861264)에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성범죄수사대SVU 에피소드와 아동학대 뉴스를 보면서 '여자이기만 한 여자들'(https://blog.aladin.co.kr/hahayo/12329640)이라는 글을 썼었다. 


역할로서의 '엄마'가 없다면 아이는 살아남기 어렵다. 엄마는 먹이고, 입히고, 보호한다. 아이가 절대적으로 약한 순간부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까지, 엄마는 아이를 보호하고 돌본다. 보호하고 돌보지만, 그 역할은 한정적이고, 완벽하지 못함으로써 세상에 나아갈 여지를 만든다. 지금 생존의 많은 부분이 돈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엄마라는 역할에는 이제 경제활동도 포함되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고, 아이를 낳기 전에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도 썼었다.

엄마라는 역할은 추상성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추상성은 아빠다. 성공, 명예, 이상, 이 모든 추상성은 아빠,라는 추상적인 존재에게 의존한다. 랩걸의 저자가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아빠만을 선명하게 그렸던 것에 삐딱해지던 심사는 '엄마말고 아빠가 되겠다'는 저자의 결심에 폭발해서 생각은 이어진다. 그 결심은 삶을 구성하는 어떤 부분들을 무시하는 말처럼 보였다. 


이렇게 쓰면서도, 이게 전부 딸인 나의 생각이라는 자각이 닥쳤다. 

보통은 여자에게 배정된 엄마의 수고를 알면서도 자신은 하려하지 않고 심지어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 추상성이 비대해진 문명세계의 어리석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남성인 아들은 어떤 입장일까 궁금해진다. 엄마에게 보호받으면서 아빠가 되어야 하는 아들에게 엄마와 아빠는 어떤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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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윌스미스가 아카데미시상식에서 크리스 록을 때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둘 다 나쁘지만 윌 스미스가 아예 매장되는 것은 과하지 않나,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으려나. 아이는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에서 보고 어느 정도 서구의 반응이 수긍이 되더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유튜브를 찾아 보았다. (http://https:www.youtube.com/watch?v=_atVK7RjUmA) 여기서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서구권,은 윌스미스가 크게 잘못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가족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이 많다. 그렇지만, 그건 맥락을 오해하고 있는 거다. 윌 스미스 가족의 지금까지의 어떤 태도가 그런 농담을 가능하게 했고, 윌 스미스는 그 전까지 웃다가 부인을 보고 나가서 때린 거라면서, 제목조차 '여자에게 휘둘려 모든 것을 잃고 있는 남자'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조종해, 감정적으로든 뭐로든, 조종해서 자신의 뜻 대로 움직이게 만들었어. 그러면 누가 더 나쁜 사람이야? 조종한 사람, 조종당해서 나쁜 짓을 한 사람."

"둘 다 나쁘지. 연예계에서 벌어진 일도 그랬잖아?"

"그래, 둘 다 나쁘지. 둘 다 나쁜데, 우리 나라는 조종한 사람을 더 나쁘다고 말하는 문화인 거고, 나는 그게 더 좋은 문화라고 생각해. 윌 스미스 부인이 윌 스미스를 조종해서 자신의 혼외정사를 수용하게 했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혼돈의 정체성을 넘기고, 윌 스미스를 불안하게 만든 것도 나쁘고, 크리스 록이 말로 그런 윌 스미스를 자극하는 것도 나쁘다고." 

물어본 것에 대해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뭔가 부족해서 쓰고 싶다.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는 계속 남자는 질서, 여자는 혼돈,이고 질서가 혼돈을 정리하지 못해서 아이들이 폴리 아모리에 플루이드 젠더, 따위의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는 이 가족의 문제가 윌 스미스가 가장으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질서를 잡지도 못 했으면서, 그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가부장 노릇을 하겠다고 폭력으로 행사했다고 문제삼는다.


내가, 폭력은 절대 안 되,를 수긍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로 자극하는 것에도 당연 책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나는 역시 윌 스미스의 업계퇴출이 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읽남,조차 그 동영상 제목을 그렇게 뽑은 걸 보면, 그 부인을 가장 나쁘다고 생각하는 거 갈다. 나도 윌 스미스가 좋은 여자를 만나지 못한 것 같다. 


폭력은 절대 안 된다,라는 말은 '폭력이 무엇인가'를 정의해야 한다. 언어폭력도 폭력이고, 방임도 폭력이고, 시선도 폭력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직접적인 폭행,만 폭력인 양 저런 말을 붙인다는 데 의아하다. 브런치에서 '모욕에 맞서는 방법'(https://brunch.co.kr/@youngmusic/139) 이라는 글을 보고 공감하고는, 저자의 책에 나는 공감할까 의심했다. 한국이 폭력이 허용되는 나라라서 윌스미스 옹호론이 크다는 글(https://brunch.co.kr/@brunchog1f/17)도 보이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은유로서 말하자면, 남성의 방식이 물리적인 충돌과 폭력이라면, 여성의 방식은 대화와 교묘한 괴롭힘이나 조종이다. 남성의 폭력이 제도적으로 여러가지 해결책들을 만들어왔다면, 여성의 폭력은 문화를 통해 제어되어 왔다. 문제를 해결하는 긍정정인 방식은 대화가 맞지만, 말 그 자체가 무해한 것은 아니다. 말로도 사람을 찌르고 죽일 수 있다. 말이라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점점 말들도 법적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성적인 문화에서는 교묘한 괴롭힘을 비열하다고 보지만, 여성적인 문화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미개하다고 본다. 그래서 물리적 폭력은 여성적인 문화에서 더 적고, 여성적인 문화권에서는 교묘한 괴롭힘이나 말을 이용한 조종에도 물리적 폭력만큼의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라는 오래된 경구처럼,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여성적인 문화는 생각하는 거다. 강한 힘을 우위에 두는 남성적인 문화는 부드러운 통제나 조종조차 제압하지 못하는 남성의 문제로 보는 게 아닌가 싶다. 서구권에서 윌 스미스가 심하게 비난받는 이유는 서구의 문화가 남성적이기 때문이고-부인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나 가부장이 되지 못한 것조차 윌 스미스의 잘못이다!-, 한국에서 윌 스미스가 옹호되는 이유는 한국의 문화가 여성적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https://blog.aladin.co.kr/hahayo/13486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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