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지음 / 아침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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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예술 전공자가 파리에서 유학경험을 쓴 쪽글들을 모은 책이다. 

발화되는 순간 사라지는 중인 말처럼, 상연되는 순간 사라지는 극예술-무용, 연극, 오페라 같은-에 대한 이야기는 애틋하다. 

그렇지만, 나는 극예술을 별로 즐긴 경험이 없는 촌사람이고, 문화라는 걸 짝짓기 춤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저자처럼 비장해지지도 애틋해지지도 아련해지지도 않는다. 살짝 물러서서 그런 감상들을 구경한다. 

극장, 극예술이 오랜 역사성을 가진 나라로 유학이라는 걸 간 사람인데, 나는 그 오랜 역사성이 자본주의와 얼마나 결합해 있는지 놀라면서 구경한다. 오페라를 소개하는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장 끌로드 아저씨)를 읽을 때는 와 극장을 잘 아는 건 표 살 때 좋겠네, 저 아저씨는 표를 얼마나 많이 사고 얼마나 많은 공연을 본 걸까, 궁금해하면서 구경했다. 돈을 받고 공연을 팔아 온 도시의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돈을 내고 공연을 구경해 온 도시의 관객들이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건가, 생각했다. 영화관에서 좌석배치에 따라 다른 요금을 매기겠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던 우리 나라 상황이 떠올라서, 그 섬세하고 세세한 요금의 차등을 상상하면서 그걸 수용하는 사람들의 성정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여전히 복불복이라거나 운인 여기의 삶을 나는 더 선호하고 있다.

오래 서양식으로 공부한 저자의 어떤 이원론적 태도는 충돌하는 말들이 된다. 모계에서 부계로 전환되었다는 페미니즘의 언설을 자신의 언어로 해석해내려던 노력(비극의 탄생)은 무언가 거대한 혼돈이 되어버린다.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물성과 여성이라는 은유적 실체를 일치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나는 그 이야기가 결국 언어로 쓰여지면서 오해를 증폭시킨다고 생각해버린다. 이원론적 방식으로 쌓아올린 서구문명의 두 갈래 길에 과학과 철학 반대편에서 복잡다단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문학과 예술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몸을 가진 실체인 극예술이 극단으로 흐른 거라고 생각한다.(극장과 테러)


무언가 상대적이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거 같은 강자와 약자에 대한 말들 같아서 시학에 대한 저자의 의문을 옮겨 적는다. 

신기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래, 비극이란 관객보다 고귀한 인물의 고통을, 희극이란 그보다 저급한 인물의 고통을 다루는 것으로 규정된다. 모두 고통인 것은 매한가지이나 인물에 대한 나의 거리가 다른 것이다. 고귀한 이의 고통에는 몰입하므로 슬퍼지고, 저급한 이의 고통에는 거리를 두므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이 원리가 나는 언제나 기이했다. 사람은 어째서 늘 당연한 듯 거룩함 쪽에 이입하는가. 윤리적 우위라는 허상에 마음을 기대는 일은 어쩌면 그리도 쉬운가 -p102, '테러와 극장'


장르로서 오페라를 받아들인 이야기는 나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적어 둔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정 게임의 문제다. 오페라 관객으로서 나는 그 게임에 참여하기를 오래도록 부인해왔던 것이다. 반면 수많은 이들은 자발적으로 거기 참여하기 위해 그토록 긴 세월 극장을 찾아왔다. 이 생각을 하면 코끝이 찡해지는데, 왜냐하면 누군가 '믿는 체 하려는 것'은 결국 그가 '믿고 싶은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싶은가. 아마도 나로부터 먼 것. 멀어서 찬란한 것. 그것을 꿈꾸게 해주는 데 본디 예술의 임무가 놓여 있던 것은 아닌지. 애초에 그래서 인간은 허구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닌지. -p146- 147 '장 끌로드 아저씨'


나는 강자와 약자도 상대적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섣불리 대신 말하지도 곁에 서겠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글 속의 어떤 태도-약하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혹은 결국 옳다?-가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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