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 유재현의 역사문화기행
유재현 지음 / 창비 / 2003년 12월
평점 :
올해 4월 30일은 베트남의 승전 3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날을 칭하는 호칭도 실로 다양하게 바뀌어 왔다. 광주폭동-광주사태-광주사건-광주민주화투쟁 처럼...
내 어린 시절 월남이 망한날, 패망일로 불리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동안 어정쩡하게 미국의 철수로 전쟁이 끝난 4월 30일 어쩌구....길게 설명했던 기억.
한겨레 신문과 방송에서는 요즘 종전 30주년 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나는 승전일 이라고 부르고 싶다. 베트남 해방을 염원하는 민중이 거대 국가 미국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한 날!
이 글을 쓴 이는 얼마전 읽은 '달콤한 열대'의 저자이다. 유재현. 열대 과일을 설명하는 글에 문득 문득 나타나는 저자의 역사인식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 사보게 된 책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메콩강이 흐르는 3국가,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을여행하며 쓴 글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트남은 우리가 한 짓이 있어 그 이름만으로도 상당히 거북스러운 나라이다. 그런데 이 나라도 도이머이 이후 상당히 바뀌었나보다. 호찌민 루트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고 구찌터널에는 슈팅레인지라는 것을 만들어 전쟁중 사용한 각종 총기를 쏘아볼 수 있게 만들었단다. 박격포도 쏴보고...
그 슈팅레인지에서 베트콩의 사용 무기를 들고 드르르르륵 총을 쏘는 베트남전 참전 미국 노병이라니...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 구지 터널은 군데 군데 관광객이 들어가 볼 수 있도록 조금 크게 파 놓은 곳이 있단다. 이 곳을 찾은 저자. 건방 떨다 호되게 다친다.
"여러분들 같으면 이 터널로 2km를 갈 수 있겠어요?"
그 말을 건네면서도 그는 별 표정이 없었고 나 또한 무심코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내 대답을 귓전으로 흘리지 않은 그의 표정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따라와"
거의 반말투였다. 그에게는 외국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와함께 있던 두 명의 한국인은 그의 제안에 고개를 흔들었다. 한 명은 이미 다녀온 듯 했고 다른 한 명은 50대였기 때문에 동행인 다른 사내가 만류했다. 결국 나만이 그를 따라 터널로 내려갔고 그것은 아마 그가 바라던 것이었다.
길이는 100m였다. 그는 성큼성큼 허리를 굽히고 앞장서 걸어갔다. 엉거주춤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힘겹게 그를 따라가던 내 앞에서 그는 곧 사라졌고 희미한 백열전구가 띄엄띄엄 불을 밝힌 어두운 터널에서 어느 순간 나는 혼자 남겨졌다. 끔찍한 공포가 온몸을 덮쳤다. 그만 주저 앉아 울어버릴 만큼 극심한 공포였다. 그럴 리가 없지만 영영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절망감과 금세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좁디좁은 터널의 어둠속에서 나는 사정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사라진 그의 흔적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온몸은 금세 식은 땀으로 젖어들었고 땀에 젖은 바지가 허벅지와 종아리를 붙들고 늘어져 걸음은 계속 엉켜들었다. 그리고 앞에 두갈래 터널이 나타났다. 나는 힘이 바진 허벅지를 부여잡고 그만 주저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되돌아와 나르 ㄹ일으켰다. 그는 말없이 다시 되돌아 이번에는 천천히 앞장서 걸어갔다. 나는 그렇게 100m의 나머지 절반쯤을 얼이 빠진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햇볕이 새어 들어오는 출구를 보았을 때에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건 필요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해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벤딘의 젊은 가이드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무거워진 눈시울을 눌러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그 터널을 기어 승전을 이끈 베트남 민중에게 경배!
캄보디아와 라오스편에는 가해자 베트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베트남도 인도차이나에서 패권을 쥐기 위해 이웃나라에 가해자의 모습으로 침략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아이러니...베트남 하면 무언가 마음의 짐이 있는데 그들도 가해자 였다고 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 지는 이 알량함은 뭐란 말인가. "너도 똑같은 놈이야.."뭐 이런 말도 안되는 동류의식인가?
라오스에서 벌어진 미국의 비밀전쟁과(이것은 정문태씨가 그의 책에서 너무나 잘 설명해 준다) 마약산업 등 추한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격렬한 내전을 겪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인의 각박함과는 다른 라오스인의 따뜻함까지.
베트남과 캄보디아편을 읽으며 심신이 지치고 맘이 부대꼈다면 라오스를 읽으며 편안해 지고 늘어지는 기분을 느끼리라.
별 5개를 주지 않은 이유는 글 차례가 조금 어수선하여 저자의 동선을 온전히 따라가기에 무리가 있다. 그리고 창비의 책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 오자도 1개 찾아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흔해빠지 어디가서 뭐먹고 뭐사고 잘놀았다 식의 기행문이 아닌 깊이있고 저자의 내공이 보이는 훌륭한 글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