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내 주변에는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간혹 있었다.

 

최초의 기억은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전학 가서 사귄 친구랑 이동도서관 책 기다리던 시간들이다. 정말 성실한 말단공무원의 전형이면서 어딘가 불쌍한 하이킥 신애아빠 역 했던 배우분 닮은 이동도서관 아저씨 얼굴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이 친구랑은 붙어다니며 책도 참 많이 읽고 친구집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하고 오빠 애칭? 이상한 별명도 알 정도였는데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멀어졌다. 아마 그 시기에 성당 친구들과 놀면서 차차 함께할 시간이 적어진 것이겠지.

 

중고등 학교 때는 허세로 세계명작을 읽고 입시 대비로 한국단편이나 고전을 읽느라(진짜로 단편은 원문을 다 읽음) 책에 대해 함께 나눌 친구가 없었다.

 

대학은 관련 전공을 택했으나 역시 독서 취향이 맞는 친구들이 없었다. 친한 과 동기도 몇 없었는데 다들 일찍 진로를 정해 그쪽 공부를 파는 눈치라 뜬구름잡는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잠시 오열)

동아리 세미나에서는 정말 내 취향 아닌 책들만 읽었다. 이때 읽지 않은 책을 그럴듯하게 읽은 걸로 둔갑하는 기술을 배웠다. 어느 날 정말로 읽어간 날이었나. 선배들 이야기를 듣다가 아 이분들도 나랑 별다를 것 없네, 하고 속으로 웃었다.

 

일하면서 책을 보고 또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 작가분 동호회를 하던 시기가 북클럽의 황금기였다. 초창기에는 그분 책 위주로 읽었지만 나중에는 이런저런 자기가 읽은 책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는 시기가 왔다. 그때 겹치는 책 위주로 서로 재미있었던 부분 이야기하며 쿵짝 맞아 돌아다니던 시기가 '청춘'이었나보다. 각종 예술영화관을 돌아다니고 작가들 강의도 따라다니고 고궁이나 근교를 같이 산책하며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하던 시기. 어느 호프집에서 쌍둥이같이 보일 정도로 같은 옷을 입고 나와 가아프 이야기하던 밤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들과도 더는 연이 닿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야 SNS도 휴대전화도 있지만 어쩐지 이민간 친구같이 서로의 시차를 느껴 잘 연락하지 않게 된다.

 

연애하면서 남편이 추천하는 책은 이상하게 잘 안 읽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각자 책은 꽤 보는 편인데 읽는 분야가 완전히 다르다. 만화, 역사서 정도나 조금 겹치고.

 

잠시 학교에서 일하던 때는 (이제는 희귀종인) 독서하는 아이들이 추천한 책을 읽기도 했다. 독서 동아리 담당이라 같이 메이즈러너 보러 간 게 기억에 남는다. 외고간 아이가 추천한 더 기버도 잘 읽었다. 아이는 원어로 읽고 난 번역서로 끙.

 

이때는 사실 육아와 일에 치여 거의 책을 읽지 못했던 시기이지만 어릴 때 독서모임에서 만났던 작가분의 글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 뿌듯했다. 애들은 노잼이라 하는 소설이었지만 내가 못 가르쳐서 그렇게 느낀 거겠지.

  

아이 낳고 기르면서는 그림책, 육아서에 버닝하다 2년 전부터 정신차리고 보던 책이나 새로운 책을 보려고 한다. 여전히 문학, 에세이 비중이 크지만 실용, 심리 분야가 늘었다. 역사나 과학 분야를 더 보고 싶은데 잘 안 된다.

 

그래서 올 초에는 학교독서모임에 가입했는데 그건 반애들 책읽어주는 모임이었다. (잠시 크게 웃음) 그리고 우리학교는 상당히 활동적이라 책 읽기보다 만들고 활동하는 시간 비중이 더 크다. 상당히 바람직하다. 이런 모임에서 신기하게 본인 책은 많이 안 보시는 분이 많다,기보다는 현실의 애들 이야기, 학교 뒷담화를 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사람도서관같아 이야기 잘 듣다가 온다. 심심할 때 대여하고픈 분도 있다.

 

작년 말부터인가 지역육아카페에 잡다한 글을 올리다 그런 글도 좋아해주시는 분이 있어 독서 모임을 하게 되었다. 아직 시작 단계인데 모임을 꾸리려고 하니 뭔가 지표로 삼을 만한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앞의 책들이 생각이 났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꽤 오래 전에 읽었나보다. 이제는 따스한 이미지만이 남았네. 같은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이 모임을 잘 하려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원하는지 잘 알아야 하는데 아직은 어떨지 감이 안 온다. 그런데 모임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모임 자체가 알아서 굴러가기도 하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롤모델이라면 전의 모임같이 친목과 독서의 경계 수준 정도이다. 육아에 지친 심신에 작은 활력이 된다면...... 잠시라도 내 감정과 사고에 충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간 내가 혼자 놀던 데 같이 가고 혼자 보던 책 같이 읽고 무엇보다 남의 이야기 많이 듣기.

다짐 또 다짐, 우선 듣기.

 

*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다가도 책이 나오면 어떤 책인지 궁금해하고 가방에 늘 한두 권은 책이 있고 문구류를 격하게 아낀다. (희귀동물 시리즈 고운 노트들을 애들이 다 끼적여두어 마음 아프다. 숨겨두었다가 중학교 가면 줄 것을. 요새는 또 거의 필기도 안 하고 안 시켜서 애들은 필기의 재미를 모른다, 기보다 내가 구식이겠지. ㅎ)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는 집은 정리가 쉽지 않다. 늘 여기저기 책이 널려 있고 함부로 꽂아두어도 안 된다. 읽다가 두는 거면 서표 붙이거나 하래도 말을 안 듣고 자기 읽던 데 덮어두었다고 골을 낸다.

 

책길이가 일정하게 맞지 않아 정리가 쉽지 않다. 같은 책이 두 권인 경우가 있다. 읽다가 서로 본다고 싸워서 보다 못해 각자 사주기도 한다. 다행히 요새는 번갈아 볼 정도로 컸다. 그래도 초등이라 뭐뭐는 자기 책이라 여전히 우기고 싸운다.

  

요새는 애들보다 먼저 잠들어 3-4시에 일어나면 집안 꼴이 가관이다. 이 방 저 방에 책과 머그가 잔뜩 널려 있다. 올빼미족에서 애들 덕분에 얼리버드가 되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무엇을 잡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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