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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리 포목점 - 오기가미 나오코 소설집
오기가미 나오코 지음, 민경욱 옮김 / 푸른숲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유자차와 무릎 담요가 생각나는 겨울로 가는 이 계절에 표지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들었다. 딱 이 시기에 만나 정말 다행인 책이다. 게다가 최근에 '고양이'를 정기적으로 볼 일이 생겼다.
이제보니 <안경>, <토일렛>을 만든 오기나미 나오코의 소설집이네. 나온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이 책을 알아 약간 억울하다.
모리오
모리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유품인 재봉틀에 애착을 느낀다. 그는 어릴 때 보았던 궁극의 꽃무늬를 찾아 '사부로 씨'가 있는 히다리 포목점을 찾는다. 그곳에서 이상적인 무늬를 찾아 무작정 스커트를 만들게 된다.
나는 사온 꽃무늬 옷감을 좁은 아파트 가득 펼치고 자로 치수를 쟀다. 그것만으로 방 전체가 꽃무늬에 푹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행복했다. 재단을 끝내고 앞뒤를 맞춰 컬러풀한 시침바늘을 꽂았다. 나는 재봉틀 앞에 앉아 조금 긴장한 채 바늘을 옷감에 댔다. 그리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바늘이 리드미컬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실이 옷감을 통과했다. 다다다다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스커트를 만들었다. 똑바로 재봉질이 되지 않으면 그때마다 실을 뜯고 다시 했다.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나는 오로지 스커트를 만드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나는 어머니의 발판 재봉틀을 마주하면서 그때까지 맛보지 못했던 평안함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 36쪽
모리오는 완성된 스커트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입을 스커트를 다시 만든다. 만들었던 첫 작품을 고쳐 재봉틀 소리에 안정을 찾는 동네소녀 카트린느에게 준다. 둘이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거닐기도 한다.
나와 소녀는 해가 저문 길을 나란히 걷고 있다. 갑자기 소녀가 내 손을 잡았다. (중략)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흙과 풀의 뜨뜻한 냄새, 조용히 우는 벌레 소리, 통통한 붉은 달, 땀이 살짝 밴 소녀의 손, 스커트 속으로 들어오는 여름밤의 바람. 나는 두근대는 가슴으로 하나하나를 느끼고 있었다. 73쪽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포목점의 '사부로 씨'가 실은 검은 고양이라는 것과 섬세한 남성 모리오가 어머니를 잃고 재봉틀을 돌려 치마를 만들어 입으며 치유받는 과정이 울림을 준다.
에우와 사장
<에우와 사장>에서도 <모리오>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양이를 인격체로 동등하게 대한다. 우연한 계기로 이비인후과 의사 요코와 그녀의 고양이 "나카무라 사장"과 살게 된 에우는 고양이가 가족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일을 맡게 된다.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게 반드시 최선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잠자코 있어도 서로를 아는 사이라는 것도 지나치게 사이가 좋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그만큼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듣는 것이 당신의 일입니다."
100쪽
잠을 열 시간은 자야 기운이 생기고 특별히 잘 하는 게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던 에우는 낯을 가리는 사장과도 단번에 통했고 히다리 포목점 아주머니가 소개한 가정의 고양이들과도 소통해서 고양이들의 어려움을 잘 풀어준다.
"고양이에게는 반드시 경어를 사용하세요. 고양이에게 아기말을 써선 안 됩니다. 이따금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콧소리를 내며 아기를 대하듯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착각입니다. 고양이는 인간보다 훨씬 나이를 빨리 먹는 존재입니다. 모두 듬직한 성인입니다. 아기가 아닙니다. 당신은 성인에게 아기 말을 사용합니까?" 100쪽
사부로 씨와 암에 걸린 나카무라 사장은 동물병원에서 조우한다. 사부로씨와 포목점 아주머니는 여기에서도 여전히 품위 있다. 사장도 역시 품격 있게 투병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느닷없이 사장이 말했다.
"낮잠은 푸르구나." (중략)
"어째서 암 같은 거에 걸린 거야?"
사장은 귀를 긁다 말고 에우의 눈을 물그러미 봤다.
"어쩔 수 없어. 유전인걸."
"유전?"
"전 주인도 암으로 죽었어."
"그런 걸 유전이라고는 하지 않잖아?"
"유전이야. 누가 뭐라든 유전이야. 너는 몰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면, 예컨대 그 사람과 피로 이어져 있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과 종족이 다르더라도 다양한 것이 옮겨져. 전염되는 거지."
"그래서 네 암도 전염되었다."
"맞아"
사장은 이불 위에서 꾹꾹이를 시작했다. 148-149쪽
아...꾹꾹이라니.
정말.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사장은 죽음을 맞는다.
죽는다는 건 결국에는 꾹꾹이를 멈춘다는 뜻이다.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이후 사장의 망해는 수많은 터키도라지꽃에 둘러싸인다. 요코와 에우는 무사히 장례를 치르고, 요코는 에우의 귀를 파주기로 한다. 역시 예상한 결말이고 이게 전부이다.
*
눈에 띄지 않는 소년, 소녀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소통하며
하루하루 그들만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엄청난 상실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렸다.
이런 담담함과 섬세함, 배려가 보이는 소설류가 일본 가정식 장르라고나 할까.
좋기는 한데 굉장히 뭔가 이질적인 정서이다. 일본 가정식을 먹으러 가서 한 상 잘 받고는 아 뭔나 개운하지만은 않다, 그런 느낌.
그래서 별 하나를 빼고 나니 뭔가 또 허전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소품.
SNS 사진발도 잘 받을 책이다.
사족-책을 읽고 나서 고양이 장난감 이름이 캣 댄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검색해서 어떻게 만드는지도 알게 되었다. 사지 말고 딸이랑 만들어서 시댁 꼼냥이들과 놀아주어야겠다. 책을 읽고 나니 고양이들 이름을 너무 유치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연이', 기연 씨
이렇게 다시 이름 지어 부를까?
전남 방언 '기연히(기어코)' 다시 한다 이런 느낌으로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