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페이스북 계정 있을 때 아는 분이 '쓰레기집' 청소하는 분의 블로그를 링크해서 보여주신 적이 있다. '쓰레기집'이란 정말 호더들처럼 쓰레기를 쌓아두고 사는 집을 말한다. 그런 집을 청소하는데 큰 보람을 느끼고 남는 시간에는 키티 굿즈로 자신의 집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살았던 분인데 청소하고 오는 집과 구성원에 애정을 갖고 포스팅하는 게 인상적이어서 가끔 보고 오곤 했다.
다시 찾으려니 못 찾겠다. 어디 가셨을까.
이분이야말로 영화 속의 '미소'처럼 살아가는 분이었는데.
원래는 사무직을 했다고 하는데 몸을 써서 뭔가를 변화시키는 게 좋아 청소업을 시작하셨고 워낙 잘하셔서 예약도 많았다.
언제나 다감한 말투로 그냥 정리가 잘 안 되는 보통의 집보다는 버리고 닦을 것이 많은 '진짜 쓰레기집'만을 치우고 싶다고 하셨다. 정리가 안 되는 집말고 거의 뉴스나 다큐에 나올 수준의 집을 집주인과 상의해 함께 치우고 정돈하며 보람을 느낀다고.
(내용 유출 주의)
과거 밴드를 했던 '미소'(이솜)는 담배, 위스키, 남자친구만 있으면 행복하다. 그러나 이 모두를 누리려면 최소한의 비용을 벌어야 한다. 미소가 잘하는 건 청소와 요리여서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일이 끝나면 좋아하는 바에 들러 위스키를 한 잔 마시고 담배를 피는 게 낙이다.
때는 2014년
아마도 말많은 그 정권 시기에 담배 가격이 대폭 인상되었을 것이다.
보통 이럴 때 사람들은 담배를 끊지만 미소는 금연 대신 월세집을 나와 최소한의 짐만 꾸리고는 밴드를 같이하던 시절 친구들 집을 전전한다.
집이 없으니 거지라고 하지만 미소는 "나는 여행하는 중일 뿐"이라고 말한다. 남자친구 한솔(안재홍)은 숙식이 해결되는 공장기숙사에서 살고 둘은 데이트를 위해 영화표를 받으려고 헌혈을 하기도 한다.
밴드시절 친구들은 대개 그 시절과 달리 생활에 찌들어 있다.
맨 먼저 미소가 찾은 문영은 수액을 스스로 놓을 정도로 피로에 쩌들어 회사를 다니고 있다. 문영은 예민해서 혼자 지내야 한다며 미소를 거부한다.
다음에 찾아간 친구 현정이는 키보드를 쳤던 밝은 친구. 그러나 이제는 오래된 변두리 주택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백수남편과 살고 있다. 미소는 치워도 치워도 표도 안 나는 친구의 낡은 살림을 정돈해주고 밑반찬도 만들어주고 네 밥은 잘 챙겨먹으라고 쪽지를 남기고 나온다.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는데 찌들대로 찌든 아줌마 친구는 서럽게 울더니 입을 벌리고 잔다. 진짜 변두리 빌라에 있을 법한 아줌마였다. 생활연기 정말 좋았다. 결혼하고 나서 나도 울 때면 저렇게 울지는 않았는지. 그런데 정말 머쓱한 게 아이 재우며 울다가 그러고 그냥 피곤해서 입 벌리고 잔다는 것.
다음날 아침에 나오면 펼쳐지는 집안의 풍경.
정돈되지 않은 채 반복되는 어제와 오늘이 똑 닮았다.
신혼집 분위기 물씬 풍기는 남자후배 대용이네 집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쓰레기집이 되어 있다. 대용이는 퇴근하고 와서는 술만 마시고 은둔한다. 아내와 신혼초부터 각자의 길을 가기로 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집대출은 남아 20년간 회사를 다니며 꼬박 100만원씩 은행에 내야 한다. 게다가 더 기막힌 건 월급은 고작 190이고 아내도 없고.
대용은 이런 집이 꼭 감옥같다며 운다. 다음날 미소는 쓰레기집을 깨끗이 치워주고 집밥을 차려 대용이를 위로한다.
한솔이는 집이 없다지만 성별이 남자인 후배네에 간 걸 불편하게 여긴다. 그래도 미소는 갈 데가 없어 '록이'라는 남자 선배네도 방문하는데 연로한 록이부모님은 미소를 며느리라도 되는듯이 아껴주고 살갑게 대한다. '록이'마저 부모님을 위해 미소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미소는 정색을 하고 거절한다. '록이'네 집에서 탈출하는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미소가 묵어본 곳 중에서 가장 넓고 비싼 집은 기타를 쳤던 정미네집이었다. 아이를 어르면서 수행하려면 아이를 낳아보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정미는 시댁은 잘살지만 남편은 그녀를 존중해주지 않는다. 정미는 집도 없는데 술, 담배나 하는 미소가 염치가 없다며 모욕하고 미소는 그 집을 나온다.
미소가 방문할 친구들 집을 찾지 못해 다른 셋집을 구하러 다니는 과정이 참으로 분노를 부른다. 어떻게 저런 환경의 집을 저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세를 내고 살아야 하는 건지.
미소가 가사도우미로 일했던 집의 젊은 여자는 집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청춘을 뭇 남성들에게 팔고 있었다.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가져 낙담한 그녀를 미소는 백숙을 해서 잘 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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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담배를 즐기고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잘 웃는 사람이 남자라면 천상병 시인급의 한량으로 사람 좋아 보일 뿐이다.
여자라면 즉, 미소같이 행동한다면 불편하게 보는 시선이 뒤통수에 꽂힌다. 대다수 사람들은 선배 정미와 같은 시선으로 그 정도 생활수준이면 술과 담배를 끊으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미소는 노숙인이나 광녀가 아니라 염치를 알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면 계란 한 판이라도 꼭 사가고 신세를 지고 나올 때면 집을 치워주거나 요리를 해두고 나와서 꼭 그 빚을 갚는다. 집은 없지만 위스키, 담배를 즐기고 책을 읽고 취향만은 분명하다.
영화 속에서 눈부시게 빛났던 미소와 밴드부 친구들의 젊은날들
밤새 웃고 떠들고 마시고 포커를 쳤던 날들은 너무나 짧고 이후의 생활은 길기만 하다.
힘겹게 맛집 데이트를 하려고 마음먹은 날 재료가 소진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한솔은 학자금을 갚고 미소와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다고 선언한다.
미소와 한솔이 시리도록 푸른 새벽에 이별하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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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이 아버지 장례식장에서야 모인 밴드부 친구들은 저마다 미소를 만났던 얘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지만 돈이 없어 핸드폰이 끊긴 것으로 추정되는 미소를 다시 만날 길은 없다.
미소는 달팽이같이 늘 자신의 집을 짊어지고 다니며 공터에 텐트를 치고 산다.
행복을 주지 않는 집을 포기하고 눈앞의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 하루하루 성격이 명확한 일을 하는 그녀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앞으로도 분명한 취향을 가지고 확고하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