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최'는 몇해전에 《요주의인물》로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서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보고 읽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출간당시 책 소개를 읽었겠지만 내가 이 책을 구입할 당시에는 '이 책 사고 싶었었지' 하는 기억만 남아있었을 뿐이라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채였다.


후-

줄거리를 미리 읽었더라도 나는 결국 이 책을 사게 됐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 책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내가 무척 싫어라 하는 이야기이다. 일단, 1부는 십대 소녀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열다섯에서 열여섯으로 넘어가는 소녀들.



나는 몇 번이나 얘기한 적이 있지만 내 십대 시절과 이십대 시절을 내 인생에서 통째로 드러내도 나는 지금의 나일 거라고, 그 시간은 내게 없었던 시간, 죽어있던 시간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더랬다. 좋았던 기억이 분명 사이사이 있었지만 그 시절을 왜 그렇게 보냈을까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그 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에 대해서도 여러차례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바보였다고, 멍청했다고,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고 후회하는 순간들의 대부분은 그 때에 존재한다. 언젠가부터 선택과 결정을 앞에 두고서는 '시간이 흘러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될까?' 스스로 묻고 있긴 하지만, 그 때는 나에게 그런 물음을 하지 않았더랬다. 삶의 태도 자체가 다가올 미래에 지금을 저당잡히지 말고 순간에 충실하자이기는 하지만, 그 때는 정말이지 눈앞의 것만 보고 결국 후회하게 될 선택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 선택들 대부분이 내 스스로 한 것이긴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했다는 선택들 중의 많은 부분은 그러나 순전한 내 선택은 아니었다.



이런 나의 성향 탓인지, 내 성향으로 살아온 태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미성년자와 성인이 섹스하는 이야기를 진짜 극도로 싫어한다. 너무 싫어한다. 그 당시 특유의 뭔가 해보고 싶고, 어른이 되어보고 싶은, 뒤쳐진 존재가 되기 싫은 마음들을 건드려서 성을 착취하는 이야기를 너무나 싫어한다. 얼마전 읽었던 '애나 번스'의 《밀크맨》에서도 사십대의 남자가 십대의 여자에게 접근해 자꾸 자신의 애인 삼으려고 했으면서 그러나 그 사십대의 남자는 그여자보다 나이 많은 그 여자의 '어쩌면 남자친구'는 어린애 취급했다. 여기에서도 드러나듯이, 미성년자에게 접근하는 성인은, 상대가 미성년자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접근한다는 것.



그런데 수잔 최의 신뢰연습이 바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십대의 소녀가 같은 연극반 학생인 소년과 사귀고 섹스하는 것에서는 거부감이 없었다. 물론 거기에서도 많은 후회라든가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러나 한쪽이 성인인 것과는 시작과 진행과 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인 남자가 십대 소녀에게 접근하고 섹스를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소녀가 고작 열여섯살이라는 걸 내가 알고 있는 이상 이게 너무 끔직한 거다.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이야기이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대체 이런 이야기를 왜 쓴걸까, 분명 쓴 이유가 있을텐데, 하면서도 그만 읽을까를 갈등해야 했다. 그리고 힘겹게 2부를 시작했다.



2부는 그로부터 십년이상이 지나 서른이 된 그들이 나온다. 누군가는 작가가 되었고 누군가는 회사원이 되었고 누군가는 연극감독이 되어서 진행되는 이야기. 작가가 써낸 십대 시절 자신들의 이야기에는 그러나 기억이 왜곡이 당연히 많았고, 또한 드러나지 않았던 혹은 드러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당연하게도 더 많이 담겨있다. 자신이 사랑했던 소녀가 어른 남자와 섹스하는 사이라는 걸 알고 상처받았던 소년은 그때 그 일들은 그 순간 그들이 분명히 알고, 동의하는 행동이었다고 여전히 울분에 차서 말한다. 그들이 미성년자라 몰랐다고? 아니 알았어, 알고 한 일들이야! 라고. 이때 남자의 말을 듣던 여자는 그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실은 남자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 사실은 그 어린 여성들을 경멸한다. '그릇된 판단을 해놓고 이제 와서 남 탓으로 돌리는 이 젊은 여성들을' (p.346)



누구보다 이 여성이 그런 젊은 여성들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십대 시절 당시 그 늙은 남자와의 섹스를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환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그 시절 그와 섹스했고 그와 함께하기를 원했던 것은 분명히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안다.



캐런은 그를 원했다. 무지하고 경험 없던 당시에 그를 잘생기고 안목이 넓고, 성실하고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다. 지식과 경험을 갖춘 지금, 그가 못나고 편협했다는 걸 안다. 불성실하고 믿음직하지 않았고, 심지어 잔인했다. 자신이 그를 원했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그를 원했다는 것은 캐런이 선택했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런 이유로 입을 꾹 다물고 고민을 혼자 떠안았다. (p.345-346)



그 누구보다 자기가, 자가 자신이 그 늙은 남성을 원했던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원했다는 것이 자기의 뜻이라는 걸 인지하면서 동시에 그 당시에 그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 당시에 그를 원했던 것은 '지식과 경험을 갖추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성년자는 무엇인가. 우리가 미성년자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판단이 아직은 서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미성년자가 설사 '원했어도' 그들과 섹스하면 강간이라고 벌을 주는게 아닌가. 그들의 판단은 아직 정립되어있지 않으므로. 그런 미성년자임을 '알고' 접근해서 섹스를 한 것은, 과연 '섹스를 한' 것이며 '사랑을 나눈'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자기의 과거가 있기 때문에 캐런은 스스로에게 자유롭지 못하고, 그건 내가 원했잖아, 라고 하지만,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그 시절의 일들에 대해 '그건 내가 원했으니까, 내가 잘못한거지, 내 탓이지' 라며 살고 있는가. 나는 이 부분에서 캐런이 저렇게 생각하는게,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버리지 못하고 그러므로 다른 젊은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그릇된 판단을 내린 것이며, 그렇기에 상대 탓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게 안타까웠다. 그릇됫 선택을 한 사람들의 잘못인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캐런이 이렇게 생각하는게 불편하고 가슴이 아팠는데, 아아,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흐르려고 이런 대사가 나오나 했는데, 아아, 2부의 끝으로 가면 사실은 캐런도 '그가 나빴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깨닫게 된다. 얼마나 나빴느냐면, 당연히 응징을 받아야 할만큼. 캐런은 그 시절의 자신이 선택한 것이니 그의 탓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녀에게 그 일은 결코 사소한 일도 아니었고 결국 지금에 이르게 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 일을 잊을 수 없다. 잊지 못하는 일이 되었다. 그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살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혹독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와 재회하게 되었다. 만약 그녀가 그 일을 정말로 그의 탓이 아니라고,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녀가 그 일을, 그 행동을 할 생각을 했을까? 나는 2부의 이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무척. 또한,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시도하는 세상의 모든 남성들이 이런 식의 응징을 언젠가는 받기를-가급적 빨리!- 바라게 되었다.




인생이 언제 누구와 재회시킬지, 둘이 옛일을 얼마나 비슷하게 기억할지 아무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 캐런은 자기 나이가 많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너무 어렸다. 그때와 달리 이제 그 일이 마틴에게 별일 아닐 수 있음을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 재회가 - 캐런을 단순히 건드린 게 아니라 망가뜨린 이 사람에게는- 아무 감흥이 없을 지도 몰랐다. 그가 캐런을 못 알아볼 수도 있었다. 알아본대도 다르게 기억할지 모르고. 똑같이 기억해도 둘의 지난 관계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P316



인생이 언제 누구와 재회시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똑바로 살아야 한다... 똑바로 살아야 돼.....




전혀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위의 인용구절에 대해서는 정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누군가를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때는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기억하더라도 서로의 상대에 대한 기억은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서는 예전에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날 수도 있고. 상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아아 맞아, 내가 이래서 이 사람을 사랑했었지' 하게될 수도 있고 '아아 맞아 이래서 내가 이 사람과 헤어졌지' 하게될 수도 있다. 나는 사랑으로 기억하는데 상대는 전혀 다르게 기억할 수도 있고 그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서는, 마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그때 당신을 무척 좋아했다, 고 말했던 적이 있었는데 상대는 내게 '그때 왜 말하지 않았냐'고 했다. 그가 몰랐던걸까? 알았지만 그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걸까? 기억은 왜곡되고 노래 가사처럼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공교롭게도 나는 저 인용문을 보고서는 피츠제럴드의 단편,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이 생각났다. '윌라 캐더'의 《로스트 레이디》덕에 피츠제럴드 단편선 꺼내서 <겨울 꿈> 다시 읽었는데, 오오, 다시 읽어봐야지 생각한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이 마침 바로 뒤에 있어, 내친 김에 두 편 다 다시 읽었다.


















남자는 고향에 왔다가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 시간이 남아, 어린 시절 자신이 연정을 품었던 여자의 전화번호를 전화번호부에서 찾게 되고 그렇게 그녀에게 연락한다. 나 기억하니? 남자는 결혼 후 이혼을 한 상태였고 여자는 결혼을 한 상황. 여자는 당연히 기억하지 지금 어디야? 묻는다. 남자는 공항이라 답하고 여자는 시간이 된다면 잠깐 들러, 라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꼬맹이었던 시절에 만났다가 훌쩍 어른이 된 지금 재회한다. 너는 예전에도 예뻤는데 지금도 예쁘네, 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순간순간 어? 그건 기억에 없는데? 하지만, 어릴 적이었으니까, 추억은 다르게 적히는 거니까, 하며 대화를 나누다보니 아아, 그 시절의 감정이 몽글몽글 다시 찾아오고, 여자는 아아, 나는 남편이 있는데 자꾸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남자랑 키스를 하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될 것 같아져 버리는거다. 여자는 그 때의 앨범이 있지, 하면서 앨범을 가져오고, 이거봐 이때의 너, 하면서 가리키는데, 아아, 남자는 그제서야 알게 된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는 그가 아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네?????????


-얘 나 아닌데?

-얘가 너잖아.

-아닌데?


..................................................................................................



기억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다시 피어나던 지금의 사랑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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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02-15 0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국에서 그래서 미성년자는 무조건 일곱 살 이상 차이나는 관계를 범죄에 준해서 본다는 얘기(정확한 건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에 동의합니다. 경험하고 느끼는 세계의 차원이 다른데 그걸 자기 자유 의사라고 보는 건 맞지 않다고, 저도 생각해요.

단발머리 2021-02-15 10:05   좋아요 1 | URL
저도요, 저도 블랑카님 의견에 완전 동의해요.

다락방 2021-02-15 12:26   좋아요 0 | URL
제가 봤던 미국 영화에 그런거 나오거든요. 이웃집 아주머니가 이웃집에서 일어나는 성인 남자와 미성년자의 성적인 일을 알고 경찰에 신고해서 남자가 잡혀가는거에요. 그러자 그 아이가 아주머니에게 ‘그런데 저도 원했어요‘ 라고 말하거든요. 그 때 아주머니가 말해줘요.

˝네가 아무리 원했어도 너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그건 강간이야.˝

저는 아주머니의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걸 무조건 강간이라고 해야 이 범죄가 줄어들것 같아요. 그래야 미성년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번 이 아이도 원했어, 라면서 잘잘못을 아이랑 성인남자가 가리고 있을거 아녜요. 그 싸움 하는동안 아이는 뭐가 돼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 가해질 2차 가해는.. 하아-

단발머리 2021-02-1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츠 제널드 저 단편.... 어머!! 완전 신세계네요. 저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다락방님 글 읽었는데도 넘 황홀해요.
얘 나 아닌데? 이거 어떻게 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2-15 12:26   좋아요 0 | URL
재밌죠? ㅋㅋ
제가 피츠제럴드 단편을 진짜 엄청 좋아해요. 이런 얘기가 많아요! <컷 글라스 보울>은 읽다가 소름 돋는다니깐요! 너무 좋아합니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을. 흑흑 ㅠㅠ
 















윌라 캐더의 ⌈로스트 레이디⌋는 얇은 책이라 단숨에 읽었다. 단숨에 읽고 책장을 덮고서는 그러나 오래 아련했다. 따지고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지점이 소설가가 가진 놀라운 힘이 아닐까 싶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사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해도 그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만큼 움직일지는 작가가 써내는 오롯이 그만의 능력일 것이다. 대부분 이야기보다는 문장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뭐가 이렇게 건드리는걸까. 이야기? 문장? 확실한 건, '이 이야기'를 '윌라 캐더'가 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설레임과 욕망과 환상과 빛, 반짝임.


이성이든 동성이든 누구나 어떤 상대에 대해서 반짝반짝 빛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은 달라', '저 사람에게선 빛이 나' 하는 느낌. 누구나 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아닌데도 나에게만 유독 반짝거리고 환한 사람.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 그냥 보통의 사람이었구나, 빛이 사라졌구나, 하고 느낄 때도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빛이 난다고 느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그 빛이 사라짐을 느끼면서 그러나 이것이 그 사람이 한 일일까 스스로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아니, 그건 내가 한 일이었다. 그사람의 말이나 행동 외모, 뭐가 됐든 거기에 빛을 부여한 건 내가 한 일일것이다. 내가 가진 환상, 내가 가진 기대 같은 것들. 어느 순간 그것이 사라지고 내가 씁쓸해한다한들, 상대가 내게 빛을 느끼라 요구한 적도, 실망하라 요구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철도 사업 덕에 부유한 '포레스터 대령'은 스물다섯살 연하의 아내 '포레스터 부인'과 함께 여름철이면 타운의 집을 찾아 몇개월간 머무른다. 집 앞의 습지나 숲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포레스터 부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동네 소년들은 그 숲으로 소풍을 가면서 포레스터 부인을 마주치는 걸 좋아했다. 포레스터 부인은 젋고 상냥했고 밝고 환했으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포레스터 보인을 좋아했다. 마을의 사람들도 그리고 포레스터 대령의 친구들도. 


마을의 소년 '닐'은 변호사인 삼촌 덕에 포레스터 부인과 친하게 지내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한다. 다른 여성들에게서는 특별함을 찾지 못할 정도로 포레스터 부인을 특별하다 생각하는 닐은 그러나 포레스터 부인이 자기가 생각하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빛은 사그라들고 환상은 깨진다. 포레스터 대령이 병이 들고 몸을 가눌 수 없게 되고 가진 돈도 잃게 되었을 때,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돌봄노동과 가사노동을 온전히 포레스터 부인이 하게 되었을 때, 포레스터 부인은 점차로 힘을 잃는다. 나는 결코 여기에서 이렇게 사는 걸로 만족하지 않겠어, 저기 다른 곳으로 환한 곳으로 갈테야, 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당장 헤쳐나가야 하는 눈앞의 삶은 그녀를 자꾸 이곳으로 주저앉힌다. 



이 책의 뒤에는 핏츠 제럴드가 윌라 캐더의 이 소설을 읽고 혹시 자기가 쓴 소설이 표절로 느껴지진 않을까 염려하여 윌라 캐더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윌라 캐더는 그렇지 않다고 답장을 보내준 것도 함께 실려있는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피츠제럴드를 떠올렸지만, 그러나 내가 떠올린 소설은 피츠제럴드가 걱정한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었다. 나는 피츠제럴드의 단편 <겨울꿈>을 떠올렸다. 꿈이 사라졌다고 말하던 청년이 기억난 까닭이다. 


















단편 겨울꿈에서 소년 '덱스터'는  골프장 캐디로 일하다가 부잣집 소녀 '주디'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소녀를 알고난 직후 충동적으로 캐디를 그만두고 청년이 되어 그녀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어릴적에 짐작했던대로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매력을 가진 여성이 되어있었고, 덱스터는 주디와 함께 식사를 하고 키스를 하고 자연스레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디는 그렇게 지내는 남자가 열명이 넘었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가 지쳐서 자신을 포기하려고 하면 다시 다정하게 대해주면서 그녀의 곁에 머물도록 했다. 그녀의 매력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남자들은 다시 다정히 대해주는 순간 일년을 버틸 힘을 다진다. 그렇게 번번이 그녀를 기다리다 잠깐 행복하고 다시 상처받고 기다리다가 결국 덱스터는 '아이린' 이란 여성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약속한다. 아이린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고 단단했고 안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주디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 '달링' 이라고 부르면서 '나랑 예전처럼 지내자' 하고나자 아이린에게 이별을 고해버려... 오, 남자여......


그러나 주디는 그렇게 한달여쯤만을 덱스터의 옆에 있었을 뿐, '내가 아이린의 남자를 뺏을 순 없지' 이러면서 세이 굿바이 하는 것입니다. 아이린은 뭐가 된것이란 말인가... 


그 후 7년여의 시간이 흘러 덱스터는 우연히 주디의 소식을 듣게 된다. 결혼을 했고 그녀를 막대하는 남편과 살고 있다고.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주디의 미모를 '괜찮은' 정도라고 얘기한다. 덱스터는 그가 전해주는 얘기를 듣고는 '꿈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윌라 캐더의 소설을 읽고 피츠제럴드의 겨울꿈 생각나서 다시 읽었는데, 어휴, 읽다가 나 갑자기 아이린 되어가지고 너무 슬펐다. 부대찌개를 데워야겠어 ㅠㅠ 나랑 있을 때 좋아했고 단단했고 안정적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치명적 매력의 여자를 마주치고는 나에게 세이 굿바이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나. 나는 치명적 매력없는, 우선 순위가 아닌, 안정적으로 선택하는 그런 보험같은 여자인가. 나는 아이린이 되어서 너무 슬퍼가지고 ㅠㅠ 이거 왜 다시 읽었지 ㅠㅠ 막 이렇게 되었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자기가 환상을 덧씌우는 치명적 매력의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걸까? 누구나 그런 사람이 있는걸까? 치명적 매력이 후려치면 열번 슬프고 한 번 기뻐도, 그 한 번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타인을 향한 꿈을 꾼다면 그 꿈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시 윌라 캐더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유독 슬펐다.

포레스터 부인이 힘을 잃고 빛을 잃고 사그라드는 모습이 슬펐는데, 그동안 유지되었던 그 힘이 그렇다면 남편 때문이었던 것이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닐 보다 조금 더 나이 많은 불량한 청년 '아이비'가 있었다. 아이비는 십대였던 시절에도 동물을 학대했고(딱따구리 학대 장면에서 책장을 덮어야했다, 너무 괴로운 장면이었어 ㅠㅠ), 그 숲이 포레스터 부인의 것이라는 것도 마음에 안들었고, 포레스터 부인에게 대적할만한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에서도 분노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불량하게 살아가면서 힘을 키운다. 어떤힘? 비열한 힘을. 그래서 남편이 앓아 눕고 돈도 없던 포레스터 부인에게 다가간다. 포레스터 부인은 그에게 자신의 땅을 임대해주고 거기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먹고살 수 있다. 남편이 몸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되고 그녀가 남편과 집을 돌보면서 점점 더 정신적으로 무너지자 이 비열한 청년 아이비는 포레스터 부인의 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고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저녁을 먹이기도 한다. 아이비가 친구들을 불러모으고 그곳에 포레스터 부인 한 명만 여자였을 때 내가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는지. 닐은 그런 그녀에게 아이비와 어울리지 말라고 말해보지만, 그러나 포레스터 부인은 아이비로부터 지금 당장은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닐은  어느날, 아이비가 포레스터 부인을 뒤에서 끌어 안는 모습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이 때가 너무 속상했다. 남편이 쓰러진 것보다 이게 더 힘들었다. 그러니까 바로 저 순간이 내포하는 바로 그 의미가 너무 힘들었다. 남편이 옆에 있었을 때는 차마 어떻게 하지 못했던 여자를, 그러나 남편이 없으니까 뒤에서 자기 멋대로 만지고드는 그 남자에 대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이 너무 힘들었다. 나는 그게 너무 비열하고 너무 싫다. 남자가 있는 여자는 만지지 못하지만 남자가 이제 없는 여자는 만질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나는 그게 진짜 너무 싫다. 너무 비열하고 너무 찌질하다. 남자가 없는 여자는 존중해야 할 한 인간임을 인지하지 않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지점이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자신을 지킬 사람은 자신 하나뿐인데, 심지어 자기의 경제적인 부분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게다가 타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녀가 거기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픈 거다. 너무 아프다.



가부장제 왓더헬... 교육과 일자리의 성차별 왓더퍽........



그나저나 윌라 캐더의 책이 이렇게 세 권 있는데 다 출판사도 다르고 디자인도 다르고...나는 책장에 이 책들을 어떻게 꽂으면 되는건가염??




















"글쎄, 내 철학은 이겁니다. 사람이 날마다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있으면 결국에는-말하자면, 자기도 모르게-이루게 될 거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는 말이에요. 물론, 당신이 세상에서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모르기에는, 난 탄광과 공사장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무척이나 우울한 이야기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듯이, 그 무거운 진실을 묵묵히 인지하는 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듯이. "닐, 콘스턴스. 너희가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면 말이다, 네 마음이 가장 절실히 바라는 일을 결국 이룰 거야." - P66

"왜냐하면 내가 말한 방식으로 간절히 꿈꾸는 일은 이미 성취한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서부는 전부 그런 꿈에서 싹터서 자랐어요. 이주 농민들과 광부들과 건설업자들의 꿈입니다. 내가 스위트워터에 집을 짓겠다는 꿈을 꾼 것처럼 우리는 산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깔겠다는 꿈을 꿨습니다. 다음 세대들에게는 그것이 그저 일상이겠죠."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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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2-14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량 청년 아이비의 행태를 읽으면서 저는 최근에 읽은 <진주>의 이 문단이 떠올랐어요.

... 부엌에서 쥐가 나왔을 때, 온갖 동네 남자들이 어머니를 남편 없는 여자라 여겨 술에 취해 우리 가게를 찾아올 때, 그 남자들의 여인들이 어머니를 남편 없는 여자라 수군거리면서도 질투에 가득차 손님인 척 찾아올 때도, 어머니는 잠이 왔습니다.
꿈과 잠은 그녀가 쉴 수 있는 유일한 거처였기 때문입니다. 꿈에서조차 아름다운 어머니는 자꾸만 잠이 왔습니다. (40쪽)

여자의 주인은 여자인것을.... 넘 슬프네요 ㅠㅠ

다락방 2021-02-15 08:52   좋아요 0 | URL
남편이 없으면 온전한 인간으로 여겨기지 않았다는 게 너무 화가 나고 슬퍼요. 너무나 당연하게 ‘남편 없으니까 이제 내가 .. ‘라는 그 생각이 진짜 지긋지긋하고 끔찍해요. 싫다고 밝히는 나의 뜻은 존중되지 않고 내 옆에 누군가가 있냐 없냐로 판가름하다니.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정말 끔찍한 장면이었어요. 싫어요 ㅠㅠ

2021-02-15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2-15 08:52   좋아요 1 | URL
저도 좀전에 페이퍼 하나 쓰고 루틴회복 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옥수수를 관찰하세요 - 여성 유전학자 바버라 매클린톡의 생각 인물다큐
크리스티아나 풀치넬리 지음, 알레그라 알리아르디 그림, 김현주 옮김 / 책속물고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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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과 세포학이 너무 좋아서 자기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는 유전학자 바버라 매클린톡의 이야기.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이 아까워 머리도 짧게 자르고 옥수수 농장에서 좀 더 편하기 위해 치마를 버리고 원하는 것에 열중하는 이야기를 보노라니 정말이지 의욕이 뿜뿜 샘솟는다. 전기를 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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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 한 달 살기 태국 남부 한 달 살기 시리즈
김경진.조대현 지음 / 나우출판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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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태국 여행 가이드 책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한달 살기에 대한 어떤 팁이 담겨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액티비티, 교통수단, 레스토랑 소개일 뿐...
그렇지만 또 사흘 여행가나 한달 사나, 중요한 건 먹고 이동하는 거니 더 뭐가 있겠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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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2
서이레 지음, 나몬 그림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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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됨과 여자됨이 부질없다는,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이라는 걸 깨달은 정년이는 두렵지만 앞으로 나아간다. 소리도 연기도 배우는 건 쉽지 않지만, 무엇보다 여자를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고, 그렇게 여성됨을 내려놓고 나로서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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