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최'는 몇해전에 《요주의인물》로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서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보고 읽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출간당시 책 소개를 읽었겠지만 내가 이 책을 구입할 당시에는 '이 책 사고 싶었었지' 하는 기억만 남아있었을 뿐이라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채였다.


후-

줄거리를 미리 읽었더라도 나는 결국 이 책을 사게 됐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 책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내가 무척 싫어라 하는 이야기이다. 일단, 1부는 십대 소녀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열다섯에서 열여섯으로 넘어가는 소녀들.



나는 몇 번이나 얘기한 적이 있지만 내 십대 시절과 이십대 시절을 내 인생에서 통째로 드러내도 나는 지금의 나일 거라고, 그 시간은 내게 없었던 시간, 죽어있던 시간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더랬다. 좋았던 기억이 분명 사이사이 있었지만 그 시절을 왜 그렇게 보냈을까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그 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에 대해서도 여러차례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바보였다고, 멍청했다고,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고 후회하는 순간들의 대부분은 그 때에 존재한다. 언젠가부터 선택과 결정을 앞에 두고서는 '시간이 흘러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될까?' 스스로 묻고 있긴 하지만, 그 때는 나에게 그런 물음을 하지 않았더랬다. 삶의 태도 자체가 다가올 미래에 지금을 저당잡히지 말고 순간에 충실하자이기는 하지만, 그 때는 정말이지 눈앞의 것만 보고 결국 후회하게 될 선택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 선택들 대부분이 내 스스로 한 것이긴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했다는 선택들 중의 많은 부분은 그러나 순전한 내 선택은 아니었다.



이런 나의 성향 탓인지, 내 성향으로 살아온 태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미성년자와 성인이 섹스하는 이야기를 진짜 극도로 싫어한다. 너무 싫어한다. 그 당시 특유의 뭔가 해보고 싶고, 어른이 되어보고 싶은, 뒤쳐진 존재가 되기 싫은 마음들을 건드려서 성을 착취하는 이야기를 너무나 싫어한다. 얼마전 읽었던 '애나 번스'의 《밀크맨》에서도 사십대의 남자가 십대의 여자에게 접근해 자꾸 자신의 애인 삼으려고 했으면서 그러나 그 사십대의 남자는 그여자보다 나이 많은 그 여자의 '어쩌면 남자친구'는 어린애 취급했다. 여기에서도 드러나듯이, 미성년자에게 접근하는 성인은, 상대가 미성년자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접근한다는 것.



그런데 수잔 최의 신뢰연습이 바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십대의 소녀가 같은 연극반 학생인 소년과 사귀고 섹스하는 것에서는 거부감이 없었다. 물론 거기에서도 많은 후회라든가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러나 한쪽이 성인인 것과는 시작과 진행과 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인 남자가 십대 소녀에게 접근하고 섹스를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소녀가 고작 열여섯살이라는 걸 내가 알고 있는 이상 이게 너무 끔직한 거다.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이야기이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대체 이런 이야기를 왜 쓴걸까, 분명 쓴 이유가 있을텐데, 하면서도 그만 읽을까를 갈등해야 했다. 그리고 힘겹게 2부를 시작했다.



2부는 그로부터 십년이상이 지나 서른이 된 그들이 나온다. 누군가는 작가가 되었고 누군가는 회사원이 되었고 누군가는 연극감독이 되어서 진행되는 이야기. 작가가 써낸 십대 시절 자신들의 이야기에는 그러나 기억이 왜곡이 당연히 많았고, 또한 드러나지 않았던 혹은 드러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당연하게도 더 많이 담겨있다. 자신이 사랑했던 소녀가 어른 남자와 섹스하는 사이라는 걸 알고 상처받았던 소년은 그때 그 일들은 그 순간 그들이 분명히 알고, 동의하는 행동이었다고 여전히 울분에 차서 말한다. 그들이 미성년자라 몰랐다고? 아니 알았어, 알고 한 일들이야! 라고. 이때 남자의 말을 듣던 여자는 그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실은 남자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 사실은 그 어린 여성들을 경멸한다. '그릇된 판단을 해놓고 이제 와서 남 탓으로 돌리는 이 젊은 여성들을' (p.346)



누구보다 이 여성이 그런 젊은 여성들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십대 시절 당시 그 늙은 남자와의 섹스를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환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그 시절 그와 섹스했고 그와 함께하기를 원했던 것은 분명히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안다.



캐런은 그를 원했다. 무지하고 경험 없던 당시에 그를 잘생기고 안목이 넓고, 성실하고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다. 지식과 경험을 갖춘 지금, 그가 못나고 편협했다는 걸 안다. 불성실하고 믿음직하지 않았고, 심지어 잔인했다. 자신이 그를 원했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그를 원했다는 것은 캐런이 선택했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런 이유로 입을 꾹 다물고 고민을 혼자 떠안았다. (p.345-346)



그 누구보다 자기가, 자가 자신이 그 늙은 남성을 원했던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원했다는 것이 자기의 뜻이라는 걸 인지하면서 동시에 그 당시에 그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 당시에 그를 원했던 것은 '지식과 경험을 갖추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성년자는 무엇인가. 우리가 미성년자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판단이 아직은 서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미성년자가 설사 '원했어도' 그들과 섹스하면 강간이라고 벌을 주는게 아닌가. 그들의 판단은 아직 정립되어있지 않으므로. 그런 미성년자임을 '알고' 접근해서 섹스를 한 것은, 과연 '섹스를 한' 것이며 '사랑을 나눈'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자기의 과거가 있기 때문에 캐런은 스스로에게 자유롭지 못하고, 그건 내가 원했잖아, 라고 하지만,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그 시절의 일들에 대해 '그건 내가 원했으니까, 내가 잘못한거지, 내 탓이지' 라며 살고 있는가. 나는 이 부분에서 캐런이 저렇게 생각하는게,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버리지 못하고 그러므로 다른 젊은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그릇된 판단을 내린 것이며, 그렇기에 상대 탓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게 안타까웠다. 그릇됫 선택을 한 사람들의 잘못인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캐런이 이렇게 생각하는게 불편하고 가슴이 아팠는데, 아아,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흐르려고 이런 대사가 나오나 했는데, 아아, 2부의 끝으로 가면 사실은 캐런도 '그가 나빴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깨닫게 된다. 얼마나 나빴느냐면, 당연히 응징을 받아야 할만큼. 캐런은 그 시절의 자신이 선택한 것이니 그의 탓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녀에게 그 일은 결코 사소한 일도 아니었고 결국 지금에 이르게 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 일을 잊을 수 없다. 잊지 못하는 일이 되었다. 그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살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혹독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와 재회하게 되었다. 만약 그녀가 그 일을 정말로 그의 탓이 아니라고,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녀가 그 일을, 그 행동을 할 생각을 했을까? 나는 2부의 이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무척. 또한,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시도하는 세상의 모든 남성들이 이런 식의 응징을 언젠가는 받기를-가급적 빨리!- 바라게 되었다.




인생이 언제 누구와 재회시킬지, 둘이 옛일을 얼마나 비슷하게 기억할지 아무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 캐런은 자기 나이가 많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너무 어렸다. 그때와 달리 이제 그 일이 마틴에게 별일 아닐 수 있음을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 재회가 - 캐런을 단순히 건드린 게 아니라 망가뜨린 이 사람에게는- 아무 감흥이 없을 지도 몰랐다. 그가 캐런을 못 알아볼 수도 있었다. 알아본대도 다르게 기억할지 모르고. 똑같이 기억해도 둘의 지난 관계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P316



인생이 언제 누구와 재회시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똑바로 살아야 한다... 똑바로 살아야 돼.....




전혀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위의 인용구절에 대해서는 정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누군가를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때는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기억하더라도 서로의 상대에 대한 기억은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서는 예전에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날 수도 있고. 상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아아 맞아, 내가 이래서 이 사람을 사랑했었지' 하게될 수도 있고 '아아 맞아 이래서 내가 이 사람과 헤어졌지' 하게될 수도 있다. 나는 사랑으로 기억하는데 상대는 전혀 다르게 기억할 수도 있고 그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서는, 마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그때 당신을 무척 좋아했다, 고 말했던 적이 있었는데 상대는 내게 '그때 왜 말하지 않았냐'고 했다. 그가 몰랐던걸까? 알았지만 그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걸까? 기억은 왜곡되고 노래 가사처럼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공교롭게도 나는 저 인용문을 보고서는 피츠제럴드의 단편,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이 생각났다. '윌라 캐더'의 《로스트 레이디》덕에 피츠제럴드 단편선 꺼내서 <겨울 꿈> 다시 읽었는데, 오오, 다시 읽어봐야지 생각한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이 마침 바로 뒤에 있어, 내친 김에 두 편 다 다시 읽었다.


















남자는 고향에 왔다가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 시간이 남아, 어린 시절 자신이 연정을 품었던 여자의 전화번호를 전화번호부에서 찾게 되고 그렇게 그녀에게 연락한다. 나 기억하니? 남자는 결혼 후 이혼을 한 상태였고 여자는 결혼을 한 상황. 여자는 당연히 기억하지 지금 어디야? 묻는다. 남자는 공항이라 답하고 여자는 시간이 된다면 잠깐 들러, 라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꼬맹이었던 시절에 만났다가 훌쩍 어른이 된 지금 재회한다. 너는 예전에도 예뻤는데 지금도 예쁘네, 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순간순간 어? 그건 기억에 없는데? 하지만, 어릴 적이었으니까, 추억은 다르게 적히는 거니까, 하며 대화를 나누다보니 아아, 그 시절의 감정이 몽글몽글 다시 찾아오고, 여자는 아아, 나는 남편이 있는데 자꾸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남자랑 키스를 하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될 것 같아져 버리는거다. 여자는 그 때의 앨범이 있지, 하면서 앨범을 가져오고, 이거봐 이때의 너, 하면서 가리키는데, 아아, 남자는 그제서야 알게 된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는 그가 아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네?????????


-얘 나 아닌데?

-얘가 너잖아.

-아닌데?


..................................................................................................



기억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다시 피어나던 지금의 사랑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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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02-15 0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국에서 그래서 미성년자는 무조건 일곱 살 이상 차이나는 관계를 범죄에 준해서 본다는 얘기(정확한 건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에 동의합니다. 경험하고 느끼는 세계의 차원이 다른데 그걸 자기 자유 의사라고 보는 건 맞지 않다고, 저도 생각해요.

단발머리 2021-02-15 10:05   좋아요 1 | URL
저도요, 저도 블랑카님 의견에 완전 동의해요.

다락방 2021-02-15 12:26   좋아요 0 | URL
제가 봤던 미국 영화에 그런거 나오거든요. 이웃집 아주머니가 이웃집에서 일어나는 성인 남자와 미성년자의 성적인 일을 알고 경찰에 신고해서 남자가 잡혀가는거에요. 그러자 그 아이가 아주머니에게 ‘그런데 저도 원했어요‘ 라고 말하거든요. 그 때 아주머니가 말해줘요.

˝네가 아무리 원했어도 너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그건 강간이야.˝

저는 아주머니의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걸 무조건 강간이라고 해야 이 범죄가 줄어들것 같아요. 그래야 미성년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번 이 아이도 원했어, 라면서 잘잘못을 아이랑 성인남자가 가리고 있을거 아녜요. 그 싸움 하는동안 아이는 뭐가 돼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 가해질 2차 가해는.. 하아-

단발머리 2021-02-1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츠 제널드 저 단편.... 어머!! 완전 신세계네요. 저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다락방님 글 읽었는데도 넘 황홀해요.
얘 나 아닌데? 이거 어떻게 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2-15 12:26   좋아요 0 | URL
재밌죠? ㅋㅋ
제가 피츠제럴드 단편을 진짜 엄청 좋아해요. 이런 얘기가 많아요! <컷 글라스 보울>은 읽다가 소름 돋는다니깐요! 너무 좋아합니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을. 흑흑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