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라 캐더의 ⌈로스트 레이디⌋는 얇은 책이라 단숨에 읽었다. 단숨에 읽고 책장을 덮고서는 그러나 오래 아련했다. 따지고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지점이 소설가가 가진 놀라운 힘이 아닐까 싶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사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해도 그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만큼 움직일지는 작가가 써내는 오롯이 그만의 능력일 것이다. 대부분 이야기보다는 문장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뭐가 이렇게 건드리는걸까. 이야기? 문장? 확실한 건, '이 이야기'를 '윌라 캐더'가 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설레임과 욕망과 환상과 빛, 반짝임.


이성이든 동성이든 누구나 어떤 상대에 대해서 반짝반짝 빛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은 달라', '저 사람에게선 빛이 나' 하는 느낌. 누구나 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아닌데도 나에게만 유독 반짝거리고 환한 사람.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 그냥 보통의 사람이었구나, 빛이 사라졌구나, 하고 느낄 때도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빛이 난다고 느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그 빛이 사라짐을 느끼면서 그러나 이것이 그 사람이 한 일일까 스스로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아니, 그건 내가 한 일이었다. 그사람의 말이나 행동 외모, 뭐가 됐든 거기에 빛을 부여한 건 내가 한 일일것이다. 내가 가진 환상, 내가 가진 기대 같은 것들. 어느 순간 그것이 사라지고 내가 씁쓸해한다한들, 상대가 내게 빛을 느끼라 요구한 적도, 실망하라 요구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철도 사업 덕에 부유한 '포레스터 대령'은 스물다섯살 연하의 아내 '포레스터 부인'과 함께 여름철이면 타운의 집을 찾아 몇개월간 머무른다. 집 앞의 습지나 숲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포레스터 부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동네 소년들은 그 숲으로 소풍을 가면서 포레스터 부인을 마주치는 걸 좋아했다. 포레스터 부인은 젋고 상냥했고 밝고 환했으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포레스터 보인을 좋아했다. 마을의 사람들도 그리고 포레스터 대령의 친구들도. 


마을의 소년 '닐'은 변호사인 삼촌 덕에 포레스터 부인과 친하게 지내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한다. 다른 여성들에게서는 특별함을 찾지 못할 정도로 포레스터 부인을 특별하다 생각하는 닐은 그러나 포레스터 부인이 자기가 생각하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빛은 사그라들고 환상은 깨진다. 포레스터 대령이 병이 들고 몸을 가눌 수 없게 되고 가진 돈도 잃게 되었을 때,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돌봄노동과 가사노동을 온전히 포레스터 부인이 하게 되었을 때, 포레스터 부인은 점차로 힘을 잃는다. 나는 결코 여기에서 이렇게 사는 걸로 만족하지 않겠어, 저기 다른 곳으로 환한 곳으로 갈테야, 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당장 헤쳐나가야 하는 눈앞의 삶은 그녀를 자꾸 이곳으로 주저앉힌다. 



이 책의 뒤에는 핏츠 제럴드가 윌라 캐더의 이 소설을 읽고 혹시 자기가 쓴 소설이 표절로 느껴지진 않을까 염려하여 윌라 캐더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윌라 캐더는 그렇지 않다고 답장을 보내준 것도 함께 실려있는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피츠제럴드를 떠올렸지만, 그러나 내가 떠올린 소설은 피츠제럴드가 걱정한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었다. 나는 피츠제럴드의 단편 <겨울꿈>을 떠올렸다. 꿈이 사라졌다고 말하던 청년이 기억난 까닭이다. 


















단편 겨울꿈에서 소년 '덱스터'는  골프장 캐디로 일하다가 부잣집 소녀 '주디'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소녀를 알고난 직후 충동적으로 캐디를 그만두고 청년이 되어 그녀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어릴적에 짐작했던대로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매력을 가진 여성이 되어있었고, 덱스터는 주디와 함께 식사를 하고 키스를 하고 자연스레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디는 그렇게 지내는 남자가 열명이 넘었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가 지쳐서 자신을 포기하려고 하면 다시 다정하게 대해주면서 그녀의 곁에 머물도록 했다. 그녀의 매력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남자들은 다시 다정히 대해주는 순간 일년을 버틸 힘을 다진다. 그렇게 번번이 그녀를 기다리다 잠깐 행복하고 다시 상처받고 기다리다가 결국 덱스터는 '아이린' 이란 여성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약속한다. 아이린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고 단단했고 안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주디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 '달링' 이라고 부르면서 '나랑 예전처럼 지내자' 하고나자 아이린에게 이별을 고해버려... 오, 남자여......


그러나 주디는 그렇게 한달여쯤만을 덱스터의 옆에 있었을 뿐, '내가 아이린의 남자를 뺏을 순 없지' 이러면서 세이 굿바이 하는 것입니다. 아이린은 뭐가 된것이란 말인가... 


그 후 7년여의 시간이 흘러 덱스터는 우연히 주디의 소식을 듣게 된다. 결혼을 했고 그녀를 막대하는 남편과 살고 있다고.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주디의 미모를 '괜찮은' 정도라고 얘기한다. 덱스터는 그가 전해주는 얘기를 듣고는 '꿈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윌라 캐더의 소설을 읽고 피츠제럴드의 겨울꿈 생각나서 다시 읽었는데, 어휴, 읽다가 나 갑자기 아이린 되어가지고 너무 슬펐다. 부대찌개를 데워야겠어 ㅠㅠ 나랑 있을 때 좋아했고 단단했고 안정적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치명적 매력의 여자를 마주치고는 나에게 세이 굿바이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나. 나는 치명적 매력없는, 우선 순위가 아닌, 안정적으로 선택하는 그런 보험같은 여자인가. 나는 아이린이 되어서 너무 슬퍼가지고 ㅠㅠ 이거 왜 다시 읽었지 ㅠㅠ 막 이렇게 되었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자기가 환상을 덧씌우는 치명적 매력의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걸까? 누구나 그런 사람이 있는걸까? 치명적 매력이 후려치면 열번 슬프고 한 번 기뻐도, 그 한 번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타인을 향한 꿈을 꾼다면 그 꿈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시 윌라 캐더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유독 슬펐다.

포레스터 부인이 힘을 잃고 빛을 잃고 사그라드는 모습이 슬펐는데, 그동안 유지되었던 그 힘이 그렇다면 남편 때문이었던 것이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닐 보다 조금 더 나이 많은 불량한 청년 '아이비'가 있었다. 아이비는 십대였던 시절에도 동물을 학대했고(딱따구리 학대 장면에서 책장을 덮어야했다, 너무 괴로운 장면이었어 ㅠㅠ), 그 숲이 포레스터 부인의 것이라는 것도 마음에 안들었고, 포레스터 부인에게 대적할만한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에서도 분노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불량하게 살아가면서 힘을 키운다. 어떤힘? 비열한 힘을. 그래서 남편이 앓아 눕고 돈도 없던 포레스터 부인에게 다가간다. 포레스터 부인은 그에게 자신의 땅을 임대해주고 거기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먹고살 수 있다. 남편이 몸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되고 그녀가 남편과 집을 돌보면서 점점 더 정신적으로 무너지자 이 비열한 청년 아이비는 포레스터 부인의 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고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저녁을 먹이기도 한다. 아이비가 친구들을 불러모으고 그곳에 포레스터 부인 한 명만 여자였을 때 내가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는지. 닐은 그런 그녀에게 아이비와 어울리지 말라고 말해보지만, 그러나 포레스터 부인은 아이비로부터 지금 당장은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닐은  어느날, 아이비가 포레스터 부인을 뒤에서 끌어 안는 모습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이 때가 너무 속상했다. 남편이 쓰러진 것보다 이게 더 힘들었다. 그러니까 바로 저 순간이 내포하는 바로 그 의미가 너무 힘들었다. 남편이 옆에 있었을 때는 차마 어떻게 하지 못했던 여자를, 그러나 남편이 없으니까 뒤에서 자기 멋대로 만지고드는 그 남자에 대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이 너무 힘들었다. 나는 그게 너무 비열하고 너무 싫다. 남자가 있는 여자는 만지지 못하지만 남자가 이제 없는 여자는 만질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나는 그게 진짜 너무 싫다. 너무 비열하고 너무 찌질하다. 남자가 없는 여자는 존중해야 할 한 인간임을 인지하지 않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지점이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자신을 지킬 사람은 자신 하나뿐인데, 심지어 자기의 경제적인 부분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게다가 타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녀가 거기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픈 거다. 너무 아프다.



가부장제 왓더헬... 교육과 일자리의 성차별 왓더퍽........



그나저나 윌라 캐더의 책이 이렇게 세 권 있는데 다 출판사도 다르고 디자인도 다르고...나는 책장에 이 책들을 어떻게 꽂으면 되는건가염??




















"글쎄, 내 철학은 이겁니다. 사람이 날마다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있으면 결국에는-말하자면, 자기도 모르게-이루게 될 거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는 말이에요. 물론, 당신이 세상에서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모르기에는, 난 탄광과 공사장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무척이나 우울한 이야기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듯이, 그 무거운 진실을 묵묵히 인지하는 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듯이. "닐, 콘스턴스. 너희가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면 말이다, 네 마음이 가장 절실히 바라는 일을 결국 이룰 거야." - P66

"왜냐하면 내가 말한 방식으로 간절히 꿈꾸는 일은 이미 성취한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서부는 전부 그런 꿈에서 싹터서 자랐어요. 이주 농민들과 광부들과 건설업자들의 꿈입니다. 내가 스위트워터에 집을 짓겠다는 꿈을 꾼 것처럼 우리는 산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깔겠다는 꿈을 꿨습니다. 다음 세대들에게는 그것이 그저 일상이겠죠."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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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2-14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량 청년 아이비의 행태를 읽으면서 저는 최근에 읽은 <진주>의 이 문단이 떠올랐어요.

... 부엌에서 쥐가 나왔을 때, 온갖 동네 남자들이 어머니를 남편 없는 여자라 여겨 술에 취해 우리 가게를 찾아올 때, 그 남자들의 여인들이 어머니를 남편 없는 여자라 수군거리면서도 질투에 가득차 손님인 척 찾아올 때도, 어머니는 잠이 왔습니다.
꿈과 잠은 그녀가 쉴 수 있는 유일한 거처였기 때문입니다. 꿈에서조차 아름다운 어머니는 자꾸만 잠이 왔습니다. (40쪽)

여자의 주인은 여자인것을.... 넘 슬프네요 ㅠㅠ

다락방 2021-02-15 08:52   좋아요 0 | URL
남편이 없으면 온전한 인간으로 여겨기지 않았다는 게 너무 화가 나고 슬퍼요. 너무나 당연하게 ‘남편 없으니까 이제 내가 .. ‘라는 그 생각이 진짜 지긋지긋하고 끔찍해요. 싫다고 밝히는 나의 뜻은 존중되지 않고 내 옆에 누군가가 있냐 없냐로 판가름하다니.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정말 끔찍한 장면이었어요. 싫어요 ㅠㅠ

2021-02-15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2-15 08:52   좋아요 1 | URL
저도 좀전에 페이퍼 하나 쓰고 루틴회복 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