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없는 완전한 삶
엘런 L. 워커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작년 여름이었나, 출근 길에 임신한 여자를 마주쳤다. 나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갑자기, 아, 나는 이제 임신을 원한다고 해도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비혼'이었던 것, 그리고 임신과 출산, 육아에 맞닥뜨리지 않은 것 모두가 나의 선택이었고, 그래서 나는 지금의 모습으로 살 수 있었지만, 이제와 내가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다고 해도 그 가능성은 십년 전, 이십년 전에 비해 훨씬 낮아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몸의 많은 기능들이 노화를 가리키고 있고, 아마도 십 년내에 완경에 이르지 않을까. 나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매순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시간을 돌린다 해도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설사 원한다 해도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이 책, [아이 없는 완전한 삶]에서는 이미 알고 있던 얘기들이 수차례 나오는데, 그렇다 해도 분명 의미있는 얘기들이었다. 어떤 이야기들은 알고 있다 해도 간혹 새롭게 인지할 필요가 있으니까. 이를테면 아이를 원하고 그래서 출산을 한다는 것, 그것은 부부 사이에 한 쪽만 원한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아이를 낳는 것은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와 재정적인 것들이 오로지 나를 위해 쓰는 것과 멀어졌음을 뜻한다. 단순히 '낳을까'로 얘기해서 결정해서도 안되는 일이며, 나와 배우자 둘 사이에 한 쪽만 원해서 낳는다는 것 역시 불안함과 불행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출산과 육아는 매우 힘들고 둘이 함께 힘을 쏟아야 그 삶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인데, 그러므로 반드시 나와 배우자 둘 모두 아이를 원하는 상황에서 아이 낳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둘 다 원한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해도 분명 충분한 대화 끝에 결정해야 할 일이다.


아이가 없는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들 중에는 분명 자신이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너무나 원했음에도 아이를 갖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해 낙태를 햇지만 돌이켜보니 그 순간이 너무나 후회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혹여라도 비혼인 상태에서 임신을 하게 된다면 백프로 낙태를 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출산과 육아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면서 나는 그 길로 뛰어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순간에는, 수단으로써 아이를 갖게 됐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이미 헤어진 연인과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와 연결된 끈이 우리 사이에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던 거다. 그러나 이건 이별의 아픔으로 인해 '생각' 했던 거지, 혹여라도 이별 후에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와 연결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출산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내가 감당하기에 큰 일이기도 하거니와, 아이에게 단순히 수단으로써 생명을 부여할 순 없는 일이니까.



나는 여태까지 선택적으로 비혼의 상태가 되었지만, 앞으로는 이 비혼 역시 선택보다는 어쩔 수 없이 이르게 될 확률이 크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다. 나는 이성애자이고 그러므로 연애나 결혼을 할 때는 남자와 하게 될텐데, 대부분의 내 나이 또래 성인 남자가 자신의 아이를 낳고 싶어하고,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을 터, 만약 나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나는 이미 그전에 나의 임신 가능성이 낮음을 그에게 알려줘야 할테고, 그러나 상대가 아이를 너무나 원한다면, 세이 굿바이,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상대방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은데, 상대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를 포기할 순 없을테니까. 



나는 내가 비혼이어서, 출산을 선택하지 않아서, 한마디로 '아이 없는' 삶을 선택했으므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주일의 5일은 출근하여 일하는 삶을 살지만, 그 시간을 제외한 아주 많은 시간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별 제약없이 살고 있다. 내가 버는 돈을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 내 시간 역시 오로지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게 가능하고. 나는 내가 먹고 싶을 때 언제는 술을 마실 수 있고, 내가 가고 싶을 때 들로 산으로 놀러갈 수 있다. 집에서 쉬다가도 후다닥 영화를 보러 나갈 수 있고, 내가 자고 싶을 때 자는 것 역시 가능하다. 나는 내가 이런 삶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고 싶다.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없다고 이 책은 말한다. 이런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해주는데 이런 당연한 얘기를 읽으면서도 그동안의 나의 선택과 또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선택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으니, 이 책은 그 자체로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렇지만 뒤로 가면 좀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주장들이 몇 차례 나오는데,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선택인만큼 그 사람들에게 세금을 감면해주는 것,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에게 아이들 복지를 위한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을 저자는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지구에 인구가 많은 게 문제인데, 인구를 더 늘리지 않는 자기들이 오히려 세금감면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던데, 이 점에 있어서는 좀 당황스러웠다. '아이들' 인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한 복지인데, 그것이 아이를 낳은 사람에게만 부담지워서 될 일인가? 나는 내 세금이 아이들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 한편 저자는 자신이 가진 돈으로 누군가를 후원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먼 친척의 학비에 보탬을 주고 동네 식당의 종업원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뭘 어떻게 주는 지 아는 것과, 세금으로 내서 아이들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 저자에겐 좀 다른 것이었는가 보다. 



나는 비혼인 상태에서 아이들을 위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여러차례 보아왔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세상이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비혼이고, 아이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은 생각을 한다. 내가 아이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딱 이만큼인 것 같다. 출산과 육아까지는 역시 내가 감당할 몫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데, 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앞으로 내가 누구를 만나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지금은 또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



동시에 두가지를 선택할 수 없으니 아마도 완전한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선택한 길이 완전한 삶이라고 믿고 가야할 것이다. 




옳은 길도 틀린 길도 없다. 그저 여러 갈래의 다른 길이 있을 뿐이다. 아이가 없다면 택할 수도 있는 몇 가지 길을 부모가 됐다면 포기해야 한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주변 상황 때문에 혹은 생물학적인 조건으로 부모가 될 수 없었다면, 인생의 다른 목적을 찾아 즐겁게 살면 된다. 우리의 사명은 각자 내린 결정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풍요롭고 알차게 살아가는 것이다. (p.270-271)





"제퍼스 박사의 책(난 멀쩡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아)을 읽고 나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부모 노릇에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게 정상이고, 부모 노릇을 하다 보면 수많은 희생과 불쾌한 순간들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제일 안타까운 건, 다들 제게 엄마가 되는 것은 굉장한 성취감을 얻는 일이라고만 했지, 한번 부모가 되면 무를 수 없다는 사실 같은 부정적인 얘기는 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p.73)

내가 지금처럼 엄마가 아닌 삶을 살게 된 것은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서 결정하진 않았기에 나이 마흔을 넘기도록 이 문제를 제대로 매듭지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믿을 만하고 편리한 피임 방법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된 듯도 하다. 피임약 덕분에 임신할 준비가 되는 날까지 아이에 대한 고민을 최대한 미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고, 어느새 다른 길을 선택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사십 대 중반에야 내 아이를 가질 기회의 문이 거의 닫혀가고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p.74-75)

자녀 양육이 지금껏 해온 가장 보람된 일이라는 의견을 고집하는 부모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으면 중요한 경험의 기회를 놓친다는 편견이 이 사회에 단단히 자리잡았다. 부모들은 아이 없는 친구들에게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견해를 서슴없이 피력한다. 나는 늘 들어온 얘끼라서 그런 말을 들어도 내 인생이 무의미하다거나 핵심 가치를 놓쳤다는 기분이 들지 않지만, 가끔 감상에 젖을 때면 잠시 내 선택이 후회되기도 한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을 남들에게 무심히 내뱉는 부모들은 그런 견해가 아직 자녀를 가질지 말지 결정하지 못한 젊은이드레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잘 모르는 듯하다. 자녀를 둘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안 낳으면 인생에서 중대한 무언가를 놓치게 된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만약 아이를 기르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는 누가, 언제, 말해줄 것인가? (p.95-96)

"마흔두 살 때 내 안에서 째깍거리는 생체 시계를 인식하게 되면서 잠시 두려웠던 적이 있어요. 마흔다섯 살에 이 느낌이 다시 오더라고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음을 알게 된 탓인지 슬펐어요. 하지만 이내 내 삶의 방식을 확신했고 행복했어요. 아이를 바라지 않았고 아이가 필요한 적도 없었고요. 아이를 정말 원했다면 입양을 했을 겁니다. 슬픔을 느꼈던 이유는 그저 내가 늙어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거예요." (p.85-86)

어쩌다 실수로 부모가 되었거나, 둘 중 한 명은 아이를 원치 않았는데 부모가 되었거나, 부모가 되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부모가 된 경우 결혼 생활이 만족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가족계획을 이미 했거나 둘 다 부모가 되고 싶어 할 경우에는 아이를 출산한 후에도 결혼 생활의 만족도가 그대로 유지되거나 오히려 높아졌다. 이는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자녀 출산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임을 의미한다.
이는 아이가 없는 부부들도 마찬가지다. 둘 다 자녀를 원치 않는다면 높은 수준의 행복감을 유지하며 살 수 있지만, 한 사람은 아이를 원하고 한 사람은 원치 않는다면 결혼 생활을 원만하게 해나가기 어렵다. (p.182-183)

"내가 아이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남자를 사귈 때 큰 영향을 주더라고요. 내가 아이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결혼할 때쯤엔 마음을 바꾸리라 기대했던 남자들도 있었어요. 결국 내 마음이 요지부동임을 알고는 나를 찼죠." (p.186)

아이를 양육하는 데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이는 당사자가 임신 전에 미리 고려했어야 할 사항이다. 자신이 선택한 생활 방식에 대한 재정 책임은 자신이 져야 마땅하다.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든, 반려 동물을 집에 들이든, 집을 사든, 아기를 낳든 마찬가지다. 부모가 됐다고 해서 자녀의 어린이집 비용까지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부담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 (p,238-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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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7-04-08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선택한 길이 완전한 삶이라고 믿고 가야한다는 말에 끄덕입니다. 다르다가 틀리다가 아닌, 내 선택에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뿐입니다.^^

다락방 2017-04-10 10:2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제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현재를 즐기고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런 한편, 다른 사람의 선택에 있어서 제가 어떻게든 평가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합니다. 누가 저를 자기 기준대로 평가하는 거 저도 싫으니까요. 보슬비님, 우리 선택을 믿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2017-04-09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10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을 향해서 2017-05-14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보육학을 전공하다가 (원래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고 피아노 만들기 이런거에 재능이 있었기에 선택했죠) 실습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학을 떼고는 그 후로 결혼을 하고는 남편도 그렇고 저도 아이들 원하지 않아서 안 갖고 둘이 살아도 괜찮아 라고 생각했었죠. 근데 그래도 남들 해보는건 해보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더 나이 먹기 전에 갖자 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는 나이가 들면 갖고 싶어도 못 갖을테니까 와 함께 사회적인 통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던 것도 작용을 했어요. 만약 우리 부부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했다면 안 갖았을지도 모르겠으니까요. 암튼 불행인지 감사한 일인지 모르지만 결혼하고 5년 후 남편과 상의 후 임신을 계획했는데 아이가 생겼어요. 잘 낳아서 키우고 있는데,
굳이 안 낳아도 되겠다 란 생각이 든다는거죠
아이를 키운다는건 돈은 둘째치고라도 (전 아이를 풍족하게 잘 키워야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정말 힘든 일이예요 못할 짓이죠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컨트롤 해야하고 읽고 싶은 책 하루종일 보고싶은데 못하고 ㅜㅜ 번거롭고 귀찮게 할 때가 참 많죠
결혼이야 이게 아니다 싶음 이혼 하면 되는데 아이 낳은건 이건 좀 아니지 싶은데 다시 뱃 속으로 집어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거든요 그리고 아예 안 낳았음 모를까 첫째 외로울까봐 둘째도 생각하게 되고
주변에서도 둘째 낳아야지, 키울 때 같이 키워야지 터울지면 더 힘들다느니 어쩌구 저쩌구
전 제게 다시 한번의 인생이 온다면 결혼도 안하고 아기도 안 낳고 연애만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남들이 뭐뭐 해야지 말하는건...... 뭐 참고할 수는 있겠지만 제 삶에 꼭 정답이 될 수는 없다는거
사람은 다 다르잖아요 그 사람에겐 자식 낳고 키우는 일이 행복이고 기쁨일 수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도 있는 거그든요
저도 물론 제 자식이니까 뭔가 뿌듯하고 예쁠 때도 있고 기특하고 귀여울 때도 있죠 여태껏 살아오면서 느껴보지 못한 행복도 느끼고
그렇지만 그건 일부분일 뿐이예요 힘들고 짜증나고 화나고 울고싶을 때가 더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살면서 꼭 이래야 된다 는건 없는 것 같아요
더 나이 들기 전에 결혼하애된다 아이를 낳아야한다 많을수록 좋다 하나는 외롭다 최소한 둘은 낳아야지
요런 말들이요

나이가 먹어가면서 행복의 기준은 철저히 자기만족인 것 같아요 보여지는, 절대적인 행복이 아니라. 물론 우린 더불어 살아가니까 그런것도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순 없겠지만요
그 속에서 흔들리고 휘둘리지 않을 만큼 내 자신을 잘 알고 사랑해야겠어요 우리 모두는!

마음껏 행복하세요!!!
전 이미 낳았으니 어떻해서든 제 선택에 책임지고 살아야겠죠...... 휴......

다락방 2017-05-15 08:51   좋아요 0 | URL
꿈을 향해서 님.
긴 댓글 감사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선택을 해야하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겠죠.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으니, 저는 제 선택으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이제는 아이를 낳고 싶다고 결정해도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가끔은 걱정스럽습니다. 혹여라도 내일, 내년, 3년 뒤에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어떡하지? 하고 말예요. 그때는 낳고 싶다고 원하고 선택해도 이룰 수 있지가 않으니까요. 그래서 매 순간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신중한다해도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은 남기 마련인 것 같아요.

여동생의 출산과 육아를 보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를 절감했어요. 저는 단지 가끔 만나는데도 그랬어요. 이걸 매일한다면 정말 사는 게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물론, 아이와 함께 보내면서 얻는 행복 역시 저는 포기하는 게 되겠지요. 말씀하신대로 절대적인 행복은 없으니,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것의 결과 안에서 행복을 최대한 누리고 느끼며 살아야 할 것 같아요.

꿈을 향해서님은 다시 태어나면 자유를 선택하겠다 하시지만, 만약 지금 또 그대로 아이를 낳지 않는 삶을 선택했다면, 아이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살게 되지 않았을까요? 제가 그렇듯이 말예요. 어쩌면 나도 더 젊었을 때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서 지금쯤 아이 다 키워놓고 여유를 즐겨야 했던 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걸요.

꿈을 향해서님, 꿈을 향해서님은 님의 선택에 있어서 그리고 저는 저의 선택에 있어서, 그 안에서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도록 합시다.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는것처럼, 잃는 게 있다면 얻는 것도 있을테니까요.

솔직한 댓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꿈을 향해서 님.

꿈을 향해서 2017-05-1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다락방님 말대로 내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미련이 없는 인생은 없을테니까요 맞아요 맞아! 화이팅해보아요! 저도 댓글 감사요!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 웃음을 잃지 않고 세상과 싸우는 법
린디 웨스트 지음, 정혜윤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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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 개그프로에서 아동성추행에 대해 다룬 걸 보았다. 장동민이 어린 아이로 분한 코너였는데 할머니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걸 허락하는 내용이었다. 그 영상을 본 나는 정말 놀라고 끔찍했다. 대체 저게 어떻게 코미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걸까? 웃기 위해 그 자리의 방청석에 와있는 많은 사람들 속에, 그리고 웃기 위해 그 프로를 보겠다고 앉아있는 많은 시청자들 중에 아동 성추행 피해자가 무수히 많을텐데, 저걸 어떻게 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까? 아동 성추행의 피해자인 나는 그 프로를 보면서 정말로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왔다. 어떻게 저게 웃기지? 저게 웃겨? 저게...웃겨? 난 아픈데? 무서운데? 미쳐버릴 것만 같은데?


개그 프로는 어른들도 보지만 아이들도 본다. 그 아이들 중에도 그 경험을 실제 '당하고'있는 아이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매체에서 '어쩔 수 없다'고 그걸 허락하는 장면을 내보내는 동안,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할머니(할아버지)의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다면 이렇게 해도 되는거야' 를 조장하는 거 아닌가. 진짜 숨막히게 위험한 프로가 아닌가. 어떻게 저걸 개그라고 할 수가 있지? 어떻게 누군가의 아픔과 두려움을 개그 소재로 쓸 수가 있지?



이 책의 저자 '린디 웨스트'는 코미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코미디의 한 복판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웃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재미있는 걸 좋아했고, 그 재미있는 것들을 해내는 사람들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그 길로 근접하게 갔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서 튕겨져 나온다. 너무나 많은 남성 코미디언들이 너무나 당당하게 '강간'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토론하는 티비 프로그램에 나가서 코미디의 소재로 강간이 쓰여서는 안된다, 너네가 그렇게 강간으로 코미디를 하는 동안 그 안에 누군가는 강간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간 코미디를 옹호하는 그 남자 코미디언은 사람들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할 줄 안다고 말한다. 야, 강간 장면 나오는 영화도 있잖아, 그런데 코미디는 왜 안돼? 라면서. 어떻게 이 남자는 이런 걸 비교대상으로 갖다 놓은걸까?



남자 코미디언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잘못인 줄을 모른다- 그 프로그램이 끝나는데, 그 강간문화(코미디)가 얼마나 잘못됐는지는 그 후에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 린디 웨스트에게 매일매일 끊임없이 아주 여러 개의 트윗 멘션과 이메일이 날아오는 거다. 그것들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강간도 당하지 못할 뚱뚱한 여자 주제에. 너도 강간 당하고 싶지?




린디 웨스트가 받는 그 수백개의 멘션은 그대로 강간 문화의 여실한 증명이 된다. '사람들은 그게 농담인 줄 알고 있으므로 코미디의 소재가 되어도 된다'는 남자 코미디언의 말이 왜 틀렸는지를 보여주는 바로 그 증거가 된다. 린디 웨스트는 그 멘션들을 죄다 묶어서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이에 린디 웨스트를 지지하며 강간 코미디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속속 드러난다. 이 생생한 증거 앞에 남자 코미디언은 한 방송에 나가서 '강간문화가 존재하긴 한다(자신들이 그러고 있다)'고 인정하기는 한다. 그 후에 코미디에서 강간을 다루는 것은 좀 더 조심스러워지긴 했지만, 그러나 말끔하게 없어지진 않았다.



나는 성추행과 성폭행이, 강간이 왜 코미디의 소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걸 소재로 삼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된다. 왜 웃기기 위해서 그래야할까? 왜 웃기기 위해서 강간을 소재로 삼아야 할까? 왜 웃기기 위해서 약자를 소재로 삼을까? 그 웃음엔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코미디에서 강간을 소재로 사람들을 웃기려고 시도하는 것, 그리고 그 개그에 따라 웃는 것은 암묵적으로 강간 농담을 허용한다. 강간 농담을 허용한다는 것은, 실제 강간을 당한 피해자를 더 숨게 만든다. 더 숨게 만들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강간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범죄는 더욱 강해지고 피해자는 더욱 약해진다. 이런 시스템을 아주 충실히 만들어가면서 '야, 웃자고 한건데 왜그래?' 라니, 인간이 할 짓인가.




린디 웨스트는 자기가 뚱뚱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녀는 뚱뚱하다. 키가 175센치였나, 몸무게는 120킬로그램이라고 책에 밝히고 있다. 그녀는 세상이 자신을 혐오스런 눈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어릴 적부터 눈에 띄는 존재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날씬하게 보이고 싶어 애를 썼던 과거도 물론 갖고 있다. 그러나 날씬해 보이기 위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정말 날씬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고 또한 뚱뚱한 것이 잘못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된다. 잘못된 건, 뚱뚱한 사람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시선과 편견과 혐오였다. '너의 건강을 염려해서 그래' 라고 하지만, 린디 웨스트는, 정말 그들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한다면 그렇게 자신의 정신에 스트레스를 주는 몸에 대한 참견을 멈춰야 하는 거라고 말한다. '뚱뚱한' '여자'로 살아오면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싸우기 시작한다. 뚱뚱한 그녀가 어릴 적부터 '저렇게 되고 싶다'고 했던 마땅한 롤모델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자신이 다음 세대의 롤모델이 되기로 한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과 몸을 당당하게 공개하고, 결혼식을 앞두고도 '그래도 결혼식이니까 막강 다이어트 해야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난다. 그녀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그 사진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봐,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아름다워!



그녀가 당당한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사랑에 있어서 그녀도 실패를 했었다. 너무 사랑해서 그의 옆에 껌처럼 달라 붙고 싶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장한다.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이 사랑을 더 견고히 만든다는 사실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고, 페미니스트가 결점이 없는 인간인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는 이렇게 자신이 어딘가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다. 잘못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에게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린디 웨스트가 선택한 페미니스트로 사는 방법이고, 그리고 자신의 그런 말과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녀가 뒤에 숨거나 하는 대신에 당당하게 앞에 나서서 '너 틀렸어', '그거 잘못됐어'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서 고맙다. 그녀는 그녀의 바람대로 많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문체가 너무 산만해서 초반에 읽기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자꾸 웃기려고 하기 때문에 산만해진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별 하나를 뺀다. 본문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자꾸 괄호를 열고 닫으며 설명하는 게 많아서(물론 옮긴이의 주석도 있다) 그 점이 나의 취향에서 약간 벗어났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뒤에 그녀가 공개한 결혼식 사이트에 들어가봤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던대로, 그녀의 결혼식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실용적인 결혼 A Practical Wedding>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나는 내 몸이라는 사실을. 내 몸이 작아진다 해도 그것은 나고, 커진다 해도 그것 역시 나다. 내 안에서 날씬한 여자가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나는 한 덩어리다. 마찬가지로, 나는 살덩어리로 된 인큐베이터 안을 돌아다니는 자궁도 아니다. 여성의 몸을 여성의 생식기관과 분리하려는 역겨운 선전-임신중절과 피임은 보건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거짓말하는 것을 포함해서-과, 여자들에게 여성 자신과 몸의 크기는 서로 분리되어 있고 동시에 서로 적대적이기까지 한 제각각의 독립체라고 설득하려는 역겨운 선전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두 가지 모두 "너의 몸은 네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두 "너의 자율권은 조건부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비만이 페미니즘의 의제인 이유다. (p.35-36)

대학 시절, 나는 아침마다 하워드 스턴Howard Stern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했다. 나는 하워드 스턴을 정말 좋아했었고 아직까지도 그렇다. 페미니즘에 대한 내 확신이 공고해짐과 동시에 그에 대한 지지를 쓰라린 마음으로 어느 정도 철회해야 했지만 말이다(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개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p.42)

사실 나는 누군가가 인공임신중절을 결정하는 이유 따위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다. 자기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자기의 피를 공급받으며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고 자기의 미래를 재설정하는 무언가의 향방에 대한 결정권은 어떤 경우에도 자궁의 주인에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타당한‘ 낙태나 ‘타당하지 않는‘ 낙태 따윈 없다. 임신한 사람 가운데 출산을 원하는 사람과 원치 않는 사람, 그리고 선택에 접근할 기회 및 지지를 얻는 사람과 장애물에 부딪히고 거짓을 주입받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p.101)

여자인 나의 몸은 끝도 없이 검열과 통제의 대상이 되며, 시도 때도 없이 마치 진열대에 놓인 물건처럼 취급받는다. 뚱뚱한 내 몸은 풍자당하고 공공연하게 매도당하며 도덕적, 지적 실패로까지 여겨진다. 내 몸은 내 직업적 가능성과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제약하고, 공정한 시험을 받을 기회는 물론 할리우드 영화와 인터넷 악성댓글이 하나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조처, 즉 나의 사랑받을 능력을 축소시킨다. (p.106)

나는 세상의 이런 시각을 ‘전도된 신체 이형증‘이라고 명명했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뭐가 그리 역겨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이 똑똑하고 재미있고 타고난 재능이 많으며 사교적이고 친절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걸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점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홈런이었다. (p.106-107)

끝내 체중은 줄어들지 않았고-상당한 정도로는 말이다- 간간히 일궈낸 작은 ‘성공들‘은 ‘일반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식생활 습관 덕분이 아니었다. 내 몸을 ‘고치는‘데 필수적인 제한 수준이라며 전문가들이 말해주는 방법들은 사실상 인간의 즐겁고 충만한 삶과 관련된 거라면 몽땅 제거해버리는 것들이었다. (p.115)

그들은 뚱뚱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게 어째서 올바르고 좋은 일인지에 대해 수많은 자극적 이유들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컨대 우리가 혐오스럽고 성적 매력이라고는 없는 몸의 소유자임은 물론(고전적인 이유다!) 의료보험료가 줄줄 새나가는 구멍이라고, 비행기 팔걸이를 독차지한다고, ‘아이들‘한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절제하는 삶을 식탐과 맞바꾸는(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마른 사람들은 모든 측면에서 절제하는 단정한 삶을 사는 데 반해서) 어쩔 수 없는 무능력자이자 괴물같은 고집쟁이라고 몰아붙이는 거다. 아, 우리의 ‘건강‘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걱정이 되기 때문이란다. 그들이 우리를 막 대하는 건 우리를 위해서라는 거다(어떤 집단을 도울 때 실제로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게 뭔지 아는가? 바로 그들을 척결하자는 주장을 펴는 쪽과 같은 말을 하는 거다). (p.134-135)

새로운 연구결과에 따르면,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몸 크기가 아니라 활동량이 적은 생활습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뚱뚱한 사람들은 다양한 외적, 내적 힘들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삶을 살고 있고, 그들이 뚱뚱하지 않은 사람들한테 빚진 거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다. 케이트 하딩Kate Harding과 매리언 커비Marianne Kirby가 『비만인 사람들에게서 얻는 교훈Lessons from the Fat-O-Sphere』이라는 책에서 쓴 것처럼, 건강은 무슨 도덕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p.136)

당신은 제 건강을 염려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제 건강을 걱정한다면 거기엔 제 정신건강도 포함되어 있을 텐데, 앞서 언급한 말들 때문에 제 정신은 지난 28년간 천천히 손상돼왔으니까요. 또한 당신은 제 건강에 대해 아는 바도 전혀 없습니다. 어쩌다 제 상사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제 의사는 아니니까요. 당신은 제가 뭘 먹고 운동은 얼마나 하는지, 혈압은 어느 정도며 당뇨병에 걸릴지 아닐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건 전혀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p.152-153)

낙인찍기는 이렇게 작동한다. 코미디언들은 헤르페스가 있는 사람들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다. 청중들은 웃는다. 헤르페스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상상하던 최악의 공포가 사실임을-자신은 혐오스럽고 망가졌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확인한다. 헤르페스가 없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가장 나쁜 본능-자신은 깨끗하고 행실이 올바르고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정당화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헤르페스에 걸린 사람과 자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엔 누구나 동의한다. 만약 헤르페스가 있는 사람이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려면-자기가 헤르페스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개해야 함과 동시에-과민반응을 일으켜서 재미를 망쳐버렸다고 비난받아야 한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그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같이 따라 웃는다. 농담은 먹힌다. 너무 잘 먹혀서 아마 그 코미디언은 그런 농담을 하나 더 쓸 거고 말이다. (p.235)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나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우리가 다 같이 이따위 농담에 따라 웃고만 있는 거지?
나는 아함의 귀 가까이로 다가가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 너머로 말했다. "있잖아요, 저도 헤르페스에 걸렸을지 몰라요." (p.236)

"아마 이 청중들 중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헤르페스에 거려 있을 거예요."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은 웃는 척 해야 되죠. 정말 더러운 느낌일 거예요. 그냥 다른 농담을 쓸 수도 있는데 뭣 때문에 사람들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요. 나도 걸렸을 수 있죠."
아함과 나는 5년 동안이나 자잘한 파티 또는 자원 공연을 다니며 잡담을 주고받았지만, 그동안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 아함이 이런 얘기를 했다. 자기는 쭉 내 글의 애독자였지만 그 순간이 나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영원히 바꿔놓고 말았다고 말이다. "한 여자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듣고는 정신이 멍해졌지." 그가 말했다. "당신이 그냥 웃기기만 한 게 아니라-늘 당신이 정말 웃기다고 생각했었지만- 진짜, 진짜, 엄청나게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거야." (p.237)

오랫동안 나는 어떤 코미디 쇼를 보러 가든, 내 젠더를 겨냥한 수많은 야만적인 농담에 별 도리 없이 그냥 히죽 웃고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들은 우리를 때리는 것, 우리를 강간하는 것에 대해서는 물론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해도 싼 이유 및 우리를 서열화하는 것, 우리를 성관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이미 비인간화된 우리 존재를 한 줌의 모욕적인 전형으로 쪼그라뜨리는 것에 대해 떠들어댔다. 이런 농담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소위 진보적인 대안쇼라고 하는 무대나 내 친구들이 예약한 쇼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코미디에서 여성혐오는 평범한 요소였다. 제발 내 아내 좀 데려가줘요. (p.240)

어떤 자원 무대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간밤에 여자 하나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섹스하는 동안에 얼마나 소리를 크게 내던지.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죠. ‘쉿, 너 이 강간을 살인으로 바꾸고 싶어?" (p.241)

내가 사랑하는 코미디언이 나한테 경보를 울리는-뭔가 인종주의적이거나 성차별적이거나 트렌스젠더 혐오주의적인-어떤 말을 했을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괜찮은 걸 거야. 그가 괜찮다고 했고 나는 그를 신뢰하니까.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모르는 비밀 계약 같은 게 있는 게 틀림없어. 여자나 게이나 장애인이나 흑인 들이 그게 멋지다고, 농담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동의하는 계약 말이야.
하지만 브릿지타운에서의 그 순간에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밀어닥쳤다. 그런 규칙은 대체 누가 만든 거야? 그런 계약을 누가 했냐고? 나는 아무 계약서에도 사인한 기억이 없는데. 어쨌든 그건 보편적인 동의라기보다는 힘센 남자들이 자신들은 절대 겪을 일이 없는, 생명을 파괴하는-때로는 말 그대로 진짜 고문을 포함한-공포로 싸구려 웃음을 짜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설치해놓은 위장 폭탄에 더 가까워 보인단 말이지. 도대체 내가 왜 몇 시간 동안 ‘쌈박한‘ 여성혐오, ‘쌈박한‘ 인종주의, ‘쌈박한‘ 강간 농담에 환호하면서 앉아 있어야 하는 거지? 단지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나한테도 중요한 이 산업에 끼고 싶어서? (p.241-242)

아함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내 세계에서 유일한 부분이 아니었다. 고통에 지친 나는 (그리고 나중에는 내 직업 탓에) 약간 그를 옆으로 밀쳐놓게 되었는데, 그 공간이야말로 정확히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p.332-333)

나를 속이다니! 5년이라고 해놓고. 나는 5년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2년 만에 프로포즈를 하다니.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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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7-03-2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도 이 책의 표지에 손가락 하나 보태고 싶어요.
저 역시 그녀의 결혼식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다락방 2017-03-27 08:32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요즘 어떻게 지내요? 열심히 글 쓰면서 지내고 있나요?
 
문학과 사회 116호 - 2016.겨울 (본책 + 하이픈)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아직 본책은 읽지도 않고 별책인 하이픈 <비평적-페미니즘적>의 일부만 읽었음을 우선 밝힌다. 그런데 이 별책이 참 좋다. 오늘 지하철안에서 읽으면서, 아 페미니스트들은 진짜 똑똑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나아가야할 방향을 끊임없이 찾으려고하고, 그것이 더 옳은 길임을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생각하며 또 이건 잘못이 아닌가, 하고 자기 반성도 더불어 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알면알수록 세상의 어두운 면을 자꾸 보게 되지만, 그 어두운 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더 밝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테다. 논문이라고 해야할지, 이 별책에서 '김주희'의 <속도의 페미니즘과 관성의 정치>를 읽으면서 또 내가 더 밝아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두운면을 또 보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천천히 읽고 두고두고 읽어야겠다. 그런데, 실린 글들 중에서 금정연 의 글은 내가 너무 실망했네? 본인의 글이라기 보다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지만,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만 했어. 당황스러울 정도로 실망스런 글이다... 어쨌든, 여태 읽은 부분까지는(별책의 34페이지..), 금정연 글 빼고는 다 너무 좋았다. 뒤의 글들을 안읽었고 그래서 어떤 글들이 나올지 모르니까 별 다섯을 주는 건 좀 보류하도록 하겠다. 아직 34페이지밖에 안읽었으니 섣부른 판단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뭔가 앞으로 나아가는 와중에 '어? 이건 뭐지?' 하고 스스로에 대해 확답을 내릴 수 없거나 확신이 없을 때, 이 책을 들춰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르투갈에 장기체류(혹은 이민)하게 될 때 이 책 가져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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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데이브의 일화는 그와 그의 친구 다섯 명이 길거리에 서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매력적인 여성이 그들 앞을 지나가고 그들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중 한 명(편의상 '밉상'이라고 부르자.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나불거리는 그런 타입 있지 않은가)이 그녀를 향해 외친다. "거기 언니, 완전 섹시한데! 내가 죽여줄까?" 이런 경우 대부분 여성들은 밉상의 부적절한 발언을 익숙한 듯 무시하고 지나가곤 했는데 그날만은 달랐다. 그 여성이 뒤돌아보더니 제대로 쏘아붙인 것이다. 

그녀는 욕을 섞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채로 밉상을 따끔하게 혼내주었다. 그녀의 말발 센 공격을 받고 나자 데이브와 친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우우우" 하고 외쳤다. 나는 데이브에게 이런 반응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었다. 데이브는 친구들이 여자에게 굴욕당한 밉상을 놀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씨름에서 여자에게 지는 것은 남자에게 지는 것보다 더욱 치욕스러운 일이다. 그는 친구들 앞에서 쪽팔리게 여자에게 당한 것이었고 맨박스에 따르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중략)

.

이 여성은 밉상의 남자다움을 위협하며 그를 맨박스 밖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절망적이 되어 화가 치민 그는 이윽고 욕을 하며 여성을 때릴 듯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뛰쫓아 가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데이브 말로는 결국 자신과 나머지 친구들이 밉상을 붙잡아서 제지해야 했다고 한다. 그가 계속해서 여성을 위협하고 비인간적인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이내 여성이 물러서자 밉상은 그제서야 남자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p.120-121)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고등학교 1학년인 동생과 함께 집근처의 독서실에 다녔었다. 밤늦게까지 독서실에 있다가 나오면 독서실 문 앞에서 아빠가 우리를 집에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밤늦게 독서실에서 나왔는데 우리가 전보다 약간 빨리 나왔던건지, 아빠는 채 독서실 문앞까지 오시지 못한 채, 저기 저 횡단보도 앞으로 다가서고 계셨다. 우린 아빠를 발견했고 아빠도 우리를 보셨다. 횡단보도 앞에 도착해 신호가 바뀌면 아빠가 우리 쪽으로 오거나 혹은 우리가 아빠 쪽으로 가면 되는 거였다. 우리도 그렇게 횡단보도 앞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 맞은편에서 남자 아이들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도 아마 늦은 시간까지 독서실을 갔다 왔는가보다. 그들은 네명 혹은 다섯명이었는데, 그들 중에 한 명이 나와 내 여동생 옆을 지나면서 우리에게 뭐라고 했다. 그것이 나 혹은 여동생 혹은 둘다의 외모 비하였는지 성적 대상화에 관련된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완전 화가 나서 그 놈한테 욕을 했다. 개새끼야 닥치라고 했던가, 뭐 그런 식으로 소리치며 욕을 했던 거다. 



그 무리는 우리를 지나쳐가고 있었고, 그 학생이 우리에게 비하 발언을 하고 내가 욕을 하면서 동시에 우리 사이는 한걸음 두 걸음 멀어지고 있었는데, 그 무리 아이들이 우리를 욕한 그 학생에게 낄낄대며 놀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낄낄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화가 난채로 걸었고 그렇게 점점 그들과 멀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곧이어 다다다닥- 하고 뛰면서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나한테 욕을 먹었던 놈이 우리를 향해 주먹진 손을 위로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아아, 이러다 얻어 터지겠구나, 생각하고 겁먹은 나는, 금세 저 횡단보도 앞에 우리 아빠가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크게 "아빠!" 하고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우리 아빠를 가리켰다. 당연히 뛰어오던 놈은 내 손가락이 가리키던 방향을 보았고, 거기엔 우리 아빠가 이 새끼야 죽고싶냐며 돌을 들고 서 계셨다. 그러나 신호가 아직 초록색으로 바뀌지 않아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건지, 이 놈은 멈추지 않고 우리 앞까지 뛰어왔고, 마침 독서실 옆 순댓국집 사장님이 밖에 나와 식칼을 갈고 계시다가 그 칼을 들고는 우리쪽을 향해 뛰셨다. 뭐하는 거야 이 새끼들아! 하고. 이 사장님을 본 녀석은 잽싸게 뒤를 돌아 뛰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다행히(?!) 그 놈에게 맞지 않은 채로 무사히 아빠를 만났고, 아빠는 뛰어와서 순댓국 사장님과 잠깐 이야길 나누셨다. 집에 돌아가는 내내, 그리고 집에 돌아가고 나서도, 나는 이 일로 아빠 엄마에게 엄청 혼나야 했다. 미쳤냐고, 왜 거기서 남자애들한테 욕을 하냐고, 겁도 없이 왜그러느냐고, 너 그 때 아빠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그 아저씨 아니었으면 어쩔뻔했냐, 너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러면 안된다 등등...아 진짜 많이 혼났다......



중학교 때도 그랬어 ㅠㅠ 나를 포함한 여자애들 세 명이 하교중이었는데, 저 쪽에서 걸어오던 우리 또래의 남학생 세 명중 한 명이 우리에게 '기집애야 조용히들 걸어!' 라고 했던가, 뭐 그런 뉘앙스로 말을 해서 내가 또 나도 모르게 '너나 조용히해 이새끼야' 이래가지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해놓고 나서 맞을까봐 졸 무서워했더랬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나여.. 맞을까봐 무서워하면서 왜 버럭버럭 맞서는가... Orz




고등학교 시절 밤길에 마주친 그 남학생은 친구들 앞에서 쪽팔림을 느꼈을 것이다. 여자애가 자기에게 욕을 했고, 친구들 앞에서 그 욕을 먹어버렸으니.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친구들 앞에서 쪽팔림이 먼저였겠지. 그 쪽팔림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신에 세다는 걸 다시 보여줘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나를 때리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 나를 죽도록 팼을지, 한 대 때리고 도망갔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친구들 앞에서 나를 때려야만 자신의 기가 다시 산다고 느꼈을 것이다. 애초에 놀리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데 말이다. 아아, 오만년만에 내 고딩시절 생각났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있는듯 없는듯한 아이였는데,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도 아닌, 그냥 구석에 쭈그러진 여고생1 이런 거였는데, 그런 아이가 저런 상황에서는 개새끼, 이새끼 이러면서 욕을 했어..... 난...뭐냐? 


나는 내가 평화를 사랑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묻힌 과거를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니 '싸우자!' 하는 그런 사람이었는가보다. 나는 나를 잘 몰랐던건가...




이 책의 저자 '토니 포터'는 남자들이 여자에게 가하는 폭력(데이트 폭력, 가정폭력 등등)이 남성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남성이라고 말한다. 선한 남성들이 거기에 대해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성이 폭력을 가하는 남성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한다. 남자가 남자에게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바뀌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을 갖는다. 일단 남자들이 여자들 말은 무시하면서 남자들의 말엔 귀를 기울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래서 이 책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갖는다. 이 당연한 일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에 대해서 어마어마하게 감사한 마음도 든다. 이런 식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남자가 적은데 토니 포터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남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여기엔 한계가 있구나, 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남성들이 여성을 성적대상화 할 때, 그걸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대는 이유가 '네 딸이 다른 남자들로부터 그런 대상이 되어 그런 말을 듣는다면 어떨것 같냐?' 이니까. 나는 여기서 한계를 느끼고 씁쓸해지는데, 남성이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면 안되는 이유에 '네 딸이, 네 여동생이, 네 누나가, 네 어머니가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를 전제해야 하는걸까. 그걸 인간이 인간에게 그러면 안되는 일로는 이해하기 힘든걸까. 실제로 이렇게 물었을 때 많은 남성들이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깨닫는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이 전제는(우리가 성적대상화 하는 대상이 우리의 딸, 애인일 수도 있다) 습관처럼 누군가를 성적대상화 할 때 번번이 떠오를까? 이건 얼마나 유효할까. 게다가 '나는 딸 안낳을건데?' 라는 식으로 자기가 대상화 하는 대상과 분리시켜 버리면?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것 같은 거다.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될 짓, 지켜야 할 기본 선, 이런 걸로 이해하라고 하면 내가 너무 이상적인걸까?




수천 명의 남성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성공한 적도 실패한 적도 있었다. 만약 남성들 중 하나가 내가 보는 앞에서 여성을 "XX년"으로 지칭하면 나는 대개 이런 식으로 대응하곤 한다.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알겠스니다만 제가 한 가지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우선 선생님께서 사용하신 단어를 잠시 생각해볼까요? 만약 선생님께서 아는 다른 여성분들이 그 단어를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만약 따님이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그 단어를 들었다면 어떨까요? 어떤 생각이 드는지 한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p.152-153)



게다가 이 일을 '나의 딸이나 애인이 당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라고 하면 우선적으로는 '나와 관계된 사람에게 일어나면 기분 나쁘다'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결국은 '그런 소리 안듣게 잘 하고 다녀' 라고 여성들에게 또 책임을 미루지 않을까? 나는 아무리 생가해도 그럴 것 같은데? 야, 나는 니가 그런 말 듣는 거 싫어, 성적 대상화 되는 거 싫으니까 옷 야하게 입지 말고 화장 진하게 하지 말고 밤에 다니지 말고 기타등등...으로 되어버리지 않을까? 나는 사실 많은 남자들이 이미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걸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더 조심하고 다니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게 어떻게 해결방법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그래서는 안된다, 를 주입시켜야 하는 거 아닐까? 우리는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하고 다닐 수 있고, 거기에 대해 누군가 나를 대상화 시켜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너도 나도 똑같은 인간이다, 이걸 인지하란 말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네 주변의 누군가가~ '하고 대입시키는 건 답이 아닌 것 같아...




남자들에게 주어진 성역할, 남자들은 강해야 하고 울지 말아야 하고 감정 표현을 느끼는대로 다 하면 안되고 등등 '강요된 남자다움'을 맨박스라고 하는데, 이것부터 일단 없애버리는 것, 이 맨박스로부터 나오는 것이 가장 우선된 순서이다. 남자들은 이래야 한다~ 를 말하는 순간 자연스레 '여자들은~ '도 생겨버리니까. 게다가 남자들에게 강인함을, 냉정함을, 객관적임을 주입하는 순간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와 동시에 '그래서 열등하다'가 되어버리니까. 이 책에도 나오지만, 여자들은 남자들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약하니 우리를 보호해줘, 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너네 폭력을 쓰지마!'를 말하는 거지. 토니 포터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이 사회에서 차별을 없애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없애는 길은, 남자의 사회화 자체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고. 이런 사람이 알고 있고 또 여러 사람에게 얘기하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백 명이 듣는다고 백 명이 다 바뀌는 건 아니겠지만, 그 중의 일부는 그동안 자신이 '선한 남자로서' 폭력이 행해지는 데 어떻게 도왔는지 인지할 것이고 또 잘못을 뉘우칠 것이며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런 사람이 점차로 많아지면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더 나은 세상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길 바라고 있다, 나도. 




여성들은 보호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남성이 폭력을 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남성들은 해법의 일부분으로 문제 해결에 참여하면 된다.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존중한다면 여성의 안전은 자연히 뒤따라 올 것이고 여성 폭력도 감소할 것이다. 먼 훗날엔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 맨박스가 언제까지 선한 남성들의 핑계가 되어 줄 수는 없다. (p.174-175)





폭력적인 남성은 우리 같은 평범한 남성들로부터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에 대한 면죄부를 받는다. 남자들이 ‘나쁜 놈‘들을 용서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간섭하지 않고 자기 일에나 신경 쓰는 것이 이에 속한다. 남자들의 남의 가정 폭력 문제에 개입하기를 거부하는 저변에는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그 사람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남성들이 침묵을 지킬 때 그 침묵은 폭력적인 남성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하고 결과적으로는 남성들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방해물로 작용한다. (p.25)

<빌의 이야기> 요새 몇몇 여자들은 남자들을 업신여기기도 하고 남자의 보호가 필요 없다고도 합니다. 여동생이 이런 소리를 자주 하는데 저는 이게 결혼할 남자가 없는 걸 정당화하려는 변명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여자가 남자 따위 필요 없다는 듯 행동하는 걸 증오합니다. 그런 행동이 남자들의 기를 죽이기 때문이죠.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이 "난 남자가 필요 없어요. 돈도 있고 집도 있고 좋은 차도 뽑았어요.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다고요" 라고 말하는 건 남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에요. 저는 여자들이 남자들의 이런 성향을 이해하고 일부러 자존심을 깎아내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리 하기 싫지만, 저는 여자들이 여성 폭력 문제를 스스로 초래했다고 봅니다. 누군가를 때리는 게 괜찮다는 게 아니라(저야 폭력은 당연히 반대하지만), 여자들도 자기들이 폭력 문제를 발생시키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좀 알아야 합니다. (p.88-89)

빌은 스스로를 ‘꼰대‘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남성의 손으로 자행되는 여성 폭력을 여성들 스스로가 초래한 면이 있다는 주장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서도 종종 들려온다. 여성이라면 남성의 마음을 이해하고 남자의 자존심이 상처 입지 않도록 맞춰서 행동해야 한다는 발상은 남성들이 매우 자주 언급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지배적 위치에 있는 집단이 힘없는 피해 집단에 강압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강요하는 방식이다. 이는 여성들이 강압적인 처사에 반기를 들거나 평등을 주장한다면 그 결과로 발생하는 반작용(폭력)은 스스로 불러온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잘못된 시각을 반영한다.
그리고 빌의 발언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시사점이 있는데 바로 여성들이 남자에 대한 반발로 동성애를 선택한다는 인식이다. (p,89)

"남자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뭐냐면요. 여자에 대한 인식과 여자를 대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껏 몸에 깊게 밴 인식을 재정립해야 하는 거죠. 전 남자들이 어떤 이슈에서건 여자들의 의견과 생각, 제안, 충고를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남성만큼 존중할 때 우리는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성차별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어요. 저는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이 자신을 ‘덜 남자답게‘ 느끼는 게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남자들은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순히 기분이 나쁘다, 신경질이 난다 또는 여자들에게 화가 난다, 이렇게 반응하죠. 맨박스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반응해도 된다고 가르치거든요." (게리의 이야기중 p.123-124)

"성폭행의 가해자가 여성입니까, 남성입니까? 정답은 당연히 남성이었다. "만약에 여학생들을 구내식당에서 기숙사로, 기숙사에서 도서관으로 실어 나르는 대신 남학생들을 차량으로 이동시키면 어떨까요? 남성이 범죄의 장본인인데 왜 남성이 저지른 폭력 때문에 여성들이 피해를 봐야 하죠?" 회의에 참석한 여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로 동의를 표했다.
우리의 가히 ‘혁명적인‘ 대응책은 일부 남성 교직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심지어 한 남성은 우리가 남학생들을 차량으로 이동시키면 ‘젠더 프로파일링‘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에게 그렇다면 캠퍼스 내에서 자행되는 성폭력도 엄연히 젠더 프로파일링임을 상기키셨다. 캠퍼스의 모든 여성들에게 셔틀 차량을 이용할 것을 촉구하는 것 또한 젠더 프로파일링일 터였다. (p,136)

우리는 ‘진정한 남자다움은 최대한 여자드레게 관심을 두지 않고 여성들의 경험과 거리를 두는 것‘이라는 믿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딸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해보고, 그 세상 속에서 다른 남성들이 자신의 딸을 어떻게 대할지를 그려보고 나면 대화에 임하는 남성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이내 자기 내부에서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주변 남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잠자는 시간만 빼고 딸들을 쫓아다니며 다른 남성으로부터 방패막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딸이 겪게 될 세상을 상상하며 자신의 평소 행실을 더욱 통력하게 반성하게 되고 마침내 전구의 스위치가 반짝 켜진 듯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p.142)

여성들이 지켜야 할 갖가지 수칙만큼이나 많은 질문들이 여성들을 따라다닌다. 여성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면 이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왜 그랬는데?" 류의 질문들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면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왜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밖에 있었습니까? 왜 그렇게 야한 옷을 입고 외출한 겁니까?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습니까? 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다니지 않고 혼자 길거리에 나왔습니까? 가정 폭력 케이스에 등장하는 매우 고질적이고 고약한 질문인 "남편이 그렇게 폭력을 쓰면 헤어져야지 왜 안 헤어집니까?"도 마찬가지다. 한술 더 떠 "맞으면서도 헤어지지 않는 거 보니 좋은가 보지"라고 내뱉기도 한다.
이런 질문들은 ‘피해자 책임 전가‘라고 부르는 현상의 일부다. 우리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남성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여성이 지도록 강요한다. 가정 폭력으로 고통 받는 여성에게 습관처럼 "왜 그런 남편하고 안 헤어집니까?"라고 물으면서도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에게 "왜 폭력을 멈추지 않습니까?"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p.149-150)

온라인 속 남성들의 비상식적인 발언들은 여성을 겨냥한 경우가 많다. 앞서 보았듯 여성들을 열등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경향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내용은 워낙에 남성들이 소화하기 버거워하는 주제이므로 그나마 남성의 편으로 보이는 나 같은 남성이 말할 때 조금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반면 여성이 가르치는 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남성들의 마음속에는 ‘어디서 여자가 자꾸 이런 시비를 걸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는 내용을 여성 강연자가 토시 하나 바꾸지 않고 나보다 더 상냥하게 전달한다고 해도 결국 남성들은 같은 남성이 가르치는 것을 더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건 남서들이 착하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남성들은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맨박스 일화들에서 보았듯 착한 남성들도 다른 남성들만큼이나 성차별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그 어떤 남성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p.155-156)

노력과 인내심, 용기를 가지면 맨박스를 벗어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 첫 단계로 뜻이 맞는 남성들을 모아야 한다.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남녀평등 이슈를 다시 새각하기 시작한 남성은 이것이 아주 장기적이고 힘든 (하지만 보람찬) 과정이란 걸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려면 주변에서 동기부여를 도와줄 이들이 필요하다. 내 경우 가장 큰 동기 부여는 내 딸들이 살아갈 미래 세상과 내 앋르들이 자라났을 때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큰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내 생각이 얼마나 좁았는지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p.164)

남성ㄷ르은 곧잘 자신의 성별 때문에 제공받은 특혜와 이점을 마치 당연히 행사할 수 있는 권리처럼 여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의 문화적 규범은 이런 믿음이 옳다고 편들어준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며 여성의 역할은 남성을 대접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남성이 여성을 비하하고 억압하며 학대하는 행위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사회적 해악은 남성들이 먼저 책임을 인정하고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고쳐질 수 없다. 선한 의도를 가진 남성이라고 해서 이토록 많은 이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계속해서 무시로 일관할 수만은 없다.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사랑하는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문제이기 때문이다. (p.170)

남성들이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을 고발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폭력 행위의 책임을 가해 남성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성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고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 같은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대로 정확히 명칭을 정하자면 행위의 가해자인 남성을 지목하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처럼 말이다. (p.171-172)

남성들은 여성 폭력 문제에 있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여성 폭력 문제는 모든 남성 개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다. 우리 모두는 자기 일처럼 폭력 근절을 약속해야 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은 남성 모두가 연대적 책임감을 느끼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난 모든 남성들이 자신의 사회화 학습 내용과 여성에 대한 생각을 점검해보길 요청한다. 이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의무감을 바탕으로 솔직하고 진솔하게 그리고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각오로 말이다. (p.173)

그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비폭력적으로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평소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절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죠. 그들은 자신의 아내나 여자 친구를 빼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폭력을 쓴 적이 없었습니다. 흔히 생각하듯 폭력성이 정신병 때문이었다면 폭력 행동은 여성 앞에서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나타났겠죠. 정신병 증상이 발현된다면 상대방을 가리거나 성별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남성의 폭력만큼은 여성 앞에서만 발현되는 듯했습니다. (p.187)

여성들은 신변의 안전을 지키고 남성들의 폭력을 피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 매일같이 노력을 기울이며 살고 있습니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여성들은 하루에 세 명꼴로 현재 혹은 과거 배우자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가정 폭력과 성폭력은 여성들의 가장 흔한 신체적 상해 원인으로 꼽힙니다. 미국 기준으로 매일 응급실에 방문하는 여성들의 35% 정도는 남성에 의한 폭력의 직간접적인 결과입니다. 우리는 극히 소수의 남성이 폭력을 휘두른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대략 15~20%의 남성들이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성폭력을 저지릅니다. 열 중 여덟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우린 이 여덟 명의 남성이 다른 두 명에게 폭력을 쓰지 말라고 말하면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남성들이 던지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폭력과 학대를 반대하는 남성들이 폭력을 쓰는 남성들에게 그들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가 고대하는 변화가 현실화되고 남자다움이 재정의될 거라 믿습니다.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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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2-21 22:03   좋아요 0 | URL
앗 저 안그래도 밑줄긋기 하러 들어왔다가 오타 발견하고 수정했어요. 히힛. 새당 보고서 응? 새누리당 쓸라 그랬나? 했지 뭡니까 ㅋㅋㅋㅋㅋㅋ 대상이었는데 ㅋㅋㅋㅋㅋㅋ고마워요!

오늘의 안주는 없습니다! 오늘은 술 안마시고 밑줄긋기만 다 올리고 잘거예요. 혹시 날아갈까봐 일단 저장 한 번 해주고 다시 덧붙이러 갑니다. 히힛.

님도 저와 같은 경험이 있으시군요! 우먼 파워!! 얍!!!

나와같다면 2017-02-21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절만 해도 갈고 있던 식칼을 들고 ‘뭐하는 거야 이 새끼들아!‘ 라고 소리치는 순댓국집 사장님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사회적 믿음 이란게 있었는데..

지금은 각자 살아남아야 되는 세상인것 같아요..

다락방 2017-02-22 07:56   좋아요 0 | URL
어릴 때부터 성평등에 대해 가르치고 교육한다면 지금보다 확실히 더 나은 세상이 될텐데요. 우린 너무 차별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이었을 때부터의 교육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와같다면 님.

아무개 2017-02-22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주 강의 주제가 맨막스와 유리천장이었어요.
이 두가지를 같은 방식의 억압기제로 보이지만,
실제로
유리천잗은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을 사회적으로 억압하기 위한 기제이지만
맨박스는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맨박스에 헌신하는 남성(강하고 남자다운 남성)일수록
오히려 사회적으로 더 성공할수 있는 기제가 된다.
이렇게 두가지를 같은 억압기제로 보기 때문에 남성들이 우리도 맨박스 때문에 힘들어요. 징징징 거리는 거라고
강사가 이야기 하더라구요.
아차...싶었습니다.
저도 맨박스 읽으면서 여러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아시겠지만, 네 딸, 부인 뭐 여튼 아는 여자로 상상해라 등등)이
있었지만, 그래도 맨박스에 갖힌 남성들이 안됐다, 너희들도 힘들겠다 그러니 같이 페미니즘 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맨박스에 안에서의 삶이 맨박스를 깨고 나오야 하는 삶보다
더 많은 이득이 주어질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서
남성 개인에게 왜 그 박스를 부수고 나오지 않냐고 하는 것은 멍청한 소리였어요....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체제 속에서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손해 볼것이 없으니까요.

개인의 변화가 먼저인가, 사회의 변화가 먼저인가.
답을 알겠다 싶으면 그 답이 틀렸나 싶어지고....

다락방 2017-02-22 09:13   좋아요 5 | URL
저는 맨박스가 유리천장과 같은 식의 억압기제라고 생각하진 않았었어요. 맨박스는 강요된 사회화로 이해했거든요. 이건 오르려 해도 오를 수 없는 유리천장과는 다르니까요. 저는 이 책의 저자가 남자인만큼 더 유효하게 작용할 거란 생각을 하긴 하는데, 그래서 한계가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리뷰에도 썼지만, ‘니가 아는 여자가 당했다고 생각해봐라‘ 는 전 진짜 답이 아닌 것 같거든요. 남자가 여자가 되지 않는이상, 그 수많은 성적대상화의 피해자가 되어보지 않은 이상 ‘니가 아는 여자가 당했다고 생각해봐‘는 부질없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저자는 그렇게 예를 들면 남자들이 아! 하고 깨닫는다고 하더라고요. 글쎄요, 저는 남자들이 이미 많이 그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더 여자들이 억압당하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저자가 맨박스로부터 나오자, 라고 하는 건 충분히 의미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보여져요. 그렇지만 제가 거기다 대고 ‘맨박스로부터 나와‘ 라고 말하는 건 아예 들리지도 않겠죠. 그래서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게 고마우면서도 한계가 느껴지고 ... 책장을 덮었을 때는 개운한 기분이 아니더라고요. 저도 계속계속 공부하고 계속계속 생각하는데 뭔가 뚜렷한 길이 딱 눈 앞에 나타나는 기분은 아니에요. 순간순간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참고 문헌 없음] 텀블벅에 후원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제가 선택한 오늘의 할 일이었어요! 눈뜨자마자 후원! 후훗.

레와 2017-02-22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페이퍼를 읽으면서 또 배우고 생각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다락방 2017-02-22 20:58   좋아요 0 | URL
배우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해주어 내가 고마워요!
우리 계속 얘기해요!
:)
 
좋아서 껴안았는데, 왜? - 2021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도서관 어린이인권도서 목록 추천, 2021 경기도학교도서관사서협의회 추천 바람그림책 40
이현혜 지음, 이효실 그림 / 천개의바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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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서적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성적 대상화'란 말이 쉽게 와닿질 않았다. 일상적으로 늘 겪고 있는, 경험하고 듣고 보는 일이면서도 그 용어 자체는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 더 쉽게 쓰여진, 더 잘 읽히는 페미니즘 서적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성적 대상화, 가시화 등의 용어들을 처음 접했을 때, 책을 읽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아 페미니즘은 어려운 거구나' 라고 자칫 관심을 닫아 버릴까봐 조금 더 쉽게 쓰여진 책을 원했던 거다. 훅- 다가설 수 있도록. 나처럼 생각했던 사람이 많았는지 이제는 쉽게 쓰여진 페미니즘 책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전에, 그러니까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페미니즘이란 용어 자체의 설명도 어려울 때, 그때는 어떤 책이 좋을까? 



어릴 적에 누구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을 견뎌야했던 적이 많을 거다. 수시로 치마를 들추고 머리를 잡아당기고 끌어안고 뽀뽀하고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기고... 내 경우엔 지금 언급한 모든 일들을 수차례 당했는데, 사실 나는 가만있는 성향의 사람이기 보다는 해결해보고자 하는 타입이었다. 선생님께 일러바친 적도 있었는데(선생님, 쟤가 저 껴안아요!), 그때 선생님은 내게 '너 좋아해서 그러는건데 그런걸로 이르지마라' 고 했더랬다. 여자 선생님인데도 그랬다. 그래서 그 뒤로는 선생님이 안계신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 숨었던 적도 있더랬다. 종치면 나가야지, 하고.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치마를 들출 때도 마찬가지. 선생님한테 일러봤자 해결되는 건 없었다. 오히려 소문만 무성해진다. 쟤가 쟤를 좋아한대요~ 하고. 다른 반 남자아이가 쉬는 시간에 찾아와 공개적으로 날 좋아한다고 말하고 가기도 했다. 그 때 내가 얼마나 얼굴이 시뻘개졌는지는 어휴- 말해 다 무엇해. 한 번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판서를 하는 틈을 타 내 앞자리 남자아이가 내 다리를 만지면서 니 속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수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지마 개새끼야!



하고 소리를 질렀더랬다. 휴- 이런 일화야 셀 수 없이 많다. 



나는 선생님에게 일러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게 폭력이었다. 크- 나는 나를 괴롭히는 남자아이들을 때렸다. 나를 안을라 치면 주먹으로 때리고 또 안으려고 다가오면 필통을 들고 때렸다. 그냥 막 때렸다. 내 옆에 오지 못하게 저리가! 이러면서 맨 손을 때로는 무기를 휘둘렀다. 체육 시간에 한 번은 몸이 아파 교실에 혼자 남아 있었는데, 혼자서 칠판에 낙서를 하고 있었는데 같은 반 남자아이가 뭔가를 가지러 교실에 들어왔다가 내게 다가왔다. 아무도 없을 때 안아보자며 내게 다가오길래, 나는 거침없이 녀석의 뺨을 때렸다. 꺼져, 라고 하면서. 언제였더라, 수학여행 때는 내가 자고 있는 여학생들 방에 다른 반 남자아이들이 떼로 몰려왔다. 밤이었고 우리는 불을 켰는데, 찾아온 남자아이들 중에 대장은 일전에 우리 반에 와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놈이었다. 여자아이들이 꺅 소리를 지르며 애들에게 나가라고 하는데도 애들은 히죽거리면서 방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자다 깨서는 그 애들을 향해 말했다.



야, 죽고 싶지 않으면 나가라.



그러자 남자 아이들은 '나가자' 이러면서 다같이 나갔다. 나는 하도 폭력을 휘둘러서, 당시에 깡패로 소문이 나있었다. 깡패로 소문나기 전까지의 나는, 전교부회장 선거에 후보로 나갔었고(떨어졌지만), 신문과 티비에 나온 적도 있었으며, 공부잘하고 예쁘기로(응?) 소문이 났었더랬다. 그런데 깡패...로 바뀌어 있었다. 그나마 6학년이 되어서는 남자아이들 때리는 걸 멈출 수 있었는데, 그때는 남자아이들이 안는다는 식으로 내게 접근하지 않았었다. 


내게 다가오는 남자아이들을 때리면서 나는 진짜 피곤했다. 어린 나이에 피곤했어 ㅠㅠ 아이들과 맞서 싸우면서 피곤한 게 아니라, 그냥 그 상황 자체가 피곤했던 것 같다. 나는 싸워서 피곤했지만, 나처럼 남자아이들을 때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또 그 아이대로 피곤했을 것 같다. 싫은데 어쩔 수가 없으니까. 이게 좋아해서, 예뻐서라고 하니까 다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 자신만의 소극적 저항을 하면서 얼마나 피곤했을까.




일전에 조카가 아래 위로 까만 색을 입었는데 너무 잘 어울려서 예쁘다, 귀엽다 했더니 조카는 그렇게 입기 싫다고 했다. 아빠가 자꾸 놀린다는 거였다. 나는 조카의 그 말을 듣고 '아빠가 타미 귀여워서 그러는거야' 라고 했는데, 그때 조카가 그랬다.


이모, 귀여우면 귀엽다고 해야지 놀리면 어떡해!



아!! 내가 지금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거지? 무심결에 내가 어른들로부터 그토록 듣기 싫어했던 말을 해버렸어! 문제 해결엔 아무것도 도움이 안되는 말을 내가 했어! 그 때 진짜 내가 무서웠다. 나는 얼른 아이에게 사과했다. 아 미안해 타미야. 타미 말이 맞아. 귀여우면 귀엽다고 해야지 놀리면 안되는거야, 타미 아빠가 잘못한거네, 라고. 이 일이 내게 오래 남았다.





'좋아해서' 여자아이를 끌어 안던 남자아이들은 자라서 '좋아하니까' 성희롱을 하는 남자 어른이 된다. 여자들이 싫다고 해도 그것을 '에이 좋으면서 뭘그래' 라고 받아들인다던가, '이렇게 좋아하는 데 내 마음 왜 몰라줘' 라고 하면서 강제적으로 스킨십을 시도한다. 진짜 씨발스러운 경운데, 이건 헤어지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하나씩은 갖고 있는 찌질한 전남친들의 경우, '연락하지마' 라고 하는데도 계속 연락하고 찾아오고를 반복하지 않나. 새벽 두 시에 '자니?' 라는 것도 싫고, 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차단을 걸어도 계속 다른 식의 접근을 시도하는 그 행위는 폭력이다. '너를 잊지 못해서' 라고 상대에게 그 이유를 덮어 씌우지만, 그건 실제로 자기 자신을 위한 거다. 너를 잊지 못해서 '나는' 너를 다시 가져야겠어, 다시 내 옆에 두어야겠어, 라는 이유. 그래놓고 '너를' 잊지 못한다고,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고 징징댄다면, 그건 상대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다. '안돼' 라고 하면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상대를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서를 떠나,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너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라고 한다면,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안돼 라는 말은 안된다는 거다. 




나는 아무리 친한 사람,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과도 거리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늘 그렇게 주장해왔다. 물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야 매번 든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밀착되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상대의 마음이 아니다. 그렇기에 매번, 좋아하면 할수록, 가까이 다가가고 싶으면 그럴수록, 더 조심하게 된다. '조심하지좀 마' 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조심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건 아마도 내 스스로가 내 경계선 안으로 침범하려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가 허락한 적 없는데 밀고 들어오는 거 진짜 너무 싫고 소름 돋는다. 나한테 밀착하려는 것도 싫고, 내가 싫다고 하는데도 밀고 들어오려는 거 싫고, 나를 열 번 찍는 것도 싫어한다. 그럴수록 정나미가 떨어진다. 이 사람들(대체적으로 남자사람들)은, 왜 내가 싫다는데도 이렇게 밀고 들어오지? 싫다고 하면 '너는 왜이렇게 자신을 압박하냐' 등의 개소리를 하기도 하더라. 좀 더 마음을 열어야 되지 않겠냐 등등.... 내 마음 내가 원하는 만큼 내가 열겠다는데 지들이 뭔상관? 나는 이 남자들이 다들 경계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쳐둔 경계선을 멋대로 무시하려 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얼마전에 글 썼던 것처럼, 상대의 허락받지 않고 상대 얼굴 사진을 전시하는 일 따위, 그런 건 상대가 쳐둔 경계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이며 상대의 몸을 상대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들에게 '경계'라는 게 무엇인지 처음부터 교육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들 모두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 하고 싶다.




'준수'는 '지아'가 너무 좋아서 껴안았는데 지아가 싫어한다. 준수로서는 좋아서 끌어안았는데 왜 지아가 싫어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선생님은 경계선에 대해 설명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나라를 구분해주는 선이 있고, 인도와 차도처럼 차와 사람 사이에도 선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허락없이 넘어서는 안되며, 그럴 경우 다칠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해준다. 친구의 장난감을 내 마음대로 갖고 놀지 않아야 하고 친구의 과자를 내멋대로 먹어서도 안된다. 친구의 공간에 들어갈 때, 친구의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을 때, 우리는 반드시 친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다. 몸도 마찬가지. 지아의 몸은 지아의 것이다. 그런데 지아의 몸을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끌어안아서는 안된다. 지아에게 묻지 않고서는 지아에게 무엇도 해서는 안된다. 친구를 놀리는 것도 마찬가지. 상대가 '싫어, 하지마' 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해도 된다'고 허락하는 게 아니다. '안돼'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나쁜 짓은 나쁜 짓이다. 이 경계선에 대해 이해하게 된 준수는 지아에게 사과의 편지를 쓴다. 네 몸은 네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어, 라고.



우리에게 어릴 적이 필요했던 교육은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의 모든 찌질한 전남친들, 잘 헤어지지 못하는 옛 연인들과 또 세상에 모든 '성적대상화에 익숙해진' 성인남성들에게 부족했던 게 바로 이런 게 아니었나 싶다. 내 몸은 내 것이듯이, 다른 사람의 몸 역시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것을 상대의 허락도 없이 품평하고 대상화 시켜서는 안된다. 이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우리는 어릴 적에 교육받지 못했던 것같다. '좋아해서 그래'라니, 이 말은 얼마나 많은 성희롱과 성폭력을 잠재하고 있는가. 더이상 '아이스케키~' 가, 끌어안는 일이, '좋아서 그래'로 덮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자기 몸의 주인은 자기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알고 자랐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렇게 말해주고 있고,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도 필요하지만 쥐뿔도 모르고 마음대로 경계를 넘으려 하는 성인들에게도 필요한 책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싫다고 했으면 싫은 거다.

안된다고 했으면 안되는 거다.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내 의사에 반해 네 마음대로 행동하면 안되는 거다. 내 몸의 주인은 나니까. 나의 주인은 나니까. 당신은 내 경계선을 내 허락없이 넘어서도, 지워서도 안되는 거다. 이 단순하고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면서 살자. 




조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래서 이 책은 조카에게 선물할 것이다.

조카야, 누가 네 경계선을 넘으려 하면 안된다고 말해주고, 너 역시 다른 사람의 경계선에 들어가고 싶다면 반드시 노크를 하도록 해. 

이 말을 내 대신 이 책이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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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7-02-2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

이 책 보관함에 넣고, 선물할 리스트에도 넣을게요.

참 좋은 글이다. 다락방! 땡큐!!

다락방 2017-02-20 10:19   좋아요 0 | URL
히힛. 좋다고 말해주니 기분이가 참 좋으네요. ㅎㅎ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