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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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이렇듯 경쾌하고 다정하게 전하는 사람도 있구나. 나는 좀더 무겁게 해주는 걸 선호하지만, 이렇게 가볍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줘야 세상이 균형을 이루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마음속에서 부실한 선반 같은 것들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곳에서 낡은 나사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내려앉는 그런 소리였다. 여기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도 있을 듯한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p.247)




경쾌하다고, 다정하다고, 가볍다고 말해놓고서는 인용문은 이런 것만 가져왔네 ㅠㅠ




조금만 더 있어, 말하고 싶었지만 은영은 칙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은영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잘되지 않았다.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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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8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 사월의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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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것인데, 그 친구는 이 책을 중고샵에서 샀다고 했다. 그러니 어디에서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의 표지는 상당히 지저분하다.




그렇지만 책의 본문을 읽기에 전혀 지장이 없고, 책의 본문에는 밑줄도 하나 그어있지 않다. 책의 표지에 별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읽기에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엔 책을 읽는 족족 중고샵에 팔고 있는데, 이 책은 표지가 너무 지저분해서 차마 팔 수가 없더라. 그래서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분께 드리고자 한다. 표지가 저래도 아무 상관없으며, 이 책이 읽고 싶으신 분은 댓글 달아주세요. 제가 읽었던 이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책은 한 권이니 한 분께만 드릴 수 있고요, 가장 먼저 이 책을 달라고 댓글 달아주신 분께 드리겠습니다. 택배비도 제가 부담합니다. 




어쨌든 이 책을 읽기전부터 조용히 나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그 생각이 더 강해진다. 어느 하루, 온전히 나에게 집중해 내 내면을 가만 들여다보자. 나에 대해 계속계속 가만가만 들여다보면, 내가 가야할 방향도 보일 것이다. 사실, 방향은 이미 정해 두었지만.



죽음처럼 어쩔 수 없이 절대적으로 혼자 맞이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피할 수 없기에 `혼자라는 것`에 대한 질문 또한 우리의 인생에 부수적인 그림자와도 같다. 이 책을 쓰고 있는 나 역시 혼자일 수밖에 없다. 물론 같이 해야 하는 일도 있다. 혼자서 해야만 하는 것과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 이 두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의 삶은 쉽사리 균형을 잃어버린다. (p.12-13)

혼자 사는 사람으로부터 성적 방종을 연상하든 금욕을 연상하든 상관없이, 또는 자유로운 영혼의 아이콘으로 격상시키든 버림받은 영혼인 양 동정의 대상으로 삼든 상관없이, 혼자 사는 사람에 관한 모든 이미지는 공통점을 지닌다. 혼자 사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거의 전부가 혼자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혼자 사는 사람에게 낯설기 그지없다. 혼자 살지 않는 사람들은 혼자 사는 사람조차 낯설어하는 상상적 이미지를 혼자 사는 사람에 관해서 만들어내고, 이 이미지에 따라 혼자 사는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판단하고 참견하고 간섭하고 조언한다. (p.23-24)

4인용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마치 투시경이라도 손에 쥔 것처럼 아직도 1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로맨스에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분석하고 충고하고 측은하게 여기고, 때로는 혼자라는 사실을 과장해 공포심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1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졸지에 혼자 사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피고인이 된다. 4인용 테이블에 있는 사람은 아무 때나 1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결혼하지 않은 혹은 못한 이유를 물어도 되는 자격증을 지닌 사람처럼 행동한다. 1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4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왜 결혼하였어요?"를 묻지 않는데 그 반대 경우는 언제든 허용된다. 4인용 테이블 사람은 특권이라도 지닌 것처럼, 그리고 마치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기라도 하는 양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왜 혼자 사느냐고. 1인용 테이블과 4인용 테이블 사이에는 개인 간 능력의 격차도 성실성과 책임감의 차이도 없지만, 양적 다수를 차지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궁금증 억제의 법칙을 쉽사리 잊어버린다. (p.105-106)

이 시대에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할 이유가 줄었다 해도 그것이 젠더마다 동일하게 줄어든 것은 아니다.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할 이유는 남자보다 여자에게서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벡 부부의 지적처럼 "과거의 여성들은 실망에 부딪혔을 때 자기의 희망을 버렸지만, 오늘날의 여성들은 자기의 희망을 고수한 채 결혼을 버린다." 관습적 성별 분업이 가족 내에서 지켜지는 한, 대부분의 남성에게 결혼은 혼자 사는 것보다 편리하다. 대부분의 남성에게 결혼이란 힘겹게 유지했던 1인 다역에서 벗어나 남편과 아버지라는 역할로 단순화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여성은 달라졌다. "그녀들은 자기 어머니나 할머니가 했던 것, 즉 남편의 요구에 맞춰주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은 덜 받아들이게 된다. 이전에 응집력을 보장했던 접착제들, 즉 과거에 여성이 맡았던 역할들은 사라져가고 있다.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부정하기, 최소한 겉으로라도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끝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감정 패치워크를 떠맡기 과제를, 이제 누가 수행해야 하는가? 많은 여성들은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에 싫증을 내고 있고, 많은 남성들은 아직 준비가 ehl어 있지 않다."(p.127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은 분명 고독한 작업이다. 그 성찰이 고독한 이유는 성찰이ㅡ 결과 우리가 허무와 마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삶에 대한 성찰에서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아니,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때로는 삶의 성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성찰을 타인이 대신하거나 대리하도록 명령할 수는 없다. 권력을 행사하는 독단인은 자신의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을 배려하지만, 단독인은 권력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성찰을 시작하는 권능의 힘에 의해 자신을 배려한다. 단독인의 권능은 타인을 제압하는 권력을 휘두르는 손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내면을 통해 자란다. (p.174-175)

자기밀도가 분명한 사람들의 또 다른 욕구는 혼자 있는 것에 대한 욕구이다. 그것은 `은둔`과 거리가 멀다. 세상과 등을 지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나는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는데, 밀집된 혼란으로 인해 되돌아볼 수 없었던 나의 삶에 대한 생각을 혼자서 해내는 과정이 홀로서기이다. 분명 군집생활은 필요하다. 군집생활을 했기에 인간은 진화할 수 있었다. 군집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지 못하고 다른 종에 의해 절멸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같이 하기에 많은 것을 얻는다. 사회 분업으로 인한 편리성 증대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같이 한다는 것이 분명한 장점을 지니지만, 인간의 모든 장점을 같이 한다는 것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같이 한다는 것은 때론 스트레스의 원인이기도 하다.(p.190)

기꺼이 혼자가 되어 홀로서기를 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자폐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과잉화된 `일반화된 타자`와 거리를 두는 능력의 획득을 의미한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입고 있는 일반화된 타자가 입혀준 옷을 벗고 잠시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p.190)

반면 직업과 관련 없이 행할 수 있는 활동을 우리는 `취미`라 한다. 취미는 호구지책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채 개인의 기호에 따라 선택한 행동이다. 겉으로는 노동처럼 보이지만, 그 행동이 먹고사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취미일 수 있다. 고기 잡는 행위는 어부에게는 노동이지만, 샐러리맨이 주말에 고기를 잡으러 가면 노동이 아닌 취미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취미는 전적으로 개인의 기호에 의존한다. 어떤 취미를 가질 것인가 혹은 근본적으로 취미가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는 경제적 필요성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취미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기호에 따라 결정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취미는 자기밀도를 크게 높일 수 있는 영역이다. 자기밀도가 높은 사람은 대체로 취미를 가진 경우가 많다. 자기밀도는 높은데 취미조차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밀도가 매우 낮은 사람들은 의외로 취미가 없으면서도 삶을 그럭저럭 살아간다. 취미가 있는지 혹은 취미가 없으면 견딜 수 없는지는 자기밀도를 측정할 수 있는 일종의 바로미터이기도 한 셈이다. (p.198)

취미는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다. 취미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목표하지 않고,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 몰입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항상 타인과 경쟁해야 하고 타인을 압도해야 하기에, 타인이 내게 없는 것을 갖고 있을 때는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는 질투심이 생긴다. 그 질투심은 착한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취미의 세계에서는 각자 자신만의 목표를 향하기에, 진정한 취미의 세게에서는 질투가 사라진다. (p.198-199)

성별 위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보이지 않은 유리천장이 있는 상황 속에서 결혼은 여성이 커리어를 쌓아 가기에는 여전히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성공한 여성들이 미혼인 경우는 남성 미혼에 비해 훨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혼자 살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은 이들이 갖고 있는 경제적 자율성에 있다. 만약 경제적 자율성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들의 삶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능력 있으면 혼자 살아도 된다"는 성공한 여성과 같은 특별한 집단을 설명하는 틀로만 머물러 있을 경우 큰 문제는 없지만, 만약 이러한 상식적 주장이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자격 기준`의 담론으로 변화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혼자 사는 어떤 사람을 정당화해주었던 상식적 표현인 "능력 있으면 혼자 살아도 된다"라는 말이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능력주의 및 자격주의 담론으로 바뀌면, 능력이 없는 자는 혼자 살아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평가되는 한, 혼자 사는 것에 대해 논할 대 우리의 사유 관습은 또다시 `화려한 싱글`의 스펙트럼에 갇히게 된다. (p.230-231)

독거노인, 고독사가 왜 사회문제가 되는가? 이들이 가족이 없기 때문일까? 만약 독거노인과 고독사의 문제가 가족 외부에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면, 가족 내부에 있는 모든 사람은 독거노인과 고독사에 처한 사람들이 부딪히는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 독거노인과 고독사가 사회문제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혼자 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드이 자립적인 삶을 사는데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립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가족과 함께 하는 삶과 혼자 사는 삶은 절대적인 충족과 절대적인 박탈이라는 양극의 이미지에 의해 채색될 필요 없이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p.235-236)

모든 사람은 집단에 소속되려는 욕구만큼이나 개체가 되려는 욕구 또한 갖고 있다. 단독인의 사회란 달리 말하면, 모두가 혼자 살라고 선동하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를 통합하는 힘과 개체가 되려는 힘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 개체가 되려는 힘을 갖고 싶어 하는 개인이 가족 환경이나, 집단의 소속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p.236)

기본소득에 관한 논쟁은 그것이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 기본소득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노동의욕을 저하시키는 것은 아닌가와 같은 근본적인 대립에서부터 어떤 방식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인가, 얼마만큼의 기본소득이 필요한가 등에 대한 부수적 논쟁까지 다각도로 진행 중이다. 나는 사실 논쟁 중인 여러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기본소득에 주목하는 이유는 기본소득이 단독인의 사회에 대한 구상과 가장 긴밀하게 결합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p.238)

기본소득을 구성하는 아이디어는 세 개의 차원으로 구성된다. 기본소득은 모든 구성원ㄷ늘이 개인 단위로 자산조사나 근로조건의 부과work requirement 없이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소득이다. 기본 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다른 사회복지제도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가족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에 의한 공적 부조라는 측면이라는 점에서 단연 돋보이며, 1인 가구가 지배적인 형태가 될 앞으로의 사회에 적합해 보인다. 기본소득이 엄격하게 개인 단위로 지급된다는 의미는 "지역사회의 개별 구성원들이 기본소득의 수급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개인이 수령하는 급여가 그가 속해 있는 가구 유형과 무관하게 지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개인 단위의 지급일 때만 개인은 가족에 속해 있지 않아도 보호 받을 수 있으며, 또는 가족에 속해 있을지라도 개인의 자율권을 지킬 수 있다. 가족구성원 사이에서도 자율권의 결정 권한은 균형적으로 배분되어 있지 않다. 기본소득은 개인이 아닌 가족에 대해서도 불균형한 가족구성원 간의 교섭력을 보완하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p.238-239)

한편으로 기본소득은 어떤 가족의 구성원으로 태어났느냐와 상관없이 개인들이단독인이 될 수 있는 인큐베이터인 `자기만의 방`과 최소한의 소득을 운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한다. 또한 경제적 자립성이 없기 때문에 가족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 불량한 가족으로부터 독립할 자금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공유해야만 했던 개인에게도 기본소득은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독립자금이 없어서 학대받으면서도 집단을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 매 맞으면서도 가족을 떠날 수 없는 개인들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그것이 `기본소득`이든 `사회적 지분`이든 어떠한 구체적 형태를 지니든 상관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모두가 다 함께 단독인이 되기 위해서는 단독인을 위한 독립자금 역시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대서야 비로소 단독인이라는 홀로서기에 성공한 사람은 더 이상 위인이나 특별한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p.239)

국가나 집단은 개인을 대신하여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집단주의의 가장 큰 위험은, 개인을 대신하여 집단이 판단을 내리고 최종적으로 개인은 집단이 내린 판단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설계한다는 점이다. 집단주의에 의해 판단이 내려지는 이상, 개인의 삶은 표준적 삶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집단이 내린 판단을 순응적으로 따라한 사람, 집단이 내린 판단을 그대로 내재화한 사람은 성인이 된 후에도 내재화된 집단의 판단을 후세대에게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한다. 이미 내려져 있는 판단은 언제든 적응해야 할 대상이지, 왜라는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때로는 신기루일 수도 있는 이타주의만을 일방적으로 칭송하는 사회에서는 나를 위한 최소한의 자기 배려와 나만의 방에 대한 약간의 옥심조차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치부된다. 이런 사회에 순응한 개인은 자신을 사랑하는 최소한의 방법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증에 빠진다. 이 망각증이 지나치면, 개인은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나 개체의 고유성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마저 이기적인 탐욕이라 생각하며 자기 통제의 덫에 빠지게 된다. (p.249-250)

얼치기 이기주의자는 자신의 탐욕만을 알고 있기에, 그가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채택하는 방법은 경제적 이기주의이다. 경제적 이기주의는 시장 경쟁에서 자신이 유일한 승리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목표로 삼는다. 운이 좋거나 혹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 경쟁에서 유일하게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경제적 이기주의의 길은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적 이기주의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다. 모두가 승리자가 될 수 없다. 소수의 사람만이 승리자가 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이 길을 향해 자신의 인생을 모두 건 도박이나 다름없는 삶을 산다. 하지만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자기에 대한 배려와 자기만의 방에 대한 구체적인 욕구를 뼛속까지 알기에 자기를 탐욕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한다. 자기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p.251)

자기애를 회복하는 문제를 스피노자는 이기주의의 틀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상상이 가져다주는 기쁨이라 생각했다. 자기에 대한 관심이 항상 경제적 이기주의라는 결론을 가져다줄 필요는 없다. 또한 혼자 산다는 것이 곧 세상으로부터의 은둔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남는 문제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9칸트는 이를 윤리적 문제라 불렀다)이다. 은둔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홀로서기를 통해 자기 고유의 내면과 마주친 사람은 자신의 고유성을 또다른 고유성을 지닌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자신의 고유성에 대한 인정을 우리는 타인에게 강제할 수 없다. 강제라는 폭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타인에게 자신의 고유성의 고귀함을 호소하고 설득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호소와 간청이 설득이라는 결말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경제적 이기주의가 요구하는 개인이 타인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형식이 아니라, 서로가 목적이 되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p.255)

두렵다고 해서 힘겹게 얻은 자기만의 방과 자기에의 배려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해지는 길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힘겹게 독립을 이룬 사람이라면, 자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홀로서기에 성공한 또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 단독인의 사회는 홀로서기에 성공한 사람들의 `자기만의 방`이 서로 연락선도 닿지 않는 고립된 섬으로 흩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이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로 이어진 사회를 의미한다. 그 네트워크를 다른 단어로는 연대라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연대의 필요성을 민감하게 느끼는 두뇌의 촉수를 지니고 있다.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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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6-04-01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ㅎㅎ 저 이책 나중에 사려고 보관함에 넣어놨긴 했던 책이긴한데 저 읽어보고 싶어요. ^^;;

다락방 2016-04-01 18:41   좋아요 0 | URL
드릴게요!! 주소삼종셋트 비댓으로 알려주세요!! >.<

2016-04-01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04-01 21:39   좋아요 1 | URL
책이 회사에 있어서 다음 주에 보내드릴게요. 나중에 경상도 가면 소주나 한 잔 사주세요. 아니, 한 병 ㅋㅋㅋㅋㅋ

2016-04-02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6-04-01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좋죠!!

다락방 2016-04-01 23:31   좋아요 0 | URL
네 좋았어요. 기본소득에 대한 얘기와 경제적인 능력(?)에 대한 얘기 모두 좋더라고요.

2016-04-02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4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4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4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4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4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몬스터 2016-04-04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애를 회복하는 문제를 ...이기주의의 틀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상상이 가져다주는 기쁨이라 생각했다...라는 말에 힘을 얻어요.

다락방 2016-04-05 09:46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취미를 가졌다는 사실도 참 다행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끝의 시작 오늘의 젊은 작가 6
서유미 지음 / 민음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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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아가거나 가던 길을 계속가거나 더 좋은 길을 향하고자 할 때 그 모든 걸 멈추는 것은,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던 것보다 더 잘해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두려움에 밀려 주춤거려, 고작 이만큼밖에 못온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사는 것만이 건강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석현을 만난 뒤로는 달라졌다. 꿈을 꾸듯 살면 어떤가, 현실을 망각하고 가장 아름다웠던 때의 심정에 취해 살면 어떤가. 어떻게 살든 사랑 없이, 사랑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랑한다는 건 뜨겁게 살아 있고 싶다는 것, 상대를 향해 타오르고 싶다는 뜻이다. 석현은 닫아 잠근 문 안에 웅크리고 있던 여진을 흔들어 깨운 셈이다. (p.141-142)





소정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리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사랑이 자신을 구원하고 이 시궁창에서 건져 내 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결혼에 얼마쯤 기대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사랑에 매달리고 의지하는 자신을 진수가 부담스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짐작 속에서도 마음을 쏟고 자신을 잡아 줄 무언가가, 삶의 확실한 기반이, 결혼이라는 동아줄이 필요했다. 칼에 베인 것처럼 쓰라린 건 배신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책감과 열패감이 그녀를 두루 할퀴었다.
진수에게서는 밤이 깊도록 연락이 없었다. (p.137)

어떤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어떤 사랑은 쉽게 바닥을 드러내고 어떤 사랑은 흐지부지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 모든 걸 사랑이라고 불러야겠지.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소정은 자신에게서 떠나간 것이, 자신이 잃은 것이 사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p.137)

그 만남은 언제부터였을까. 그 여자가 눈에 들어와서 마음이 바뀐 건지, 소정에게 어떤 불만이 생겨서 틈이 벌어졌고 거기에 새로운 감정이 자리 잡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눈물이 나오지 않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걷기가 수월했다.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p.137)

진수의 문자메시지는 일요일 자정쯤에 도착했다. 만나서 얘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전화나 메일도 아닌 몇 줄의 문자메시지는 미안하다로 시작해서 미안하다로 끝을 맺었다. 그렇게 헤어진 뒤 며칠 동안 소정은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멍하게, 그러나 마구 헝크러져서 지냈다. 사랑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소정을 텅 비게 만들었고 진수가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은 내부의 회로를 뒤죽박죽 꼬아 놓았다. 상실감과 배신감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분리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 두 개의 감정 중에 자신을 더 괴롭히는 게 뭘까 집요하게 생각해봤다. 처음에는 배신감 때문에 생긴 구멍이 컸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을 묶어 주던 믿음과 사랑이라는 유대관계가 깨졌다는 게 더 마음을 괴롭혔다. (p.139)

그날부터 석현은 미용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어떤 연락이나 변명도 없었다.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일주일 동안 여진은 미용실 안에서 새벽까지 노크 소리를,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석현의 모습을 기다렸다. 바늘에 찔리거나 살짝 베인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연의 상처에선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손님의 머리를 말리다가, 고객 카드에 도장을 찍고 나서, 소파에 앉아 쉬며 커피를 한잔 마시다가 여진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내려다봤다. 석현과 비슷한 뒷모습을 보거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환부는 와락 벌어졌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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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제445호 2016.03.26
시사IN 편집부 엮음 / 참언론(잡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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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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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기 2016-03-3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라라가 남편 하버의 심장에 방아쇠를 당겼다면?
 
시사IN 제445호 2016.03.26
시사IN 편집부 엮음 / 참언론(잡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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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5호 시사인에 실린 '임재성(평화 연구자)'의 글 중 일부를 옮겨온다.



체벌을 당한 아이들의 감정을 조사한 한 연구에서, 그 어떤 아이도 체벌 이후 '반성'이나 '미안함'을 느꼈다고 응답하지 않았다. 체벌을 당한 아이들이 품었던 감정은 당연하게도 무서움·화남·끔찍함·창피함·외로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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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와 분노의 매가 다르다는 것은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다. 자신의 의도에 따라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 아이들에게는 맞는 이유가 사랑이든 분노든 다를 바 없다. (시사인 제445호, 임재성, <사랑의 매와 분노의 매, 과연 다른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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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6-03-2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학창시절은 평범하게 지낸 축에 속해서 그런지 어떤 체벌을 많이 받은 편은 아니였지만 몇번의 체벌은 기억이 나네요. 그 가운데서도 이 선생님이 정말 선생님 자신이 `분노`해서 때리는 건지, 정말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의 매인지는 구분 되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단순히 제 개인적인 경험이니 그런지 모르겠네요. 여튼 당시의 제가 그렇게 구분 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니 결국 평상시에 그 선생님이 얼마나 학생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냐에 따른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도 체벌의 방법이 육박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라면 그냥 이 선생이 `분노`해서 나를 때리네 라고 생각했지요(그렇게 매를 선사했던 선생님은 평상시에는 온화 하고 그래도 나름 학생들에 대한 애정도 많으셨던 분인데 예전 분이라 그러신 것 같네라고 지금은 생각되네요 ) 그래서 그런지 저런 이야기에 매우 공감이 가면서도 판단을 유보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시 생각해보니 제 성격에는 그렇게 매를 안들고 말로 했어도 알아 먹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선생님 말이면 무조건 들었던 `차칸??`학생이였다 보니...ㅋㅋㅋㅋ

다락방 2016-03-29 08:09   좋아요 0 | URL
저는 `사랑의` 매 라는 거 자체가 모순된다고 생각해요. 매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사랑일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너 잘되라고 그러는거야` 라든가 `너 잘못했으니 이러는거야` 라는 논리라면, 맞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뇌당할 수 있도록 하니까요. `아 잘못하면 맞는거구나` 라고요.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논리를 똑같이 행하게 되겠죠.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잘못했을 때 `너 잘못했으니 맞아야 해` 하고요. 결국 이렇게 폭력은 대물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폭력의 악순환이 일어나고, 부모에게 맞은 아이가 자신의 아이를 때리는 일이 발생하는 거고요. 잘못했으면 맞아야 한다, 이 논리 자체가 저는 논리 성립이 안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맞는 행위, 때리는 행위가 `사랑`일 순 없다고 생각해요. 자신들이 거기에 `사랑`이란 이름을 포장해도 결국은 `때리는` 거고요, 그 때리는 건 자기 기분, 자기 감정인 거죠. 사랑해서 그러는거야, 라는 건 자기 위로, 자기 만족이고요. 만약 정말로 `사랑의 매`라는 게 존재한다면, 사랑의 매가 올바르게 나아가게 하는 거라면, 그게 옳은 거라면, 왜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매를 들지 않을까요?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는 사랑의 매라는 이름을 가졌을지언정, 그것이 엄연한 폭력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옛날 선생님들 정말 많이도 때리셨죠. 와, 진짜 저는 여고였는데 남자 선생님이 학생 발로 차는 것도 봤어요. 중학교때는 선생님이 학급 여자에 머리를 자르기도 했고요. 뺨 때리는 건 기본이었죠. 뺨과 머리를 때리는 걸 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의 매일 수가 없어요. 그건 상대보다 자신이 더 위에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것 밖에 안된다고 생각해요. 일례로 같은 잘못을 했을 경우에 자신과 동등한 위치의 사람을 때리진 않잖아요. 회사 동료가 잘못했다고 그 잘못을 고치기 위해 때리진 않잖아요. 자신이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제자를 때리고 어른이 아이를 때릴 때는 맞는 자가 자신보다 약한 존재라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거죠. 그건 폭력이고요.

저도 가끔 조카가 말을 너무 안들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마음은 `이렇게 해서라도 말 듣게 하고 싶다`는 충동인 것 같아요. 그건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보여지고요. 그래서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08-3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말씀 100%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