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오늘의 젊은 작가 6
서유미 지음 / 민음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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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아가거나 가던 길을 계속가거나 더 좋은 길을 향하고자 할 때 그 모든 걸 멈추는 것은,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던 것보다 더 잘해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두려움에 밀려 주춤거려, 고작 이만큼밖에 못온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사는 것만이 건강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석현을 만난 뒤로는 달라졌다. 꿈을 꾸듯 살면 어떤가, 현실을 망각하고 가장 아름다웠던 때의 심정에 취해 살면 어떤가. 어떻게 살든 사랑 없이, 사랑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랑한다는 건 뜨겁게 살아 있고 싶다는 것, 상대를 향해 타오르고 싶다는 뜻이다. 석현은 닫아 잠근 문 안에 웅크리고 있던 여진을 흔들어 깨운 셈이다. (p.141-142)





소정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리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사랑이 자신을 구원하고 이 시궁창에서 건져 내 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결혼에 얼마쯤 기대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사랑에 매달리고 의지하는 자신을 진수가 부담스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짐작 속에서도 마음을 쏟고 자신을 잡아 줄 무언가가, 삶의 확실한 기반이, 결혼이라는 동아줄이 필요했다. 칼에 베인 것처럼 쓰라린 건 배신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책감과 열패감이 그녀를 두루 할퀴었다.
진수에게서는 밤이 깊도록 연락이 없었다. (p.137)

어떤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어떤 사랑은 쉽게 바닥을 드러내고 어떤 사랑은 흐지부지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 모든 걸 사랑이라고 불러야겠지.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소정은 자신에게서 떠나간 것이, 자신이 잃은 것이 사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p.137)

그 만남은 언제부터였을까. 그 여자가 눈에 들어와서 마음이 바뀐 건지, 소정에게 어떤 불만이 생겨서 틈이 벌어졌고 거기에 새로운 감정이 자리 잡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눈물이 나오지 않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걷기가 수월했다.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p.137)

진수의 문자메시지는 일요일 자정쯤에 도착했다. 만나서 얘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전화나 메일도 아닌 몇 줄의 문자메시지는 미안하다로 시작해서 미안하다로 끝을 맺었다. 그렇게 헤어진 뒤 며칠 동안 소정은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멍하게, 그러나 마구 헝크러져서 지냈다. 사랑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소정을 텅 비게 만들었고 진수가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은 내부의 회로를 뒤죽박죽 꼬아 놓았다. 상실감과 배신감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분리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 두 개의 감정 중에 자신을 더 괴롭히는 게 뭘까 집요하게 생각해봤다. 처음에는 배신감 때문에 생긴 구멍이 컸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을 묶어 주던 믿음과 사랑이라는 유대관계가 깨졌다는 게 더 마음을 괴롭혔다. (p.139)

그날부터 석현은 미용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어떤 연락이나 변명도 없었다.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일주일 동안 여진은 미용실 안에서 새벽까지 노크 소리를,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석현의 모습을 기다렸다. 바늘에 찔리거나 살짝 베인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연의 상처에선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손님의 머리를 말리다가, 고객 카드에 도장을 찍고 나서, 소파에 앉아 쉬며 커피를 한잔 마시다가 여진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내려다봤다. 석현과 비슷한 뒷모습을 보거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환부는 와락 벌어졌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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