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2016.4 - Vol.216
인물과사상 편집부 엮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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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기주: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감옥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방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감자 중에 이 음악을 아는 자는 없죠. 그런데도 모두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껴요. 배우지 않았어도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요.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인간의 권리고 그걸 막는 건 폭력이죠. 죄책감을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고요. (p.20)



발레와 오페라를 좋아한다는 은수미 의원의 말에 신기주가 저렇게 답하는데, 저 부분을 읽노라니 영화 <프리티 우먼>이 생각났다. 생애 처음 오페라 공연을 보던 그녀가 눈물을 흘리던 장면. 교양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홀로 눈물을 줄줄 흘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배우지 않았어도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라는 신기주의 말에 동의하는 이유다. 줄리아 로버츠는 그때, 아름다움을 느.꼈.다.

같은 이유로 영화 <타인의 삶>도 생각난다. 연극 배우와 감독의 삶을 감시하고 도청하던 비스토는(이름이 비스토 맞던가..), 어느날 감독의 피아노 연주에 진심으로 감동하고야 만다.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감동하고 제대로 표현하는 사람들을 나는 언제나 사랑해왔다.






은수미: 저는 사람이 삭제되는 게 견디기 어려워요. 그게 제가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이유죠. 감옥에 가면 사람이 삭제돼요. 저는 601번으로 불렸어요. 번호가 사람을 대신하죠. 그 사람이 뭘 좋아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지워져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감옥 같아요. 사람은 지워지고 연봉이 얼마고 집이 몇 평인 걸로만 기억되죠. 중원에 사는 사람들은 중원에 산다고 안 해요. 그냥 서울 산다고 해버리죠. 저는 그렇게 우리 지역이 삭제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건 사람의 존엄함을 말살하는 거니까요. 중원은 개발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개발 이익을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뿐이죠. 그런 역사가 주민들의 삶 속에 기록되어 있어요. 지금 저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다니고 있어요. (p.17)

은수미: 제가 <지젤>을 좋아해요. 발레와 오페라를 사랑하죠. 어머니는 제가 배 속에 있을 때 헨델의 <메시아>를 들었대요. 아버지가 보급 장교셨어요. 월남에도 보급 장교로 가셨죠. 달러를 꽂을 곳이 없을 정도였대요. 집안에 외국 물품이 넘쳐나고, 일제 산수이 오디오 세트가 있었죠. 어머니가 거기에 LP판을 틀어놓고 <메시아>를 들었던 거죠. 성장해서도 그런 문화를 좋아하는 취향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격렬하게 운동을 하고 있는 거죠. 그게 저한텐 엄청난 갈등이었어요. 동지들한테는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공연을 보러 가고 했어요. (p.19)

은수미: 사람들의 부글부글한 분노를 느꼈어요. 터뜨릴 대상이 필요한 거죠. 다들 안간힘을 쓰면서 견디고 있구나 싶었어요. 그분들의 마음을 얻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요. (p.22)

은수미: 이렇게 말하면 보통 재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사실인 걸요. 어렸을 때부터 유일하게 잘하는 게 공부였어요. 그래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7년 동안 간이침대 펴놓고 미친 듯이 공부했어요. 한편으로는 아이를 갖고 가정을 이뤄서 우주 안에서 내 자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으려고 했는데 둘 다 안 된 거예요. 저도 자리를 잡고 싶었던 때가 있었던 거죠. (p.24)

신기주: 그런데 왜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나요?

은수미: 세월호 사건 때문이었어요. 4월 16일의 그 무력감은 지금도 생생해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처음으로 아주 강력하게 세상을, 정치를 바꾸고 싶었어요. 당 내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뭔가 하자고 주장했죠. 결국 할 수 있던 건 11일 단식뿐이었어요. 제가 나선다고 당이 좋아해주는 것도 아니고 정치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세월호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곡소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죠. 몸이 아파서 단식하면 안 되는데, 단식이라도 안하면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국회의원직 그만두려고 생각하면서 고민이 시작되었죠. (p.25)

은수미: 사람들한테 물어보았더니 결론은 이랬어요. "의원직을 그만둘 용기가 있다면 재선에 도전하고 그만둬라. 네가 그렇게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힘을 가져라." 세월호 때도 그랬고 메르스 때도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그런 일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다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그래서 아주 위험하지만, 힘을 가지고 정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p.25)

신기주: 10시간 넘게 버틴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어요. 이야기 나누다 보니 알겠네요. 그걸 버텨내는 게 은수미다운 은수미인 거죠.

은수미: 욕심이 없어서 가능했어요. 필리버스터가 연출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신기주: 그런다고 공천 못 받는다고 한 분이 있었죠.

은수미: 공천을 생각했더라면 못 버텼을 것 같아요. 의원 총회에서 필리버스터를 지지한 사람은 6명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반은반대하고 반은 침묵했어요.

신기주: 현실적 판단이지 않습니까?

은수미: 그래서 반은 침묵하고, 반은 반대한 거죠. 찬성 6명 주에서 저만 유일하게 의원 총회에서 2번 발언했어요.

신기주: 그때 발언도 많이 회자되었죠.

은수미: 우리는 질 거다. 우리가 먼저 져야지 왜 국민더러 먼저 지라고 하느냐. 여기서 그냥 빠지지 말자. 도망가지 말자. 같이 무너져야 같이 일어설 수 있다.

신기주: 질 때 지더라도 싸우다 지자. (p.29-30)

은수미: 그걸 누가 듣겠어요. 허공에 대고 외치는 거죠. 저는 그저 시간을 벌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낮까지 버티면 그다음부터 다른 의원들이 잘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걸 누가 들으면서 시간을 잴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신기주: 그런데 그걸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은수미: 의원실에 돌아왔더니 다들 울고 있는 거예요. 지역 사무실에서도 사람들이 올라와서 울고 있고요. 노사모를 했던 부산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도 사무실로 올라와서 울고 있었어요. "이 지독한 것아." 이러면서요.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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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1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언니는 진짜 맘에 들어요 노동문제 관련해서 책도 써서 읽었거든요 이번에 국회의원이 안 되서 속상했어요 ㅠ 인물과 사상은 저도 무지 좋아하는 잡지여유 ㅋ 휴 걸어서 학원 오는 데 땀이 한가득이에요 ㅠ 그늘에 계셔유

다락방 2016-06-10 09:48   좋아요 0 | URL
이 언니는-은수미 의원이었군요. 저는 제 얘기 하는 줄 알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은수미 의원이 당선 되지 않아서 넘나 속상했어요 ㅠㅠ 되기를 꼭 바랐었는데 ㅠㅠㅠ
저는 사무실에 있으니까 더우면 에어컨 틀면 돼요. 루쉰님 더위 먹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요 ㅠㅠㅠ

루쉰P 2016-06-10 14: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다락방 언니도 맘에 들어요 ㅋ

저 역시 걱정마세요. 학원은 돈 받은 만큼 에어컨 하나는 시베리아 한 벌판에 있는 것처럼 틀어주고, 고시원은 19만원이지만 개인 에어컨에 방 창문 위에 떡 하니 붙어 있어서 ㅋ 가장 공부 적합한 환경에 있습니다. 결론은 공부만 하면 된다는 거에요 ㅋㅋㅋ (이게 제일 안 돼 ㅋㅋㅋ)

은수미 의원은 관심 있게 본 사람 중에 몇 안 되는 사람인디 당선이 안 되어서 정말 속상했어요. 공천도 이상한데다가 줘 버리니 이 분은 비례로 나와서 당선됐는 데 자기한테 공천 떨어진 지역구를 돌아다녔을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 정말 하는 짓들 보면 헐: 열 불나

암튼 다락방님도 이 더위 잘 버티세요 ㅎ

단발머리 2016-06-15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나 이 글을 못 읽었네요... 이제 봤어요.

은수미 의원 좋아요.
이 정도 사람은 있어줘야... 그래도 국회의원들 좀 예쁘게 봐주려 노력할텐데...
이번에 안 되서 아쉽네요~~

이 페이퍼 고마워요^^

다락방 2016-06-15 10:48   좋아요 1 | URL
아니, 놓칠 수도 있죠. 어떻게 다 꼼꼼하게 챙겨 읽겠습니까! ㅎㅎ

저도 은수미 의원 좋은데 당선 안되어서 너무 속상해요 ㅠㅠ 안타깝고 ㅠㅠ 당선되었으면 뭔가 바뀌어도 바뀌었을 것 같은데.. 다음 선거를 노려봐야 할까요. 대통령이 돼도 좋을것 같은데, 제가 꿈이 너무 크죠.. ㅠㅠ

clavis 2016-06-15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통령,저도 한 표♥♥

다락방 2016-06-15 11:03   좋아요 1 | URL
화이팅! 은수미는 대선출마하라!! ㅎㅎㅎ

clavis 2016-06-1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마하라!!♥♥

다락방 2016-06-15 14:56   좋아요 1 | URL
우리의 소중한 한 표를 은수미에게!!

clavis 2016-06-15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수미에게!!
ㅎㅎ
 
에밀리 비룡소의 그림동화 34
마이클 베다드 글, 바바라 쿠니 그림, 김명수 옮김 / 비룡소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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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뭐예요?"
내가 물었습니다.
아빠는 시든 이파리를 손바닥 위에 놓았습니다.
"엄마가 연주하는 걸 들어 보렴. 엄마는 한 작품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데, 가끔은 요술 같은 일이 일어나서 음악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진단다. 그게 네 몸을 오싹하게 만들지. 그걸 설명할 수는 없어. 그건 정말, 신비로운 일이거든. 말이 그런 일을 할 때, 그걸 시라고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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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2016-06-0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동문제 관련해서 꼭 등장하시는 은수미 전 의원님. 개인적인 은수미씨가 궁금해서 검색하다 이 블로그 글을 보았어요 ㅎㅎ
인터뷰 내용 중 `삭제`라는 표현과 아름다움에 대한 의견이 와닿아서 몰래 혼자 보려고 공유해 갑니다 :)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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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누군가가 늘 신경을 써주었으므로 내가 여기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반드시 그래야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이 그랬을 줄도 몰랐지만, 누군가가 나를 내치지 않았던 시간이 존재했으므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럴 것이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계속해서 너를 지켜보고

당신이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계속해서 한 방향이며 목적지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너는 길을 잃지 않을 거야, 내가 너의 손을 잡고 있을테니.

당신이 길을 잃을 것 같을 때마다 고개를 들면, 내가 항상 손에 잡힐 거에요.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다라간은 수첩을 잃어버린 사실도 아예 잊었을 터였다. 수첩에 적힌 이름들을 떠올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주, 다라간은 수첩 내용을 복원하고자 백지에 이름들을 내리 적어보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종이를 찢어버렸다. 그 이름들 가운데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속속들이 외우고 있었으므로, 주소며 전화번호를 적어둘 필요가 없었다. (p.12)

그가 [그 여름의 어둠]을 수배 전단을 작성하는 마음으로 썼다는 걸 왜 그녀에게 털어놓지 않는가? 운이 조금 따라준다면 이 책은 그녀의 눈에 띌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녀에게서 기별이 올 것이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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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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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말했어요. `면도하고 이발하고 싶어. 깨끗해지고 싶어.` 그래서 이발사를 불렀어요. 매니가 머리를 가누지 못해서 이발하는 데 한 시간도 넘게 걸렸죠. 이발이 끝난 뒤 나는 이발사를 문간까지 배웅하고 이십 달러를 줬어요. 침대로 돌아와보니 매니는 숨이 멎어 있었어요. 죽었지만 깨끗해졌죠." 이 말을 하고 난 다음 그녀는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갑자기 이야기를 멈췄고, 나도 어쨌든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이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와 만난 건 그때 한 번뿐이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난 그 시간을 지나왔고, 내가 그랬다는 게 기뻐요. 그 사 년의 시간을요." 그녀가 말했다. "매일 그리고 밤낮으로 말이에요. 나는 그의 벗어진 머리가 독서등 아래서 빛나는 걸 보았죠. 매일 저녁식사가 끝나면 거기 앉아 책을 읽으며 신중하게 밑줄을 긋고 잠시 멈춰 생각에 잠기고 스프링 노트에 문장을 적는 그를 보면서 나는 생각하곤 했어요. 저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요." (p.201-202)

사 년의 시간을 기억하며 오십 년을 산 여자. 그녀의 전 생애가 그 사 년에 의해 규정되어 있었다. (p.202)

우리가 떠난 후 뒤에 남은 이들이 늘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그리 놀랄 일도 아닌데도 우리는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동시에 잠시 감동을 느낀다. 또한 늘 변함없는 좁은 장소에서 평생을 보내면서도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느기지 않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p.40-41)

"오힙대 후반에 첫 장편을 쓰다니. 백혈병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 소설이 그를 죽였을 거예요."
"왜요?"
"그 주제 때문에요. 프리모 레비가 자살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후유증 때문이라고들 했어요. 난 아우슈비츠에 대해 글을 써서라고, 마지막 저작에 너무 쏟아부어서라고, 공포감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고민해서라고 생각했죠. 그런 책을 쓰기 위해 매일 아침 눈을 떠야 한다면 누구라도 죽고 말았을 거예요."
그녀는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p.19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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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4-20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제일 사랑하는 바로 그 작품...
아, 나도 다시 읽고 싶어요^^

다락방 2016-04-21 08:18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페이퍼 보고 이 책을 샀고, 그리고 읽은 거에요. 필립 로스는 원래 호감작가이기도 했고요. 사실 저는 일흔 넘은 노인이 사십살 연하인 여자에게 욕망을 느낀다, 사랑을 느낀다, 는 것에 흥미가 일어 보기 시작했는데 정작 책을 읽고나자 마음을 끄는 부분은 따로 있더라고요. 위에 인용한 것처럼, 나이 많은 작가와 자신의 젊은 시절에 4년을 함께 보낸 여자, 그녀가 그 후로 오십년을 거기에 매어 사는 부분이요. 아니, 그 추억을 곱씹으며, 이미 죽은 남자와 늘 대화한다고 하는 것들이 참 인상깊었어요. 요즘엔 이런 이야기들이 참 눈에 들어오네요. 예전부터 있었는데 제가 잘 몰랐던건지 모르겠지만, 얼마전에 읽은 파스칼 키냐르 작품에서도 너무 사랑한 남자를 평생 그리워하며 계속 걷기만 하는 여자가 나왔는데, 이 책 필립 로스의 책에도 사 년을 함께하고 오십년을 추억하는 여자가 나와요. 저는 [유령퇴장]이 딱히 좋진 않았거든요. 책장이 잘 안넘어가더라고요. 그렇지만 사 년의 시간을 기억하며 오십 년을 산 여자가 참 인상깊어요.

웽스북스 2016-04-21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뭔가 압도적인 한문장이네요

다락방 2016-04-21 10:53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끄덕끄덕)
 
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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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을 떠나기 전 병든 몸으로 들것에 실려 교실에 왔던 날, 선택의 그날, 그녀는 얼마나 상심했을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떠올렸던 모습과는 달라졌지만, 그녀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여태까지는 그녀가 아팠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심해서 병이 난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베개를 받치고 거기에 누워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해맑게 자신의 멍청이 아들을, 매력적이고 유쾌하지만 멍청한 아들을 선택하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이제야 딱딱하게 굳은, 늙고 암울한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그녀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다.

그리고 우리 십이인 위원회가 지금까지 어떤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적절한 이름을 붙여 표현하는 걸 끝끝내 싫어했던 이유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데로드에 대해 불평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이유를 분석하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십이인 위원회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어.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뽑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그를 선택했으니까." 우리 중에 누구라도 데로드보다는 잘했을 것이다. 천성이 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데스트라를 존경했으며, 그녀가 원한다고 판단되는 일들을 했을 것이다. 굼뜨고 결단력이 없는 나조차 그보다는 더 잘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에게 낙담을 안겨줬다. 우리 잘못이었다. 우리 책임이다. 도시들을 위해 노력하느라 늘 분주하고 우리가 이룬 것들을 자랑스러워했던, 이름 높은 십이인 위원회. 도시들이 몰락한 원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에게 있었다. (그것의 이유, p.25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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