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아마도 6학년 쯤이었던 것 같은데, 학교 끝나고 피아노 학원에 갔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단독주택이 모여있는 동네에 살았는데, 학원에서 우리 집으로 좀 더 가깝게 가기 위해서는 바보골목 이라는 곳을 지나야 했다. 좁은 골목이었는데, 그 골목의 집에 바보가 살아서 사람들이 바보 골목이라고 불렀던 곳이었다. 환한 낮이었지만 그 골목엔 인적이 드물었는데,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 길을 걸으며 집에 가고 있는데, 저기 더 작은 골목 벽에 친구의 여동생이 기대어 서있었다. 친구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동생과 더 차이 많이 나는 아주 어린 남동생이 있었는데, 당시에 그 여동생은 6-7살 정도로 기억한다. 이 어린아이가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거다. 나는 저 어린애가 왜 혼자서 저기에 기대어 서있지? 하고는 아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친구와 나도 친했고 그 가족 모두와도 아는 사이었다. "**아!" 하고 부르니 아이가 고개를 들고는 나를 봤다. 그리고는 "언니!" 하더라. (여기까지 쓰는데 또 울컥한다) 나는 "너 거기서 뭐해?" 하고 가까이 갔는데, 아이가 서있던 맞은편 벽에 당시에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오빠가 똑같이 기대어 있더라. 저 사람은 누구지, 하고는, 그런데 저 사람하고 이 아이가 볼 일은 무엇인가,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뭔가 잘못된 것 같아서 아이의 손을 잡고 '가자' 했다. 아니는 내 손을 잡고 나를 따라왔고, 나는 어쩐지 그 오빠가 나를 따라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그냥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나는 아이랑 걸어가면서, 너 저기서 뭐했어, 했더니, 오빠가... 고기 준다고 따라오라 그래서.... 갔는데..... 천천히 아이는 말을 이어갔다. 바지를 벗으라고 했어... 라고 하는 거다. 아이는 그 어린 마음에 어쩐지 안될 것 같은 생각 때문인지 그걸 행동에 옮기지 않은 채 있었던 거고, 내가 그 참에 아이를 본것이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스무살이었고 아직 핸드폰을 쓰지 않았던 때였는데, 밤에 친구들을 만나러 가려는데 내가 지나치는 길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렸다. 옆은 공사현장이었고 어두웠다. 나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일일지 짐작이 되어 누군가 어른 남자를 발견하게 되면 도와달라 말할 생각으로 앞을 향해 뛰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뛰다가 저 여자에겐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뒤를 돌아 여자 비명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무서웠다. 어쩌면 그 남자가 나까지 공격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당시 내가 생각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도망치는 것이었다. 달리면서 나는 내가 간다는 걸 알리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렸다. 여자가 우는 소리가 들렸고 도착해보니 남자는 없고 여자 혼자였다. 여자는 옷깃을 꽉 붙잡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물으며 밝은 곳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 여자는 내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같은 반 이기도했다. 몇 년 후 친구와 까페에 들러 차를 마시려는데, 그 때 그 동창이 까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더라. 그 때 그 동창이 내게 말했다. 그 당시에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너였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정말 고마웠다고. 사실 그 일이 있은 후,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혼자 떨면서 나는 그 다음날부터 얼마간 학교를 가지 못했다.




내가 직장인이었을 때, 이건 몇 년전의 일이다. 다른 부서에서 성추행이 있었다. 나보다 직급 높은 남자가 가해자였다. 그 남자가 그러는 것을 여러차례 들었는데 이번엔 더 정도가 심한 거였다고 했다. 나는 그 부서의 가장 직급 높은 여자에게 인터폰을 해서 '그것을 하지말라고 다같이 말해라'라고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본인이 싫다고 확실하게 말해야죠. 싫다고 확실하게 말하면 안해요' 이러는거다. 하는수없이 나는 그 부서로 내려가 직급있는 여직원들을 임원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임원에게 가해자를 불러달라 했다. 임원은 아직 무슨 일인지 모르는 상황. 나는 가해자가 들어오고나자, 이 사람들 앞에서 확실히 말하겠다, 한 번만 더 오늘 같은 일이 있으면 가만있지 않겠다, 일 그만두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하는 내내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내가 잘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가 계속 떨려나왔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내 자리에 돌아왔는데 그 후에도 계속 떨렸다. 손이, 몸이 떨렸다. 떨면서, 내가 왜 떠는지를 모르겠더라. 왜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떠는거지?






어제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를 뉴스룸에서 보았다. 평소에 그 시간에 집에 잘 있지도 않고 뉴스도 잘 보지 않는 요즘이었는데,  보게 됐다. 피해자들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 나왔다고 말하는 서지현 검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엄마, 저렇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서지현 검사가 잘못한 게 아닌데,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왜 우리의 목소리가 떨려야 하는걸까. 오늘 아침에도 엄마는 '그 검사 정말 얼마나 용기를 냈을까' 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안다.



나는 이것말고도 무수히 많은 성추행과 성폭행의 경험을 알고 있다. 누군가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어쩔 수 없이 연인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는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몇 번이나 숨을 참아야 하는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안다.




우리는 당신이 그 자리에서 말하기까지 그 긴 시간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안다. 말하는 그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용기를 끌어모아야 했을지 안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어 고맙다.

서지현 검사에게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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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1-30 1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뉴스룸 봤는데, 이어폰으로 설거지하며 듣다가 울컥해서는 설거지를 멈쳤어요.
검사라는 자리에서도, 여자는 여자일 뿐이어서, 그렇게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하고,
오히려 불이익을 받아왔던 걸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왔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하는데.......

다락방님의 오늘 글, 고마워요.

서지현 검사에게 지지와 연대를 보냅니다.
용기를 내 줘서 고맙다고 꼭 말하고 싶어요.

다락방 2018-01-30 10:45   좋아요 2 | URL
지금은 책에 쓰긴 했지만, 제가 이 공간에 제 성추행 피해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죠. 그 때 그 글을 저녁에 적어두고는 밤에 한 숨도 못잤어요. 다음날 아침 눈뜨자마자 그 글을 감췄었어요. 저도 그 글을 쓴 이유가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를 말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말을 하는 게 왜그렇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요. 저는 잠깐 공개했다 감췄는데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 서지현 검사는 얼마나 많은 용기를 끌어모았을까요. 그리고 지금 또 얼마나 많은 말들에 시달릴까요. 떨리던 목소리가 내내 귀에 남아 있어요.


2018-01-30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0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공개 2018-01-30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지현 검사님과 다락방님께 지지와 연대를 보냅니다. 고마운 마음도 함께 보냅니다.
다른 모든 성범죄 피해자들에게도 항상 지지하고 연대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락방 2018-01-30 11:04   좋아요 0 | URL
지난번 만남에서 jsshin 님이 하신 말씀도 생각났어요. 그 때 내가 더 잘했더라면 내 다음에 들어오는 여직원들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했던 말이요. 왜, 가해자가 아닌 우리가 책임감을 느끼고 더 잘해야 한다고 계속 다짐하게 되는걸까요? 너무 속상합니다. 하아-

별이랑 2018-01-3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데 왜 눈물이 나는 건지 모르겠네요.
가해자들에게 벌을 주는 것은 중요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위로인것 같아요. 잘못한게 아닌데 청심환을 먹어도 멈출 수 없는 떨리는 그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플지...네, 우리는 알고 있죠. 공감합니다.

다락방 2018-01-30 11:11   좋아요 1 | URL
저도 어제부터 여러차례 계속 눈물이 나려고 해요. 잘못한 게 아닌 피해자가 계속 떨어야 되는 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사실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텐데요. 왜 잘못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떨려야 할까요. 가해자들에게 벌을 주는 게 피해자를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가해자에게 벌을 주어야 피해자가 ‘저 사람이 나쁜 거다‘라는 걸 알 수 있을테니까요. 그게 안되고 있어서 피해자들이 여전히 계속 아프고 힘든 것 같습니다. 세상이 좀 달라질 수 있을까요?

꿈꾸는섬 2018-01-30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울컥하게 돼요.
좋은 글 감사해요.
저도 지지와 연대를 보냅니다.

다락방 2018-01-30 14:05   좋아요 0 | URL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오기는 할까요. 언제나 더 나쁜 소식들이 터져나와서 끔찍해요.

비연 2018-01-3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고 지지를 보내고...
그래서 이 모든 악몽들이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없어져야 해요. 그 때까지 끝없이 끝없이 애써야 한다고,
그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이제 얘기가 터져 나왔으니 밀어붙여야 한다고
부들부들 떨면서 결의를 다지게 되네요.

락방님의 글 너무 감사요. 그 결의가 바래지지 않도록 우리 서로 서로 공감하고 노력하고 얘기하고 그래요.

근데, 참 속상합니다. 이런 얘기를 피해자가 직접 방송에 나와서 애기하는 어려움을 겪을 때까지 놔두다니.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을. 그래야 이런 일들에 대한 인식이 깨이고 차츰이라도 없어질 것 같아요. 불끈.

다락방 2018-01-31 09:01   좋아요 0 | URL
법에 호소하고 그 법이 피해자의 얘기에 귀 기울여줬다면 피해자가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얘기하는데까지 오지 않아도 됐을텐데요. 너무나 가해자 위주의 판결들이라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비연님 말씀대로 참 속상하네요. 반드시 처벌을 내려서,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기 마련이라는 걸 반드시 알려서, 피해자를 위로하고 앞으로 일어날 범죄도 예방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머큐리 2018-01-3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지현검사가 중간에 사퇴하는 일 없도록 해야죠
피해입은 자가 조직을 떠나야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잖아요...
락방님과 같은 마음으로 지지하고 연대합니다

다락방 2018-01-31 09:03   좋아요 0 | URL
중간에 사퇴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게 얼마나 힘들까, 저도 어제 하루종일 생각했어요. 이런 일에 있어서 사실 자기 조직을 떠나는 게 지키는 것보다는 덜어렵겠죠. 저도 서지현 검사가 중간에 사퇴하는 일 없이 잘 지켜내기를 바라고, 멀리서나마 힘을 보내고 싶어요. 제 힘이 닿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시이소오 2018-01-30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입니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에 힘입어 이땅에서도 미투 운동으로 활활 번지기를.

다락방 2018-01-31 09:05   좋아요 0 | URL
해시태그를 달고 문단내 성폭력과 공연예술계 성폭력, 오타쿠내 성폭력등이 SNS 에서 이미 활발하게 운동하고 있었고 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있었어요. 이제 검찰내 성폭력고발도 여기에 함께하게 되겠죠. 아무쪼록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많이 힘들겠지요...

카스피 2018-01-3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저도 서지현 검사의 용기에 지지를 보냅니다^^

다락방 2018-01-31 09:06   좋아요 0 | URL
네!

2018-02-10 0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