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페미니즘과 민주주의] 강의는 서민 교수님께서 하셨다. 19:30 부터 시작하는 강의라 혹여 졸리진 않을까 싶었는데, 그간 강의를 많이 하셨기 때문인건지, 슬라이드를 넘기면서 아주 재미나게 강의해주시는 바람에 졸릴 겨를이 없었다. 재미있게 남성이 본 남성에 대해 얘기를 들었는데, 아마도 이 강의 자리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개인적인 메세지도 있는 것 같았다. [까칠남녀]에 출연하며 '생계형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고 있다는데, 그 점이 몹시 서운하다 하셨다. 본인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게 너무 속상하다고. 게다가 본인은 홍대에 건물을 갖고 있는 건물주인지라 페미니즘을 안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방송을 통해 자신이 생계형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게 정말 서운하다 하셨다. 또한, 누군가는 학창시절 친구가 없을 때 여자애들이 잘해줘서 본인이 페미니스트가 됐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셨다. 어릴때 자신을 외면할 때는 남녀가 없었다고, 남녀 모두 자신을 외면했다는 얘기였다.
처음 강의 시작이 외모비하, 외모평가에 대한 거여서 이 강의는 어디로 가려는가, 했는데, 결국 성형한 여자를 오히려 욕하는 사회에 대해 이어가시더라. 그러다보니 오히려 설득이 잘 되었다. 개인으로서도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직업을 갖기 위해서도 여자는 '얼굴을 고치라', '살을 빼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이런 사회에서 성형을 하면 또 '성형미인'이라고 욕을 한다는 거였다. 내가 페미니즘을 알기 훨씬 전에 나 역시 성형한 사람에 대해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해 그들을 폄하했었던 사람인지라, 교수님의 말씀이 뭔지 알겠더라.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점점 더 내 자신에 대해 반성할 일이 많아진다.
사실 강의보다는 강의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질문하는 게 더 좋았다. 질문이 아주 많이 쏟아졌는데, 대체적으로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한남이 자신의 아버지란 얘기였다. 아버지 보기가 불편하고 아버지의 행동이 다 너무 거슬린다는 것. 나 역시 그랬다. 일전에도 페미니즘 강의 들으면서 사람들이 아버지와 안좋은 사이에 대해 말하곤 했는데, 나 역시 어릴 때부터 맞닥뜨린 한남이 바로 내 아빠가 아닌가 싶다. 내 아빠는 다른 아빠에 비해 애정표현을 잘 하시고 가족을 끔찍이 위하시지만, 집안일에 많이 참여하시지만, 남녀의 성역할에 대해 고정관념이 확실한 분이시다. 지금은 엄마와 내가 계속 뜯어 고치려고 엄청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조금이나마 변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한 남자사람의 질문이 인상깊었다. 그는 자신이 이십대 후반이며 백수이고 페미니즘을 알고싶고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동성의 남자친구들 무리에서 자신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하기가 두렵다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말하지를 못하겠고, 지금 막 공부를 시작한 페미니즘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서 답답하다는 거다. 아, 저 사람은 지금 저 자리에서, 뭔가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고 그 길이 혼자여서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민 교수님은 이에 대해 '쪽수를 늘려야 한다'고 답하셨는데, 나는 그 대답이 시원하지 않다 여겨졌다. 쪽수를 늘리는 거야 너무 당연한 답이고 쪽수를 늘리는 방법에 대해 얘기해줘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나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얼마나 힘들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 이 자리만 하더라도 젊은 남자들이 많이 와있지 않은가, 내가 페미니즘 강연 들으러 갔을 때 남자를 거의 보지 못했었는데 여기 이 자리엔 이렇게나 많이 와있다, 지금처럼 계속 쪽수를 만들 가능성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관심을 갖고 여기에 온 사람들이니 '내 쪽수'가 될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계속해서 내 쪽수가 되어줄 사람이 있는 쪽으로 향하다보면 내 쪽수가 많이 생기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대응하기가 한결 낫지 않겠는가, 이런 강의를 듣는 것도 한 방법이고, 스터디 모임을 찾아보아도 될 것이고, 인터넷서점 알라딘에만 가더라도 페미니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본인의 글을 써보면 이야기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그러나 연이은 질문에 밤이 점점 깊어갔고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차마 말하지 못한 채로 강의를 끝내야 했다. 아, 저 말들을 꼭 해주고 싶었는데, 저 사람에게 외롭지 않게 갈 수 있다고 뭔가 격려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 하고 있는데!!!
마침 강의 후 서민 교수님이 저자 싸인을 해주고 계셨고, 내 친구는 거기에 줄을 서 있었고, 그렇게 나는 싸인 받을 친구를 기다리다가 강의실에 있는 정수기 앞에서 그 남자사람을 똭- 맞닥뜨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간절하면 하늘에 닿아 전 우주가 나를 도와주고...(응?)
나는 그 남자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까 질문하신 거 잘 들었어요, 하고.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혹시 인터넷서점 알라딘 아세요?"
그는 안다고 했다. 거기 들어가서 페미니즘 책 검색해보면 그 밑으로 아주 많은 글들이 달려있는데, 거기에 페미니즘 공부하시는 분들 많아요, 여자분들도 많고 기혼자들도 있고 젊은 남자분들도 많아요, 들어가보시면 아마도 쪽수 만들기에 좀 더 쉽지 않을까요? 라고 했더니, 그는 고맙다고 내게 말하면서, 안그래도 페미니즘 책도 읽고 글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속이 다 씨원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편으로는 또 '오지랖이다 오지랖 오지라퍼...' 하고 스스로에게 수천번 얘기했지만.
그렇게 그와의 짧은 대화가 끝나고 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1층 복도에 그 남자가 또! 보이는 거다. 그런데 이번에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강의는 혼자 들으러 왔던데, 어느새 여자사람 두 분이 그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들리는 대화로 추측해보자면, 공부하는 거 힘들지 우리도 공부하고 있어, 우리 함께 열심히 공부하자, 같이하자, 의 내용인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주고받는 것 같았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가 괜히 오지라퍼였어, 내버려둬도 저렇게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줄 것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놈의 오지랖은 정말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오지랖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그래도 오늘 칠봉이한테 이 얘기를 하는데 내 말을 듣기도 전에 '또 오지랖 부렸구먼' 하면서 큭큭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맞다, 내가 그랬다!!!
강의에서 교수님은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페미니즘의 도전》에 엄청 밑줄을 긋고 읽었다고 하셨다. 너무 좋은 책이고 큰 깨달음과 가르침을 받았다고, 두고두고 읽어야 할 책이라고. 그러면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대해서는 '학을 떼게' 만들었다 하셨는데, 무슨 말인지도 어렵고 상,하권 각자 500페이지가 넘어서 아주 읽기 힘들었다는 거다. 나는 이 책을 사서 며칠 전에 받고 아무데나 펼쳐봤는데 글씨가 너무 촘촘해... 뭔가 전공교재의 느낌? 아아, 내가 이걸 읽을 수 있을 것인가....하고 약간 멀어지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어제 서민 교수님이 이 책이 힘들다, 학을 떼게 만들었다, 하시니까, 오호라, 어쩐지 더 읽어보고 싶어지는 급욕망이 생기는 거다. 나는 이 책을 같이 읽기로 한 청년에게 강의 중에 문자를 넣었다. 이 책 당장 내일부터 읽자!! 하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집의 방향이 달라 각자 헤어져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데, 강의를 같이 들었던 친구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왔다. 아까 서민 교수님 강의중에 나온 저자 이름이 혹시 뭐였는지 기억하냐는 거였다. 서민 교수님이 얘기한 저자가 많아 리베카 솔닛? 하고 되물으니 아니, 남자였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아, 서민 교수님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강준만!! 하고 답을 보냈더니, 맞다고 그 사람이라고 하더라. 친구는 아마도 강준만에게 관심이 생겨 강준만에 대한 책을 검색하고 읽어볼 생각을 할 것 같다. 나는 이게 강의 혹은 공부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했다. 궁극적인 역할도 바로 이거라고 생각했고.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갖고 둘러보게 만드는 것. 공부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또 불러내고, 그 다른 하나가 저쪽 다른 하나를 또 불러내는 거다. 일전에 내가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언어학도 관심이 생기고 정치 경제학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는데(너무 늦게 깨달은건지도...) 공부가 그래서 이렇게나 좋은 거다!!!
음..비블리아 고서당 7 에 대한 얘기를 하려 했는데, 다른 얘기를 너무 길게 해서 그 얘기는 다음에...패쓰.......
아, 그리고 마태우스님 새 책이 나왔더라. 이번엔 무려 '독서'에 대한 책이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서민 교수님은 나와 친한데(엣헴-), 나랑 친한 분이 페미니즘과 독서에 관심이 있다는 게 나는 진짜 정말이지 너무 좋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친하게 지낼 수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아까 질문했던 남자사람에 대해 다시 얘기하자면,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혹은 관심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풀어내는 것이 살면서 아주 많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그런 과정이 필요하고 함께할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남자사람이 '같이 말할 사람이 없어 답답하다'고 했던 게 어떤 건지 너무 잘 알겠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런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굳이 찾아 나설 필요까진 없겠지만, 내게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내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페미니즘이든 독서든 혹은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뭐든, 정보를 공유하고 느낌을 얘기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건 너무 소중해서,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고단한 삶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많다면, 나는 더 단단해질 수 있을 것이다. 쪽수 많은 게 반드시 답은 아니겠지만, 쪽수가 많은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알라딘은 그런 면에서 나에게 여러가지로 충족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책을 읽는 것도 좋고 그 감상을 글로 써내는 것도 좋은데,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준다. 나 스스로 글을 쓰는 게 스스로의 감정 표현을 위한 수단인데, 그 수단이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도 되니, 이 얼마나 좋은가!
아직 서민 교수님의 《서민 독서》책을 읽지 않아 어떤 이야기가 실려있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독서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아주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거는 진짜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아무쪼록 페미니즘 강연에서 질문했던 저 젊은 남자사람도 알라딘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자신의 쪽수를 늘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쪽수를 늘려가며 살 수 있다면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을텐데.
오지랖 떠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