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동안의 감정과 또 읽고나서의 감정에 대해 적고 싶은데, 무얼 어떻게 적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책장 한 장 한 장마다 깊은 사색과 고민, 성찰이 느껴지는데, 이게 가능하다는 게 너무 놀라워서, 그 자체에 감동하게 된다. 매번 '똑똑한 여자 너무 좋아' 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 말 자체가 가볍게 느껴진다. 많이 공부하고, 알려고 노력하고, 관심있게 둘러보고,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걸 글로 풀어내는 모든게 리베카 솔닛에게 가능했다. 아, 더 어떻게 말해야하지.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면서 어머니와 자신 사이의 갈등과 어머니의 병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삶, 그것을 돌아보는 과정에 살구와, 거울, 얼음 등을 가져와 연결시킨다는 게, 내가 읽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고 이렇게 적는데도 소름이 끼친다. 뭐 이렇게 대단한 작가가 다있지? 그러니까 이 책이 얼마나 좋으냐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르면서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거다.
매 장이 다 놀라운 이야기들로 가득하지만, 나는 체 게베라와 나병 환자들에 대한 부분에서 아주 많이 놀랐다. 그러니까 내가 너무나 무지했던 '나병'과 거기에 자연스레 따라오며 연결되는 '고통'이란 것에 대해서.
나를 놀라게 한 사람은 그 할머니가 아니라 당시 나의 남자친구였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가 나병 환자들의 손과 발을 상하게 하는 건 정작 병 자체가 아님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나병은 신경을 짓눌러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만들 뿐이고, 그렇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면 환자들은 그 부위를 돌보지 않게 된다.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환자 본인이다. 스스로가 제 손가락과 발가락, 발, 손을 베이고, 화상을 입고, 멍들게 하고, 벗겨지게 하다가, 결국 그 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p.151)
고통의 역할이라고 해야할까. 우리가 무언가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 그러니까 손과 발을, 입을, 머리를 보호하려고 하는 건,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이고, 바꿔 말하면 고통을 느끼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보호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이 당연한 것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살다가, 이 나병의 증상에 대한 언급을 읽으면서 나는 새삼, '고통은 뭐지?' 하는데 생각이 미친거다. 그렇다면 우리가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고통은 필요한 거란 말인가, 라는 생각. 지키기 위해서 고통이 수반된다는 건가. 나병 환자들의 손과 발을 상하게 하는 게 병 자체가 아니라, 감각을 느낄 수 없어서라니,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돌보지 않게 된다니... 이 부분이 내게는 너무 충격적인 거다.
고통, 뭐지?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 않는다.' 당시 나의 상황에 놀랄 만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 오래된 지혜를 새롭게,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재확인한 나는 나병과 고통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p.152)
나병과 고통에 관한 글을 찾아 읽던 리베카 솔닛은 그것을 감정이입으로 연결해 글을 써낸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로에게 해 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 그 사람 혹은 그런 사람들은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그런 감정이입이 차단될 수도 있다. 사회 전체가 자신은 경계에 있는 소수자들과 무관하다고 여길 만큼 무감각해지도록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마치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맺은 인간적 관계를 지워 버리는 사람들이 있듯이 말이다.
감정이입 덕분에 당신은 고문, 배고픔, 상실의 느낌을 상상할 수 있다. 당사자를 당신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통을 당신의 몸이나 가슴, 혹은 머리에 새기고, 그다음엔 마치 그 고통이 자신의 것인 양 바능한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신체적 고통이 자아의 신체적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신적 자아의 한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다. 그러니까 사랑은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사랑은 끊임없이 뭔가를 덧붙여 가고, 가장 궁극적인 사랑은 모든 경계를 지워 버린다. (p.157-158)
나병과, 고통과, 감정이입과, 결국은 확장된 단계인 사랑에 대한 글쓰기라니. 매 장마다 내게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나도 이런 글쓰기가 가능할까? 몇 번이나 생각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내가 내게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아니' 였다. 이런 글쓰기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새삼 리베카 솔닛이 있어서, 마사 누스바움이 있어서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너무 멋지다 이 사람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이라 해야할까, 너무 좋아서 뒤로 넘어갈 것 같았던 부분은, 리베카 솔닛이 어머니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고 또 아픈 남자친구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다 그랑 헤어졌을 때, 그러니까 모든 상황이 본인에게 절망적이라 느껴졌을 바로 그 때, 아이슬란드로부터 걸려온 전화, 올리브 키터리지 식으로 말하자면 그 '무지개'같은 전화, 그 전화가 오는 부분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레이캬비크에서 온 전화, 전화를 건 사람은 내게 아이슬란드를 방문해 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내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고 하자 상대는 놀라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아이슬란드라는 그 먼 미지의 땅, 북풍 뒤에 숨은 그곳이, 내가 가야 할 바로 그곳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전화는 마법 같은 구원처럼,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p.106)
리베카 솔닛이 어쩌면 암일지도 모를 무엇에 대해 진단받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많은 친구들이 그녀를 문병오고 그녀를 도우려고 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 '빚'과 '도움을 요청하는 일'에 대해 쓸 때도 느꼈지만, 우리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른 어딘가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어딘가에 선의를 베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돌고 돌다가 쌓이고 쌓이다가, 내가 무너질 것 같았던 때에 기적처럼 다가오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기만 한걸까. 그 우연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게 아니다. '나로부터' 비롯되었고 그렇게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마법 같은 구원의 전화가 걸려온 뒤의 글도 숨이 막힐것 처럼 좋아서, 좀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들은 아주 희미하고, 예측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탄생한다. 우리가 사랑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지지 않고, 숲에서 길을 찾는 것은 어렵고, 하루하루의 대혼란에서 살아남는 것도 힘들다. 근원으로 올라가면 두 사람이, 본인들이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우연히 함께 있었다. 둘은 서로의 유사함에 혹은 차이에 끌린다. 각자의 두려움과 한계를 오랜 기간 극복하고, 두 세포가 하나로 합쳐지는 바로 그때 우리는 생겨난다. 수백 만 개의 정자가 하나의 난자 안에서 헤엄치고, 어찌어찌해서 여정을 완수한 단 하나의 정자가 역시 단 하나의 어머니 세포와 만나 우리를 낳는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냘픈 그 짝짓기.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어머니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그 혼란을 겪은 후 지상에 나오게 된다. 그런 일을 겪지 않고 세상에 나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너무나 연약한 유년의 몇 해 동안, 단 한순간이라도 어머니가 한눈을 팔았더라면 당신은 촛불처럼 훅 꺼져 버렸거나, 욕조에서 익사했거나, 바닥에 떨어진 단추를 삼키다 목이 막혀 죽었을 것이다.
모두 각자의 부모님이 서로를 만날 당시의 작은 우연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할머니가 불난 집에서 탈출한 사연이나 혹은 할아버지가 폭격을 간신히 피한 이야기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던 어떤 선택이 있었고, 우리가 축복을 받든 저주를 받든 아니면 둘 다를 받든, 그 모든 일은 그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그 선택을 끝까지 좇다 보면 지금 바로 이 순간 우리의 삶이란 매우 희귀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상한 진화의 결과 같은, 이미 멸종했어야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우연한 작용 덕분에 살아남은 한 마리 나비 같은 것. 우연이라는 단어(coincidence)는 주로 사고와 관련하여 쓰이지만, 말뜻 그대로 보자면 함께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우리 삶의 패턴은 제각기 떠돌아다니는 것들이 아니라, 잠시라도 함께 박자를 맞추어 움직이는 것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무용수들처럼 말이다. 보이지 않는 힘이 짝으로 만나는 순간, 생명이 만들어질 때의 온기가 있는 순간, 우리의 부모일지도 모를 알 수 없는 이들 사이에서 은밀한 연애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 순간 우리 삶의 패턴은 완성된다. (p.106-107)
이 장은 통틀어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를 생각나게 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리베카 솔닛이 하는 이 얘기를 그대로 소설로 풀어낸 게 아닐까 싶었다. 올리브 키터리지 속의 작은 기쁨과 큰 기쁨이 그리고 밀물이, 이 모든 것들로 구성되어지고 비롯된 게 아닌가.
도움이란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가급적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살고 싶다. 여태 나의 삶은 그런 식으로 굴러왔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내가 받지 않으려고 해도 나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그래서 나는 지금의 이 모습이 될 수 있었으며 이 삶을 살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나는, '정말 강한 사람은 혼자서 다 잘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야, '정말 강한 사람은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혼자서 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거나 견디기 보다는, 내가 이 부분을 힘들어하니 누군가의 도움을 받자, 고 내 약점을 인정하고 손을 내밀어 보는 쪽이 더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거다.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내가 진단을 받은 증세뿐 아니라 다른 부분까지 훨씬 더 많이 치료를 받게 될 것 같다고 적었다. 멈추지 않고 달려왔던 삶을 강제로 잠시 멈춰야 했다. 나는 도움을 요청했다. 좀처럼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나의 경우 과거에 유난히 도움을 주지 않던 부모가 있었기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꽤나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으면 빚을 엊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며, 또한 빚은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무언가 빚을 진 사람들이 그 부담감 때문에 바로 답례를 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들이 꼭 주고 싶어 하는 선물들이 있고, 때론 빚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p.179-180)
호의는 비상식량, 비가 올 때나 겨울, 수확이 없는 시기를 대비해 비축해 두는 식량과 비슷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상상했던 것보다 많음을 발견하는 일은 뿌듯하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 들었고, 나는 아름답게 보살핌을 받았다. 친구 안토니아가 중간에서 병문안 오는 사람들의 일정을 조정해 주었다. 나중에 회복기가 되자 삶이 늘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보낸 꽃다발에 묻혀 지내고, 모두 나를 도와주려 하고 걱정해 주는 삶. 하지만 그건 내가 그것들을 필요로 할 때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필요로 할 때마다 그것들을 얻을 수도 있다. 내가 필요로 할 때 그것들이 거기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모든 것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p.181-182)
의리 없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어머니를 성공적으로 맡기고 난 후에, 어쩌면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병원에서의 경험은 좀 더 결정적인 단절을 의미 했다. 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취소하거나 일정을 조정했다. 쓰고 있던 책의 발간을 늦췄고, 못 하겠다고, 다른 사람들은 잘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가장 잘생기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 옷으로 가리고 있던 자신들의 상처에 대해, 혹과 낭종과 흉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끄러운 질환이나 비정상적인 모습에 대해 기꺼이 이야기해 주었다. (p.182)
주변 사람들이 있다는 것,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지만, 나는 '못하겠다'고 말했다는 부분이 그렇게나 좋았더랬다. '못하겠다, 다른 사람들은 잘하고 있느냐' 고 묻는 부분. 내게 필요한 것도 그게 아닌가 싶었다.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나는 못하겠다는 말을 너무 못하면서 살아온 게 아닌가 싶은 거다.
이 책은 진짜 너무 좋았다.
어려운 부분도 많았지만, 정말 너무 좋았다.
특히 위에 인용했던 어머니와 탄생에 대한 부분은 너무 좋아서 낭독도 해보았다. 중간에 발음이 꼬였지만, 다시 하자니 너무 길어서 그대로 한 번 올려보겠다.
여러분 이 책 읽자. 정말 좋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읽자.
내내 아이슬란드에 대해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아이슬란드에 가보고 싶다고. 그곳의 고즈넉한 풍경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곳은 내가 기존에 했던 여행처럼 지하철을 타고 다니거나 걷기만으로 충분할 것 같지가 않은데, 그렇다면 나는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기존에 했던 다른 여행들처럼 며칠만을 예정한채로 훅 갔다가 훅 오기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
가만, 랩 걸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빌을 위로하기 위해 함께 만났던 곳도 아이슬란드 아니었나?
가만히 조용히, 아이슬란드에서의 며칠을 생각해본다.
함께 간 사람과 고즈넉함을 같이 바라볼 수 있다면, 같이 느낄 수 있다면 뭔가 평생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슬란드가 주는 분위기라는 게, 뉴욕이나 하노이가 주는 느낌과는 아주 다르니까.
별다른 일정 없이 머물다가, 가지고간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다가, 동행에게 나직하게 읽어주기도 하면서 며칠을 지내다 오면, 그 후의 삶은 그 전의 삶과 다르지 않을까.
아, 이 책은 진짜 뭐지. 되게 복잡한 마음이다. 너무 좋고 고요하고 이상하게 흥분시키고 조금 다른 삶을 꿈꾸게 한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고, 호의를 베푸는 삶을 살고 싶고, 고통을 받는 자들과 연대하고 싶도록 만든다. 내 안에 가득한 사랑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고 싶고, 그리고 더 공부하고 싶다. 멀고도 가까운, 이 제목에서 뜻하는 바는, 책 속에서 언급되는데, 거기에 대해 인용하며 이 긴 글을 마치겠다.
퇴근해야 되니깐. -0-
"가까이 있는 거야."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감정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을 전한다. 뉴욕에서 몇 년을 지낸 후 뉴멕시코의 시골로 이사한 조지아 오키프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런 인사말을 덧붙였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그건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를 함께 가늠하는 방법이었다. 감정은 그 자체의 거리를 가진다. 애정은 근처에 가까이 있는 것, 자아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침대 옆에 함께 누운 사람과 수천 마일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세상 반대편에 있는 낯선 이들의 삶에 깊이 마음을 둘 수도 있다. (p.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