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보라. 3만의 도시 인구 중 이제 여자 둘과 태아 하나만 남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지금이 훨씬 더 좋다는 사실이다. (p.37)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많은 여자들이 그랬겠지만, 나 역시 너무 우울했다. 너무 우울했고 모든 상황이 절망적으로 느껴졌으며, 그래서 나는 마르셀 서루의 저 문장을 계속 떠올렸다. 여성을 향한 이토록 잔인한 범죄가 일어난다는 것은, 남자들이 사라져야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들이 지구상에서 다 사라졌으면 좋겠어, 라고 친구와 대화했던 것도 생각난다.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다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싹 다 없어진 다음 새로 시작해야 상황이 나아질거라고, 그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르셀 서루도 말하지 않았나. 여자 둘과 태아 하나만 남았는데, 지금이 훨씬 좋다고.
나는 아주 많은 남자들이 성희롱과 성추행과 성폭행을 저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어릴적에 피해자였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로 수시로 성희롱과 성추행에 노출되니까. 나만 당한 게 아니었다. 내 주변의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우리끼리만 있을 때' 얘기했었다. 바깥으로 얘기했다가는 오히려 잘못을 '내'가 한 게 될테니까. 니가 치마를 입어서, 니가 술을 마셔서, 니가 밤늦게 다녀서, 니가 택시를 타서...
나 역시 어린이었을 때 당했던 일에 대해서 아주 오래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국민학생이었는데도 내 자신이 음탕했기 때문이라고, 아주 오래 생각했고, 그래서 나는 가해자보다 나를 더 원망했었다. 왜 그때 안된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어린 나에게 계속 추궁했다. 이게 너무 아프다. 너무 오랫동안 내 잘못인 줄 알고 살았던 게, 이게 너무 아파서 나는 나한테 미안하다.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건, 최명희의 『혼불』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딱히 관심도 없었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혼불을 읽으면서 자꾸만 화가 나는 거다. 아니, 여자들이 왜 이래야하지? 아, 이 답답함 어떻게 풀어야하지? 혼불을 읽어가면서 그 생각이 점점 강해졌고, 그래서 '아 페미니즘을 좀 공부해봐야겠다, 그러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했던 거다. 그래서 페미니즘 관련 도서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는데, 그러고나니 상처받는 일 투성이었다. 정희진은, 아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더라. 그리고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자각이 없을 때부터 내가 페미니스트 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내가 여자로서 살아가는 일이 매우 피곤하다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하다고 생각했고, 그때마다 상대가 누가 됐든 따지고 들었던 거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내 주변이 나와 때를 같이해, 동기는 달랐지만, 다들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메갈은 미러링이라는 걸 함으로써 많은 남성들에게 '너희들이 한 짓을 봐' 라며 거울을 비춰주었다. 어떤 남성들은 아, 이것이 내 모습이구나, 했지만 어떤 남성들은 거울을 깨부수려고 했다. 메갈은 미러링의 수위를 높여갔고,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만한 발언들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메갈의 미러링도 약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나 많이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맞고, 죽어나가는데.... 그걸 그만두라고 세게 '말'한 게, 왜??
며칠동안 트윗의 타임라인이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자기가 속한 집단 내에서의 성폭력을 폭로하는 해쉬태그에 숱한 사연들이 올라왔고, 그렇게 미성년자 성폭행 가해자인 '이익'이 수면에 드러났고, 이를 부추긴 이자혜 역시 드러났다. 또 내가 알지 못하는 닉네임이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속속 폭로되었으며,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박진성 시인도 개새끼였음이 드러났다. 이모두가, 성폭행 가해자들이, 가정을 이루고 살기도 했고 자신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고 있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데 우리에게 페미니즘이 있었다.
피해자들이 아픈 과거를 힘겹게 고백했을 때, 이제 더이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러게 왜 그랬어' 라며 피해자를 추궁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나쁘다는 사실을 '정확히', '제대로' 알고 있다. 페미니즘을 접한 후의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해주며, 2차가해를 걱정한다. 과거에 이자혜를 좋아했던 사람들도 이자혜가 가해자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이자혜에 대한 애정을 거둬들이며 범죄를 지적하고 피해자를 도우려한다. 또한 신속하고 빠르게 가해자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동안 결혼도 하고 커리어도 쌓고 계속 성범죄를 저지르며 살았던 가해자들은, 이제 더이상 그짓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많은 여자들과 또 남자들이, 연대하고 있다. 귀 기울여주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해주고 있다. 도울 수 있는 건 돕겠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그것을 '내 잘못이다' 라고 자책하지 않고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페미니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알라디너 o 님이 나와 같이 읽고 싶다며 『제르미날』을 주문하셨다는 게 아닌가. 게다가 또다른 알라디너 o 님은 나와 통화하면서 제르미날을 엄청 추천하셨다. 아아, 시적 정의 다 읽고 싶은데, 나 제르미날 주문해야 해??? 라고 갈등하다가, 오늘 아침 트윗을 보고 일단 다 멈추기로 했다. 시적정의도, 나나도, 제르미날도, 일단 스톱. 나는 다른 책을 집어들었다.
어릴 적 나를 음탕하다 여기게 했던 일도 '아는 사람'으로부터 일어났다. 이익과 이자혜 사건의 피해자도 '아는 사람'에게 당했다. 박진성 시인도 '아는 사람'으로 피해자들에게 접근했다. 아주 많은 성범죄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일어난다.
미국 내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잡지인 미즈는 이 책이 발간되기 전인 1983년부터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즉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라는 화두를 사회에 던지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밤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튀어나와 피해자를 납치하듯 끌고 가는 것만이 '진짜' 강간인 양 이야기되던 시대에, 사실은 피해자의 대다수가 아는 사람에 의해 강간당하고 있음을 폭로함으로써 성폭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나아가 미즈는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아래 기획된 이 책을 발간함을 통해, 강간이라 하면 여전히 낯선 이를 가해자로 떠올리는 사람들의 통념이 잘못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p.8)
너무 아프고 절망적이지만, 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오늘 친구는 트윗에서 '계속해서 공부하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얻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공부하고 연대하므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 할머니로 죽겠다는 친구를 응원하며, 나 역시 그 친구 옆에 페미니스트 할머니로 있겠다. 우리 건강하게, 공부하고 연대하자. 건강하게, 페미니스트로 늙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