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의 2월이었다.
그와 나는 그 때 두번째로 만나는 것이었는데, 나를 만나러 온 그의 손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들려 있었다. 내가 그 책을 좋아하는 걸 그가 알았었는지 몰랐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일부러 그 책을 들고온건지 아니면 그저 우연이었는지도. 나는 내가 그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무척 반가웠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까페로 갔다. 낮이었는데 병맥주를 시켜두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네가 읽던 책 내가 잠깐 봐도 되겠느냐 물었다. 그는 내게 자신이 읽으면서 왔던 책, 호밀밭의 파수꾼을 건네줬다. 나는 책에 밑줄이 그어져있는지 궁금했고 그가 밑줄을 그었다면, 그가 밑줄 그은 부분이 내가 밑줄 그은 부분과 겹치는지 궁금했다. 책을 휘리릭 넘기다보니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러다 맨 마지막에, 내가 밑줄 그었던 부분에 그도 밑줄을 그었다는 걸 보게 됐다.
밑줄 직접 그었어요?
라고 물으니 그는 아니다, 누나 책이다, 누나가 그었다, 고 답하더라. 하하.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나도 이 부분에 밑줄 그어서, 그래서 물어봤어요, 라고 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책을 가져가더니 그 부분을 보고서는
내가 그은 것 같아요.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나 너무 웃겨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완전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누나가 그은 밑줄이 갑자기 자기가 그은 밑줄 되고 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귀여웠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남자란 귀여운 존재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느 해의 가을 무렵이었다.
(위와는 다른 남자다)그도 역시 두번째 만나는 날이었다.
서울극장 앞에서 만나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그는 약속 시간에 늦어 뛰어왔다. 그와 나는 소개팅으로 만났고, 소개팅이 그 다음의 만남으로 또 이어지는 일은 내게 좀처럼 없었는데, 또 만나자, 라는 제안을 받으면 '더 좋은 분 만나세요' 하고 거절을 해왔었는데, 이 사람은 더 만나도 될 것 같았더랬다. 그는 뭐라고 했더라, 한 번 더 만나도 될 것 같지 않아요? 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래서 그래, 하고는 두번째로 만났던 거다. 그의 직업이 정확히 뭐였는지 모르겠는데, 가끔 교대로 밤을 새서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나를 만나러 오던 토요일, 그는 오전에 퇴근해서 자다가 깨야할 시간에 깨지 못했고, 그래서 약속 시간에 늦었다. 아침에 퇴근했으니 그럴만도 하지, 하고는 괜찮다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그가 책을 들고 있더라. 흘끗 보니 내가 읽었던 책이었다.
이병률의 끌림이네요?
나는 아는 척을 했고, 그는 네, 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가진 그는, 괜찮더라고요, 하고서 나랑 상영관을 향해 걸었는데, 진짜 별 거 없었는데, 그가 이병률의 끌림을 들고 있는 걸 보니까, 다시 만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우리 다시 안만나겠네, 하는 생각.
순간적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는데,
그러고나서 영화를 봤고(뭐 봤는지도 모르겠고 그 남자의 이름도 성도 기억이 안난다), 맥주를 마시러 갔다. 세계맥주집 이런 데였는데, 맥주는 맛있었고, 그리고나서 커피를 마시러 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점심시간에 다들 점심 먹으러 나가면 혼자 집에서 만들어 온 샌드위치를 먹는다고 했다. 그 시간이 참 좋다고. 그리고 아메리카노는 정말 맛있지 않냐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개팅에서 두번째 만남에 이르기까지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꼬박꼬박 연락을 해왔는데, 처음에는 전화를 해서 너무 깜짝 놀랐더랬다. 출근길인데, 전화가 오는 거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나는 전화를 안받았고, 그에게 '전화한거 맞냐'고 문자메세지로 물었다. 그는 맞다고, 출근 잘 하라고 한 거라고 했다. 아놔 진짜 ㅋㅋ 나는 전화통화 짱 싫어하고, 특히나 지하철 안에서나 버스 안에서 통화하는 거 짱 싫어해서, 지하철 안에서 통화하는 거 별로 안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출근 잘해라, 퇴근 잘해라 같은 걸 문자메세지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연락하다가 두번째 만남에 이른 것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사람도 착하고, 뭐랄까, 예의가 바르고 잘 하려는 사람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 데이트를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는데,
집으로 가는 길 지하철에서 이 남자가 또 전화를 하는 거다!
아놔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 전화좀 하지말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전화는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집에 잘 들어가라고 하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계속 만나도 될 것 같지 않아요?
아...이걸 어째 ..............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아니요.
그는 왜그러느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우리가 잘 안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우리는 잘 맞는 것 같다고 계속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러고싶지 않다고 했고, 그는 알겠다며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사람한테 '아니오'를 말했는지 잘 모르겠다. 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착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대체 뭘 바랐던걸까? 왜 그에게 아니라고 말했을까? 어쨌든 이름도 얼굴도 생각이 안난다..몇 살 때 만난 남자인지도 모르겠어...
아, 오만년만에 이 남자 생각을 한 건 이병률의 신간 때문이었다. 그 남자를 만나고난 후부터 이병률만 보면 그 남자 생각이 나는데, 아, 이병률의 신간, 작가소개 보고 빵터진 것이다.
내가 칭찬할 게 아니라서 책 링크는 걸지 않겠다. 어쨌든 그 책의 작가소개가 이렇다.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너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손발이 오글거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어떻게 저런 작가소개를 쓸 수 있을까. 나와는 정말 영혼의 결이 다른 사람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 너무 싫은데, 마지막에 '심지어 꽃을 자주 꺾으니 도둑이다' 이건 정말 압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우, 내가 막 도망가고 싶다. 꽃 꺾지마세요, 아니, 알만한 양반이 꽃은 왜 꺾어요..........
어휴, 적응 안돼, 완전 나랑 영혼의 미스매치...
저 작가소개 보면서, 그때 그 소개팅남과 그 다음만남으로 이어지지 않은 건 [끌림]때문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는 어쩌면 이런 영혼의 결과 닮아있었던 게 아닐까.......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존재해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손발이 오글거려서 책 링크도 못하겠는데, 엄청 인기 있는 작가니까. 글이란 것도 무릇 취향을 타는 것이니, 저 작가소개에 하트뿅뿅 되는 사람들도 있겠지. 나는 진짜 아니올시다... 어휴.......
저 작가소개 보고 오래전의 소개팅남을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잘 지내고 있겠지......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제가 연애하고 싶은 남자는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