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직장동료 p 와 오랜만에 마주쳤다. 층이 달라 하루에 한 번도 못보고 지나칠 때가 많은데 요 며칠간 교육을 다녀와서 아예 볼 수 없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하고 물으니, "힘들어요, 차장님.." 하고 울먹이는 소리를 낸다. 일전에 애인하고 관계가 예전같지 않았던 말을 들었던 터라 혹시나 싶어 애인하고 헤어졌나고 물으니, p 는 이렇게 답했다.
헤어지는 중이에요.
아..가슴이 너무 아팠어. 헤어지는 중이라고 답해야 하는 저 상황을, 저 마음을, 너무나 잘 알겠어. 나는 잠깐 p 의 팔에 손을 올려두었다. 응, 술이나 마실까? 하니, 네, 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1과 사람2가 만나서 좋아하고 사랑하다가 감정이 식어 헤어질 수 있다. 아니 대부분 그런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감정이 식을 때는 사람1과 사람2가 동시에 식는 게 아니다. 어느 한 쪽이 먼저 식는다. 좋아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이별을 맞닥뜨렸을 때, '우린 이제 헤어져'라고 한다해서 '오늘 이별했으니 쫑!' 이렇게 되는 게 아니다. 이제 그 사람에게 적응했던 나를 혼자에 적응하는 나로 만들려는 시간은 아주 많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내내 '헤어지는 중'이라고 표현한다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헤어지는 중이에요, 라는 p 의 말이 너무 아팠다. 그렇게 말하는 p 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그녀가 떠난 뒤 나는 어지간히 엉망이 되었다. 더는 일하지 않았고, 더는 먹지 않았다. 온종일 더러운 이불 속에 누워 그녀와 그녀의 맨몸을 담은 사진을 바로 눈앞에 붙여서 내가 자위를 하면 림멜(영국의 화장품 브랜드로,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 등 아이 메이크업 제품이 유명하다:옮긴이 주)칠한 그녀의 짙은 속눈썹이 그예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고 상상했다. (p.11)
'얀 볼커르스'의 소설 [터키 과자]는 이별을 겪은 남자가 자신이 엉망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글로 시작한다. 남자는 그녀와 헤어진 게 너무 아프고 그녀가 너무나 그리워서 이불 속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고 야위어간다. 그러다 아주 많은 여자들과 의미 없는 섹스를 하기도 하고.
이런 시간을 지나온 그가, 더이상 '엉망'인 모습은 아니라 해도,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 붉은 머리 올하를 그리워하는 건 지속된다. 몇차례 그녀를 만나기도 한다. 그때마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고 말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그녀의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미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시들어가고,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한 그여자란 말인가 싶을 정도로 달라진다.
이별은 사람을 엉망으로 만든다. 일전에 본 영화 [러브, 비하인드]에서의 여자도,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와의 이별을 받아들이며,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먹고, 술에 취하고, 약을 하고, 울고.....하지 않았던가. [터키 과자]에서의 남자도 올하를 내내 그리워하고 언제든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른 남자랑 결혼한다고 하는데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해서 올하가 '네가 이렇게 나를 내내 사랑하니 너에게로 돌아올게, 내가 있을 곳은 너야' 하고 돌아오진 않는다. 올하가 그랑 함께 하는동안 내내 즐거웠던 건 아니니까. 너무 섹스만 한 것도 불만이었고. 누가 아무리아무리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선택하고 싶다면, 나는 그럴 수 있는 거다. 나 역시 내 사랑이 중요하니까.
p 생각을 했다. p는 헤어진 애인과 다시 잘 되기를 바랄까? 그가 돌아오기를 혹은 자신이 돌아가기를 바랄까?
대단한 성애소설일줄 알았던 [터키 과자]는 쉴새없이 '박는' 장면이 나오긴 하는데, 재미는 없다. 자신이 사랑한 올하가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있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 어딜가나 남자들로부터 성희롱을 당하는 건 좀 병신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라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보면 그렇게 한결같이 찝적대기만 하나? 게다가 그녀를 가난에도 잘 적응하고, 그 와중에도 주어진 재료로 요리까지 잘하는 여자로 표현한 건, 뭐랄까, 좀 병맛이었다. 게다가 남자가 언급하는 소설이나 시를 다 못알아듣고... 이건 판타지잖아...
그러나 올하는 소설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면서 '보여지기' 보다는 말을 하는 존재가 된다. 자신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그때 자신이 행복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하는 선택에 대해 그녀는 얘기한다. 남자가 보는 올하가 빛을 잃을수록, 올하는 목소리를 찾는다. 그녀가 빛을 잃은 건, 그녀의 젊고 찬란했던 시절이 지나치게 피곤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자신의 모습에 열등감이 생겼다고 말하지만, 한때 아름다웠던 삶에 지쳤던 거라고. 아름다운 여자를 가만 놔두지 않는 삶에. 심지어 올하의 어머니 조차도 올하의 미모를 이용하니까. 그래서 올하가 마지막에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준다'며 다른 남자와 다시 결혼을 선택할 때의 그 마음이 안타까웠다. 자신의 찬란했던 젊은 시절의 사진을 지금의 남편에게는 보여주려 하지 않는 올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 겉모습이 아닌, 그저 나라는 사람 그 자체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어떻게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낮에는 절대 옷을 벗지도 않으며 위 팔뚝의 주근깨가 이제 미워져서 항상 긴소매 차림을 한다고. 나라면 여전히 그 주근깨 하나하나에 입 맞추고 싶겠다고 하자 그녀는 내가 아직까지 옛날 모습으로 자기를 본다고 되받았다. 내가 그녀를 이상화시킨다 한들 그녀는 오래전부터 이미 이상적인 여자가 아니라고. 지금 결혼하려는 남자는 현재 그녀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그녀가 브리지 게임에서 글쎄 술에 취하여 자신이 숫제 도사라고 생각한 나머지, 패를 엉터리로 낸다거나 혹은 머리 모양을 싹 바꾸었을 때조차. 어떤 남자냐고 묻자, 내 눈에는 지독스레 흥미로운 얼굴일 것이라고 했다. 지독스레 못생겼다고. 생김새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얼굴이 얽었다고. 인디언 얼굴. 험프리 보가트를 닮았다고 그녀가 덧붙였다. 그리고 쿠르츠말러(1867~1950 독일 여성 소설가. 신분 차이를 극복하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주로 썼다. 당대 할리퀸 시리즈물의 대명사: 옮긴이 주)의 표현을 가져와 쓰면서 그녀를 숭배했다고. 나도 그랬었다고 했더니, 그녀는 그건 잘 안다면서도 대뜸 비난을 퍼부었다. 자신이 갇혀 있다고 느꼈고 그 시절 동안 한 번도 혼자 시내에 가 본 적이 없다는 것. 내가 그녀를 너무 자주 침대로 데려갔다는 것. 그녀가 아침에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으면 벌써 씨작됐다고. 그러면 그녀는, 또 시작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따져 보았더니 하루에 일곱 번일 때도 있었다. 그건 더 이상 정상이 아니었다고. 나는 그저 색광증 환자였다. 내가 여태 그러느냐고 그녀가 묻기에, 그녀가 곁에 줄곧 있었더라면 그랬을 터라고 대답했다. 옛날 일을 떠올리며 웃을 수는 없느냐고 했더니, 그녀는 말했다. "아니, 나는 이제 웃지 않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인생은 동화라고. 난 결혼할 테고, 난 행복해질 거야. 그런데 난 예상보다 훨씬 덜 행복해졌거든. (p.216-217)
하루에 일곱 번...이 가능한가??? ( ")
올하의 삶은 올하가 예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삶이란 게 워낙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거지만, 올하는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손에 쥘 수가 없다. 올하는 몰랐던 것 같다. 혼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곁에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꾸만 행복하지 못한 길을 선택하게 된 것 같다. 올하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그래서 조금 더 나이를 먹게 되었다면, 그랬다면 '아 이놈 저놈 다 귀찮아 혼자살래!' 하게 되었을까?
올하를 잃고 괴로워하는 남자에게 친구가 편지를 보낸다.
나는 그녀가 떠난 직후 한 친구가 보내온 편지에 있던 구절을 떠올렸다. '너희는 지독히도 행복하게 살았고, 거기에 끝이 온 것뿐이야.' (p.124)
p에게도 이 말을 해주면 어떨까,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어쩌면 많은 다른 연인들처럼 다시 만나 다시 연인이 될지도 모르기에 저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시작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끝이 온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실례일테니.
올하가 남자를 처음 만났던 차안에서 카섹스를 하는데, 섹스를 다 하고난 후, 아아, 이런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으윽-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청바지 지퍼를 잠글 때 내 막대기가 미처 속옷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나는 아파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이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내 자지의 살 껍질이 구리 선로에 끼인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우스워했는데, 내가 예전에 스웨터 지퍼에 낀 목의 살갗을 빼냈듯이 그것도 빼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나는 투홀스키의 그 단편소설에 나오는 지퍼 발명가를 이 문제에 써먹을 수 있겠다고 말했다(독일 작가 쿠르트 투홀스키의 단편소설 「누가 지퍼를 발명했나?」(1928)에 나오는 지퍼 발명가 이야기. 공장에서 지퍼가 제작되어 팔리지만, 아무도 지퍼의 원리를 모르며 정작 지퍼를 만드는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지퍼 발명가만이 그 원리를 알고 있으나, 정작 그는 빈털터리이다:옮긴이 주). 하지만 그녀에게는 뜻 모를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아무리 만지작거려 보아도 그 괘씸한 지랄맞은 것은 열리지 않았다. 진짜 사람 살이 트램의 선로전환기에 낀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통증으로 인해 내 막대기는 끄트머리가 벌게져서 우스꽝스럽게 발딱 선 채였고, 구리 사이에 낀 살 껍질은 그동안 보라색이 되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서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지퍼를 펜치로 집어 살살 떼어 낼 도리밖에 없었다. (p.44)
아... 너무나 아프겠다 ㅠㅠ 진짜 아프겠다 ㅠㅠㅠㅠ 아 너무나 끔찍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으악. 내가 그 옆에 있었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못했을 것 같다. 올하와 남자는 누군가로부터 펜치를 빌려서 일을 처리하지만, 아, 지금의 나라면..... 119 불렀을 것 같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아플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진짜 아프겠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엊그제 퇴근길 지하철에서 읽다가 몸을 움찔움찔했다. 막 내가 아픈 것 같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제 저녁에 친구가 인스타에 김치볶음밥을 해서 올렸던데, 그걸 본 뒤로 김치볶음밤 생각밖에 안난다. 오늘 아침에 해먹을까 했지만, 오늘 아침에는 일요일에 시장에서 사두었던 애호박 생각이 나, 호박전을 부쳐 먹었다. 저녁에는 술약속이 있고.. 내가 김치볶음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오늘 점심 뿐이다! 나는 점심을 같이 먹을 동료에게 김치볶음밥 먹으러 가자고 벌써 말해두었다.
일전에 e 가 내게 '너랑 다니면 내가 할 게 없어서 너무 편해, 니가 계획 다 세워놔서'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머릿속에 동선과 시간표 다 짜놓고 움직여가지고ㅋㅋㅋㅋ 그러니까 그 얘기를 들었던 날, d 와 e 그리고 내가 셋이서 레스토랑에 가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시기로 했는데 와인 콜키지가 1만원이라 와인을 사가기로 했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d 는 도착해서 주문을 해두고 나와 e 는 근처에 있는 마트로 가 와인을 사가자고 했던거다. 그리고 마트로 가서 와인을 선택하고 계산하기 전에 e 에게 '포인트 카드 미리 준비해, 후딱 적립하게' 했던 것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가 이 모든 일에 빵빵터지면서 '너랑 다니면 너무 편해' 했던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그래서 점심의 계획을 나는 미리 세워둔다. e 는 나를 너무 신기해한다. 다른 친구들 만나면 길에서 만나서 같이 걸으면서 어디갈까, 어디갈까, 하는데 널 만날 때는 미리 '삼겹살 먹으러 어디로 가자' 같은 거 다 정해놔서 길에서 방황을 안한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너무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내가 '야 먹으려고 만나는건데 길에다 시간 왜 뿌려,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가 천천히 더 많이 먹어야지'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빨리 점심이 되어서 김치볶음밥 먹었으면 좋겠다! 이제 겨우 아홉시 반인데!! 우어어-
아 마지막으로, 제목이 '터키 과자'라서 터키 소설일 줄 알았는데, 이 소설은 네덜란드 소설이다.
원제 Turks Fruit는 글자 그대로는 `터키 과일`이라는 뜻으로, 터키의 과자 이름을 일컫는 네덜란드 말입니다. 끔찍하게 달콤하고, 너무나도 부드러워 곧 바스러집니다. (옮긴이의 말,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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