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 그런데 블로그를 통해 만난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 아주 오래된 연인이 있고 결혼하지 않은 채로 그녀와 함께 살고 있지만, 여자를 만나 호감을 느낀다. 이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아무 사이도 아니야' 라고 각자의 애인에게 말하면서도, 각자의 애인으로부터 연락 받기를 꺼려한다. 이 만화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가 누군가의 전화를 피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두는' 장면이다.
아, 진짜 너무 싫은 장면이다.

전화기를 꺼두고서는 애인에게는 밧데리가 닳았노라고 거짓말을 한다. 여자만 이러는 게 아니다, 남자 역시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전화기를 꺼둔다. 전화를 했는데 '전화기가 꺼져있어~' 라는 멘트를 듣는 그 참담한 마음을, 짐작한다면 그래서는 안되지 않을까.
새로 막 호감이 가기 시작한 이성의 전화를 받고는 싶지만, 현재의 애인이 있는 상황에서 그 전화를 받는 건 조심해야 할 일. 그래서 거짓말을 하며, 아무 전화도 아닌 것처럼 상대의 전화를 받는다. 그 통화가 편할 리 없다.

좋아하는 이성의 전화를 제대로 받을 수 없고 그것이 불편한 까닭은, 내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애인을 속이고 있기 때문에 결코 편하지가 않다. 거짓말은 다른 거짓말을 부르고 또 다른 거짓말을 부르고 그렇게 거짓말을 쌓게 된다.
사랑이 신뢰의 또다른 이름은 아닐 것이다. 신뢰는 사랑안에 포함된 것들 중 하나일텐데, 그러나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 가장 큰 게 아닐까. 신뢰가 없이 이 사랑을 어떻게 유지하게 될까. 아니, 어쩌면 신뢰가 사라져버린 순간, 사랑 역시 더이상 사랑이 아닐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각자의 연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이성을 만나는 건,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꽤 비참한 일이다.

나와 발가벗고 섹스를 나눈 남자에게 '여자친구는 언제 오냐'고 물어야 하는 그 심정이, 오죽할까. 그것이 너무 싫어서 그녀는 자신의 애인과 헤어지기를 결심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건 사실 쉽지 않다. 거짓말이 쌓일수록 스트레스 받는 건 내 자신이다. 전화기를 꺼둬야 하고, 통화를 하기 위해서는 눈치를 봐야하는 그 상황이, 애인과 만날 약속을 했다가도 새로운 이성이 부르면 약속이고 뭐고 그쪽으로 향해 가야하는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새로운 이성을 만나 바람을 펴야지, 다짐하고 새로운 이성을 만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애인이 있는데 새로운 이성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면, 나는 이미 지금의 애인에게 충족된 기분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의 애인이 내 눈에 가득 들어오고 내 마음과 머릿속에 가득 차있다면, 새로운 이성이, 새롭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주지는 못하는 거 아닐까. 내가 애인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될 일, 이라고 나는 단정짓는 건 아니지만, 만약 새로운 이성을 향애 내 몸과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의 사랑이 나를 온전하게 가득, 채워주지 못하는 건 아닐까. 사람은 결국 자신의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거니까.
여자와 남자는 결국 각자의 연인을 떠나 서로의 연인이 된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지도 않고 또 마냥 행복하지도 않다. 수시로 행복이 찾아들긴 하지만, 여자는 끊임없이 남자를 의심한다. 과거의 연인을 잊지 못한 건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남자의 핸드폰을 몰래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가 친구와 나눈 메세지를, 과거의 연인을 생각하며 적어둔 메모를 본다. 이 역시 새롭게 관계하게 된 이 애인에게 전적으로 충족되지 못해서일 것이다. 애인이 있으면서 나를 만난 남자다. 그렇다면 내가 애인이 되었을 때도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의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거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인이 있다' 고 하면서도 여기저기 바람끼를 흘리고 다니는 사람보다는 '애인이 있다'고 말하고는 묵직하게 신의를 다하려는 사람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나를 어떻게 대할지도 짐작할 수 있는 거니까. 아, 물론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 비참함이 정말 싫다. 전화를 꺼둬야하는 비참함, 네 애인은 언제와? 라고 물어야 하는 비참함, 잘못걸린 전화야 라고 말하면서 얼버무려야 하는 비참함. 남자와 여자 둘 모두, 오래된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래된 연애는 권태기를 가져오는 걸까? 언젠가는 새로운 이성에게 누군가는 마음이 움직여, 이 오래된 연애는 결국 흔들리다 깨어져버리고 마는 걸까? 연애는, 종국에는 그런걸까?

[난 그녀와 키스했다]의 '제레미'와 '앙투완'은 역시 오래된 연인이었다. 이들은 게이커플로서 결혼을 앞두고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허락도 받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공식적으로 다 인정받은, 그런 연인이다. 제레미와 앙투완은 결혼할 사이, 라는 건 그들을 아는 누구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기정사실 같은 거다.
제레미와 앙투완은 둘다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고, 서로에 대해 다정한 사이이며, 함께 잘 살고 있다. 그런 차에 제레미가 스웨덴 여자인 '아드나'를 만나 흔들리게 된다. 자기는 '뼛속까지 게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신하는데, 그녀를 보기만 하면 자꾸만 성적으로 흥분된다. 혹시 내가 이성애자가 된걸까? 하는 의심으로 다른 여자들을 만나보지만, 다른 여자들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유독 그녀에게만!! 그가 반응한다. 그녀에게 반응하는 제레미는, 그러므로 앙투완에게는 더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제레미의 모든 신경은 이제 아드나에게만 향한다. 이야기를 함께 하고 싶은 것도, 밥을 같이 먹고 싶은 것도, 술을 같이 마시고 싶은 것도 모두 아드나이다. 그러므로 그는 점점 아드나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다. 시선은 어디서나 아드나를 좇는다.
그런 그가 앙투완에게 소홀할 수 밖에 없는 건 뻔한 사실이다. 이에 앙투완은 '너는 권태기냐' 묻는다. 다른 여자가 생긴 걸 알리 없는 그로서는, '우리 요즘 대화도 섹스도 없다' 라고 말하면서 연인에게 서운함을 토로한다. 그러나 제레미는 그런 그를 두고는 아드나를 만나 놀이공원엘 간다.
제레미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아드나에게 모든 걸 고백하고 돌아설 생각이었다. 나는 게이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어, 라는 말을 하려고 그녀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들들 하기 전에, 아드나의 눈을 보는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만다. 제레미는 그것을 '그녀를 보기만 하면 아득해진다' 고 표현한다.
나에게 오래된 연인이 있는데, 이제 우리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을 보고 '아득해진다'는 건, 대체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까. 또, 아무것도 모르는채로 '이 사람이 내게 왜 이렇게 소홀해졌을까' 고민하며 서운해하는 남겨진 연인의 마음은 또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결혼전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거절을 당한 앙투완은, 확실히 '버려진' 연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오래 함께 했던 연인을 그렇게 비참하게 사람들 사이에 남겨둔 채로 자신의 새로운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나가는 것, 그것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낭만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미 다른 사람에게 '아득함'을 느끼는데, 이미 마음이 식어버린 연인과 신의를 지키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일까? 그건 아마 둘 모두에게 우울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미 애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눈이 가는, 이런 일. 역시나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향해 몸이 움직인다. 이제 제레미가 사랑하는 건 아드나이므로,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아드나를 향해 쏟는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그녀가 가자는 곳으로 그는 간다. 앙투완이 원하는 곳에는, 더이상 제레미가 있지 않다.

영화는 어느 순간 산으로 가는 것 같다. 왜 뜬금없이 저렇게 전개될까 싶을 정도로 사실 이 영화가 좋지는 않다. 다만, 이 연인들보다 더 재미있는 커플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러므로 나는 이 커플이 더 좋았다. 제레미의 동료 '샤를' 커플인데, 샤를은 이상형에 대한 기준이 확고했다. '쭉빵 러시아 미녀'가 그의 이상형. 그러므로 그를 좋아하는 '코가 못생긴' 직장 동료 '클레망스'가 영 마땅찮았다. 그녀는 '코도 못생겼'는데 심지어 '떽떽' 거린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제레미의 말에 콧방귀를 끼던 어느날, 그녀와 하루 잔다. 같이 하룻밤을 보낸 클레망스는 더이상 떽떽거리는 여자가 되어 있지 않았다. 샤를의 곁에 있고 싶어하고 샤를에게 부드럽게 대해주고 싶다. 그러나 샤를에게 그녀는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여자였으므로, 그녀를 거부한다. 너는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무어냐, 며 그녀에게 면박을 준다. 하룻밤 잔 거 가지고 따라다니는 그녀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러시아 쭉빵 미녀와는 완전히 달랐으니까. 그러나 상처를 받은 클레망스가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고나자 그는 괴로워한다.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에게 찾아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렇게 그들은 커플이 되었는데, 커플이 되고난 후의 그들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어서,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코가 못생긴 여자라고 그녀를 판단했던 그는, 이제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녀를 자랑스러워하고 또 사랑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가 말릴 지경. 그는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도 그녀에게 넘치는 애정표현을 한다. 틈만 나면 뽀뽀를 하며 애정을 표현한다. 항상 다른 여자를 항상 다른 만남을 꿈꿔왔으므로 헤매이던 그였는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자 그녀에게 애정표현 하는 걸로 에너지를 쏟는 거다.
그래, 사람은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몸과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토요일에는 친구 D 를 만나 와인을 마셨다. 와인을 마신 취기도 그렇지만, 내 앞에 앉아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맞장구쳐주는 D 가 무척 고마워서 고맙다고 얘기했다. 너는 항상 내 얘기를 참 잘도 들어준다고. 그러므로 나는 너와 있는 시간이 참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D 가 말했다. 어느 순간 자신이 더이상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서 다행이라고, 자신과의 만남을 좋다고 말해주니 너무나 기쁘다고 했다. 나는 언제나 상대에게 좋은 감정은 느끼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대가 조금이라도, 순간이라도 자신이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듣지 않는 것보다 듣는 게 더 좋을테니까. 그래서 상대에게 좋은 마음이 들고 상대와 있는 시간이 기쁘면 그것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날도 D 는 나의 말들에 기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좋았고, 그러다보니 와인을 한 병 더 주문하게 되었다. 우리 한 병 더 주문하자, 라고 말하고서는 '너무 많으면 남겨서 집에 가져가지 뭐' 라고 했는데, 우리는 결국 두 병을 다 마신 뒤에 맥주까지 마셨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레스토랑에서는 서비스 안주도 주더라. 오! 튀긴 닭이었는데 정확히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고, 여튼 준 건 다 먹었다.
주말에 조카들이 왔다. 예쁘다 예쁘다 좋다 좋다 하며 여섯 살 조카의 머리에 몇 번이고 뽀뽀해주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애정표현은 뽀뽀가 짱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