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의 개를 안락사 시켰던데." 리처가 말했다.
"늙은 개잖아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소?"
"신경 써야 하나요?"
"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잖소."
헬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213)
'잭 리처'는 항상 그랬다. 《추적자》 때는, 납치되었던 아이들이 무사한 걸 보고 어마어마한 안도감과 희망과 빛을 느꼈더랬다. 《탈주자》에서는 알지 못했던 여자가 눈 앞에서 강간당할 위기에 처하자 어떻게든 그녀를 돕기 위해 힙쓴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다. 무려 다섯 명의 사람을 이유없이 죽인 살인범의 개. 살인범 '제임스 바' 는 잡혔고 병원에 입원한 상황. 잭 리처는 이 사건을 조사하다가 살인범 제임스 바의 개가 안락사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부당하고 부조리한 일. 잭 리처에겐 그렇다. 그러나 헬렌도 또 다른 경찰도 그 사실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다. 잭 리처 말대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거다.
하아- 힘들었던 날들이었고 고단했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내 슬픔에 허우적거려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 슬픔에서 어떻게 빠져나올까 고심하며 잭 리처를 꺼내들었던 거다. 그래, 내게는 잭 리처가 있어! 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인가. 잭 리처를 그 순간 생각해내는 내가 기특했고, 언제든 빼어들 수 있게 책장에 잭 리처를 몇 권 꽂아둔 내가 기특했다. 가만 보면 나는, 나를 위해 참 많은 것들을 준비해두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참 좋다. (응?)
어쨌든,
나는 잭 리처가 안락사 당한 개를 신경쓸 수 있는 남자라는 사실이 무척 좋다. 잭 리처는 딱 한 발로 과녁에 명중을 시킬 수 있는 사격 솜씨를 가지고 있고, 맨 손으로도 상대의 코를 부러뜨릴 수 있는 강한 남자인데, 이런 강한 남자가 그저 강한 채로 있지 않고, 약한 곳에 눈을 돌리는 남자라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든다. 나는 언제나 이런 것에 아주 강하게 끌린다. 제이슨 스태덤이 영화 《트랜스포터》에서 맨 몸 근육으로 적을 무찔러서 좋았던 게 아니라, 그가 폭발의 한 가운데서 서기에게 달려가 다치지 않았냐고 묻는, 그 장면에서 좋았던 거다. 언젠가 정식이는 지하철 안에서 내게 대체 왜 그렇게 강한 남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거에 끌리냐고 물었는데, 이는 나도 참 궁금했던 바다. 나는 진짜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 혹은 약한 존재를 보호하는 장면에 아주 그냥 훅훅- 넘어가버려서, 이게 대체 뭔가 했던 참이었다. 왜 나는 번번이 그런 장면들에 코피날만큼 쓰러져버리고 마는가. 그러다 최근에야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내가 폭력에 노출됐을 때, 그때 내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했던 것. 그때는 그런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는데 그게 내내 마음 속 깊이 쌓여 있었던 게 아닐까. 뭐, 이건 내 개인적인 분석일 뿐이고, 어쨌든 나는 그런 장면들에 강하게 끌리는데, 키 195센치의 커다란 덩치를 가진 잭 리처가, 머리에 두건을 씌워도 목표물을 정확하게 조준하고 쏘아 맞힐 수 있는 잭 리처가, 아무 죄도 없는 늙은 개를 신경쓴다는 게, 와- 진짜 마법처럼 좋은거다. 이럴 때의 잭 리처 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와야 한다.
별빛이 내린다 샤랄라라랄라라라라~
잭 리처는 떠도는 사람이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도 영원을 약속할 수 없다. 항상 짧은 시간 불꽃같이 뒹굴다 안녕, 할뿐. 그가 누구를 만나든 내가 신경쓸 바는 아니지만, 저 위의 대화에서 나는, 그가 '헬렌'하고는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기를 바랐다. 강하고 크고 세고 그러나 약한 곳에 눈을 돌릴 줄 아는 남자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여자에게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아직 나는 책을 다 읽지 못했고, 그러므로 뒷부분에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지 알 수 없지만(물론 영화를 봤지만) 그래도 헬렌하고는 아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좋은 향기가 나고 예쁘고 지적인 여자라고 순간순간 생각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여자하고는 침대위로 함께 올라가지도,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좀 많이 속상할 것 같다. 물론 내가 속상하든 말든, 세상은 제멋대로 돌아가기 마련이지만.....
암튼 잭 리처는 짱이다.
완전 멋지다.
진짜 최고다.
나는 잭 리처에게 양재동의 여인이 되어줄 수도 있을텐데...
사실 캐시가 겨우3위를 하고나서 딱 10년 뒤에 그는 해병대 910미터 초청경기에서 우승을 했었다. 모든 총알이 표적 한가운데를 뚫어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너덜너덜한 구멍을 만들었다. 바쁘게 열두 달을 보내고 나서야 사무실 선반에 빛나는 우승컵을 올려놓았다. 그해는 그에게 있어 아주 예외적인 때였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든 면에서 말하자면 절정이었다. 그해라면 빗맞히려야 빗맞힐 수도, 상을 놓치려야 놓칠 수도 없었다. (p.340)
아, 잭 리처. 그는 찬란하고 빛나는 사람이로구나.
이 책에서 그는 아주 오래전의 연인과 재회한다. 그녀와의 재회를 앞두고 그는 그녀에게 깔끔하게 보이고자 이발까지 했숑! 둘다 오랜 세월이 흘러 늙고 예전과 변했지만,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것. 아, 잭 리처의 '옛 연인'이라니. 그것조차 부럽다. 잭 리처는 그녀를 '만나는'데에만 그치지 않고 그녀의 호텔방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이윽고 그는 가까이 다가가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예전에 그랬듯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가락 끝을 밀어 넣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광대뼈를 더듬었다. (음..나는 광대뼈가 없는데..)
"이래야 되는 거야?"
"원하지 않아?"
"14년 전 일이야." 그녀가 말했다.
"자전거 타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가 말했다.
"똑같을 것 같아?"
"더 좋을걸?"
"얼마나 더?" 그녀가 물었다.
"언제나 좋았잖아." 그가 말했다. "안 그랬나? 그보다 얼마나 더 좋을 수 있겠어?"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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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잭 리처가 싸움을 잘해서 좋은 게 아니다. 나는 잭 리처가 195라는 큰 키를 가져서 좋은 게 아니다. 그가 큰 키를 가지고 싸움을 잘해서 좋은 게 아니다. 나는 그가 큰 키를 가지고 싸움을 잘하는 데 약한 쪽으로 시선을 둘 수 있는 사람이라 좋다. 그런 그가 옛 연인을 만날 때는 이발을 하고 나간다. 뭐, 더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어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친구로부터 시사인 정기구독을 받았다. 앞으로 매주 너에게 시사인이 갈거야, 라고 친구가 말했다. 언젠가 시사인 정기구독 해주는 사람에게 영혼을 바치겠다는 글을 기억하고, 친구는 그러므로 내게 영혼을 달라고 말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약속은 남자의 모든 것'이라는 신해철의 노래가 떠올라 그래, 가져라, 내영혼, 했다. 뭐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사람인데 약속이 남자만의 모든 것은 아닐 터. 여자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래, 가져라 내 영혼. 그렇게 나는 매주 시사인을 받고 영혼을 내어주기로 했다.
'닐 게이먼'의 《금붕어 두 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에는, 금붕어 두 마리와 아빠를 바꾸는 소년이 나온다.
엄마는 소년에게 아빠를 다시 찾아오라 말하고, 이에 소년은 친구의 집을 찾아가 금붕어 줄테니 우리 아빠 다오, 라고 말하지만 친구는 이미 소년의 아빠를 기타와 바꿔버린 뒤다. 기타 대신 아빠를 가져간 친구에게 가보니 그 친구는 가면과 아빠를 바꿨단다. 이 여정 끝에 어쨌든 소년은 아빠를 다시 되찾아 오고, 엄마와 약속한다. 다시는 아빠를 다른 것들과 바꾸지 않기로.
엄마는 내게
가슴에 십자가를 그으며
맹세하라고 하셨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와 다른 물건을
바꾸지 않겠다고.
그래서 나는 약속했다.
다시는 아빠와 다른 것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여동생을 놓고선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크-
나는 시사인 정기구독에 약속대로 영혼을 내어주었지만,
내 자존심을 두고는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쓰면서 나 졸 멋지구나, 했는데,
사실 뭐, 이건 자기 위안일 뿐이로구나.
여튼, 시사인 정기구독을 선물로 받는 여자사람이라니. 조낸 멋져서 미치겠다. 하하하하하. 시사인 정기구독을 선물 받는 여자사람의 영혼이라니, 탐날 만도 하겠다 싶다. (응?)
아, 뭔가 잭 리처 읽고나니 옷을 싹 차려입고 이발하고 향수 뿌리고 나온 남자 만나고 싶어졌다. 스물 두살때 그런 첫 기억이 있었는데...알바하다가 만난 아저씨가 저녁 사준다고 해서 나갔는데 이미 그는 옷을 싹 바꿔입고 좋은 향기까지 풍기고 있었던....그때 그 아저씨가 스물일곱이었나 스물여덟이었나...나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내가 아저씨라고 불렀는데...그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던 데로 갔다가 그 달라진 옷차림과 새로운 향기에 와- 나 만나려고 이렇게 한거야? 싶어서 손 잡아도 내버려 뒀었는데... 갑자기 그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아, 내나이 스물일곱에도 있었던 것 같다. 메신저를 통해 오늘 몇시에 만나자, 했더니 나는 지금 나가서 예쁘게 이발하고 갈게, 하던 남자. 그때 그가 서른하나 였던가..그는 정말로 이발을 하고 나왔숑. 새록새록 새록새록.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아직도 못봤네. 제기랄.
이번주 내로 꼭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