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와 나는 《안나 카레니나》를 같이 읽었다. 총 세 권이나 되는 책을 읽으면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읽다가 좋은 문장들을 문자메세지로 딩동- 보냈다. 그 세 권을 읽는 동안 그 시간들이 좋아서, 어떤 날은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읽다가 길동역에서 내려, 서둘러 집에 가는 대신 벤치에 앉아 책을 조금 더 읽고 들어가기도 했다. 나는 J 와 내가 그런 친구라는 사실이 무척 좋았다. J 와 내가 나누는 대화는, 다른 사람들(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책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일상을 얘기할 때도 직접적이기 보다는 돌리고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도 많았는데, 이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도, J 이기에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며칠전에,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다시 대화를 나누었다. 아, 좋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J 도 내게 그랬다. 내가 J 에게 까페라떼 같다고. 나는 J 에게 말했다. J 와의 대화는 광합성을 하는 기분을 준다고. 나는 당신과의 대화를 온몸으로 쭉쭉 빨아들인다고. 이런 대화를 하면서도, 이런 대화를 문자메세지로 나눌 수 있는 건, 우리가 'J 와 나' 이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J 와 나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우리 둘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좋아하는데, 어느 한날 뜬금없이 J 가 내게 문자메세지를 보내는거다. '지금 새벽 세시에서 아무데나 한 문장만 골라서 보내줘요' 라고. 그러면 나는 후다닥 그 문자를 보고 책장으로 달려가 새벽 세시를 꺼내서 이렇게 답을 보내는 거다.
<305페이지. 에미, 나에게 와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택시비는 내가 낼게요.>
J 는 너무나 마음에 든다고 좋아하고, 나는 이런 문장을 보내줄 수 있음에 좋아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대화를 하고 둘이 꺅꺅 거린다는 거다. 나는 이런 대화가 몹시도 마음에 드는데, 이런 대화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J 와 나이기에 가능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 대화는 몹시도 오글거리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둘의 대화는 우리 둘만의 것이므로,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에게 J 와의 대화는 순간순간 소중하다. 그런 J 와 나는 '다시' 대화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몹시 기쁘다. 하나하나, 나는 J 와의 대화를 흡수한다. 쭉쭉 빨아들인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 대해서는 하아- 할 말이 많은데, 나는 제일 처음 이 책을 조선일보의 신간소개코너를 통해서 알게 됐다. 제목이 너무 좋아서 그 신문을 보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주문했고 그러므로 내가 받은건 당연히 1쇄였다. 너무 좋아서 참 낡아질 정도로 들여다보고 밑줄 긋고 그랬는데, 몇 년후에 남동생도 이 책을 보고 그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이 책을 빌려줬다. 그리고 이 책을 돌려받기 전 남동생 커플은 헤어졌다. 하아- 나는 남동생에게 '내 책은?' 하고 물었지만, 남동생이 '헤어졌는데 차마 누나 책 돌려달라고 말할 수가 없더라' 하는거다. 나도 그럴거라고 생각해서 너무나 아깝지만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샀어 ㅠㅠ 오늘 내가 가진 책을 보니 15쇄였다. 히잉-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몇 년전에 소개팅한 남자에게는 소개팅한 그 날 사귀기로 하고 그 다음번 만남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을 빌려줬는데, 돌려받기 전 헤어졌다(근데 이 책은 다시 사고 싶진 않다). 얼마전에 회사를 그만둔 직원에게 '에이모 토올스'의 《우아한 연인》을 빌려줬다는 걸, 그 직원이 더이상 출근하지 않게 된 다음에야 기억해냈다. 하아- 그만두기 전에 그런것 좀 챙겨주고 가....이렇게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상황에서 상대와 다시 안 볼 사이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사실 책 한 권에 만 원 남짓하고, 또 책이라는 물건의 특성상 그걸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받을 생각 안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한테 책 한권 선물 못하겠냐, 하는 마음으로. 다른 것도 아닌 책인데. 그렇지만...그게 내가 읽은 '내 책' 이라서 짜증이난다. 이왕 책 선물을 할거라면, 내걸 돌려받고 새 책으로 하고싶다. 내가 밑줄 긋고 내가 접은 책, 그건 돌려받고 싶다. 내가 그렇게 주었던 책들을, 그중에 정말 좋았던 책들을 다시 사긴 하지만, 이미 그 책들은 내 책 같지가 않다. 그 새 책 냄새 풀풀 풍기는 것들을, 내가 좋아했던 예전 그 감정 그대로 좋아하게 되질 않더라. 그래서 우아한 연인은 지금 사지도 못하고 있다. 어차피 사봤자, 그건 내 책이 아니야, 더이상... 하아-
나는 현재 개인 도서관이다. 살아있는, 숨쉬는 도서관. 회사 직원들에게 책을 빌려주고 있는데 지금 나한테 책 빌려가서 읽는 직원들이 여러명이다. 어떤 직원은 금세 금세 반납하고 어떤 직원들은 몇 개월이 지나도 안가져온다. 뭐, 재촉하지 않고 내버려두는데, 아마도 그래서 그만둘 때 본의 아니게 먹튀..하는 듯.. Orz
최근에 나에게 빌린 책을 다시 가져다주는 직원들은 하하하하, 가져다줄때 마다 뭔가 하나씩을 꼭 끼워준다. 커피이기도 하고, 젤리이기도 하고, 과자이기도 하다. 얼마전에 한 직원은 무려 스타벅스 카드를 주더라!
내가 너무 놀라서 아니, 이런걸 주면 내가 앞으로 책을 어떻게 빌려주냐고 했는데, 직원은 그냥 꼭 드리고 싶었어요, 라며 주고 사라진다. 아마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뭐, 나를 좋아하는 게 이 직원뿐만은 아니지만. 인기투표 하면 이 회사에서 내가 일등할 자신이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뭐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내가 먼저 책 읽어볼래요? 하고 시작한건데, 어쨌든 지금 그래서 책 읽는 직원들이 늘어나 씐난다!! >.<
나는 아주 오래전에 토이 1집에서 '조규찬'이 부른 <내 마음속에>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같은 노래도 좋아한다. 좋아했다. 이번 새로운 앨범을 들으며 약간 두근두근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들으면서 '아, 나는 이제 에피톤이 더 좋다' 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비교를 하며 생각했다.
예전의 토이는 '나'를 노래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아프고 내가 서운한, 그런 노래. 그런데 지금의 토이는 약간 거리를 두고 '우리' 혹은 '너희들'을 노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다 이렇지' 의 느낌. 그런데 에피톤은 다르다. 에피톤은 지금, '나'의 노래를 한다. 지금 '나'의 상황, 감정, 생각에 푹 빠져서 부르는 '나'의 노래. 나는 그쪽에 언제나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오늘 출근길에 양재역에서 회사까지 걸으면서 들은 노래는 토이의 새 앨범에서, 이 노래가 신났다. 크리스마스 사랑 고백 송.
아하하- 하고 혼자 웃으면서, 이건 크리스마스에 사랑을 고백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들어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혹은,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듣고 크리스마스에 고백하면 되겠다, 라고도 생각했다. 혼자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사랑고백 송, 사랑고백 용기부여 송, 이라고 하면 좋을텐데, 그래서 나는,
이 노래로 고백하기는 싫다,
라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이번 토이보다 에피톤을 사랑하는 이유로 연결된다. 모두가 고백할만한 노래로 고백하고 싶진 않다. 모두가 고백할만한 노래로 고백 받고 싶지도 않다. 이건 대놓고 '이걸로 고백해', '이 노래 고백에 좋겠지' 하는 노래라서 듣기에 유쾌했지만 '아 너무 좋아' 하게 되진 않더란 말이다. 그보다는 에피톤 프로젝트의 <회전목마>쪽을 선호하게 된다, 나는. 그런데 왜 이렇게 쓰면서 희열이 형한테 미안한 마음이 드는걸까...왜 내가 배신한 마음이 드는걸까......희열이 형, 미안해요. 뭔가...좀 미안하네요...새 앨범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제는 내 취향이 에피톤으로 옮겨갔다는 거 뿐이에요.
그리고 다시,
저 택시비에 대한 구절이 몇 페이지였나 찾으려다가 다시, J 에게 보내주고 싶은 이런 구절을 보았다. 267-268 페이지. 또 포스트잇을 붙였다. 차곡차곡, 포스트 잇을 붙이는 책장이 늘어난다.
2시간 뒤
Re:
떠나기 전에 하나만 더. 레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저에 대한 관심을 잃었나요?
5분 뒤
Aw:
정말로 솔직한 답을 바라세요?
8분 뒤
Re:
네, 물론이에요. 솔직하게, 그리고 빨리요! 요나스 깁스 풀러 병원에 데려가야 한단 말이에요.
50초 뒤
Aw:
당신에게서 이메일이 와 있는 걸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어제 그랬고 일곱 달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꼭 그래요.
엊그제는 뭐 좀 찾아볼 게 있어서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를 뒤져야 했다. 페이퍼를 쓰던 중이었고, 그 페이퍼에 넣기 위한 인용문을 찾는거였는데, 음, 독서공감에 그 인용문이 없더라. 아, 여기에 없군, 어쩐다, 기억에 의해 쓰자,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독서공감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페이퍼 쓰기로 돌아오기까지 엄청 시간이 걸렸다. 어딜 넘겨도 재미있어서, 아, 지구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인 것 같다, 고 혼자 감탄했다. 세상에는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나는 어디든 낯선 곳으로 여행 갈 때마다 이 독서공감을 한 권씩 배낭에 혹은 캐리어에 넣어가야겠다. 이 재미를 나만 아는 건 지나치게 이기적이니까. 어딜 가든 두고 와야겠어... 이 재미를 모두와 나눠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