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민의 전작 《궁극의 아이》를 읽었을 때, 주변에서 극찬을 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좋지 않았기에, 이번에 신작이 나왔을 때도 심드렁했다. 그런 스타일의 글이라면 한 편만 보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그런데 어김없이 좋다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고, 내가 문학적으로 신뢰하는 지인 B 가 강력 추천을 하는 것이다. 너무나 재미있고 좋았다고. 그래, 그렇다면 읽어보자 하고 책을 꺼내들고서는 읽기 시작했는데, 내게는 역시 별로였다.
물론 이야기는 흥미롭고 재미있다. 어서 빨리 뒷장을 넘기고 싶고 문장력도 좋다. 머릿속에서 박진감있게 그려지는 장면들은 마치 영화같아 읽는 내내 이 책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게 훨씬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여기에 내가 애정할 수 없는 점이 있는 것 같다. 만약 책 속의 인물인 '가온'이나 '설아'에게 내가 몰입하고 공감해 그들의 내면을 따라갔다면, 나는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게 좋겠다, 라는 생각에 앞서 그들의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며 책 속 인물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건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는 생각은 내가 그들이 된 게 아니라 철저히 독자로 남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책 속 인물 누구도 될 수 없었다.
책을 다 읽고 추천해준 B 에게 나는 그렇게까지 좋지 않더라, 고 얘기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책에 대해 얘기하면서 서로의 문학적 취향에 대해 알아갔는데, B 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재창조해내는 것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러나 나는 역사적 사실도, 새로운 세계도 관심이 없다. 나는 개개인의 내면을 따라가야 한다. 그걸 할 수 있어야 그 책이 내게는 사랑할 수 있는 책이 된다. 그러자 B 는 내게 말했다. '너를 몰입시키기엔 캐릭터가 약했다' 고. 그래, 나는 가온도 설아도 될 수 없었다.
그러자 언젠가 정식이와 영화 《아바타》에 대해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새로운 종족,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이는 그 영화가 정말 대단하지 않냐고. 나는 물론 흥미롭게 보았지만, 그 상상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 영화가 좋은건 아니라고 답했다. 그래, 나는 세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세계가 아닌,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 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이런 세상'을 보여주는 작품보다는 '이런 세상속에 사는 이런 사람들'을 보여주는 쪽을 사랑하는 거다.
이건 여행을 갈 때도 느낀다. 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맛집도 사람들이 모이는 관광지도 크게 흥미가 없었다. 그런 데는 안 가도 그만이었다. 아름답고 멋진 장소에서 감탄을 할 수도 있고 그런 건 물론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나는, 그 안의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하는 게 더 많았던 거다. 이번에 홍콩에 갔을 때도, 비좁은 땅에서 2층 버스를 만들어서 이동하는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 금융가와 확연히 다른 그들의 차림새 같은 것들을 보며 마음이 거시기했던 거다. 그러면서 이런 걸 보고 거시기한 마음이 된다는 건, 내가 오만하다는 증거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고...
그러다 얼마전에 MBTI 자격증을 따서 테스트 해줬던 친구의 말도 생각났다. 나는 '개인'에 관심이 많다고. 쉽게 예를들면 본인의 성향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이사람을 재미있게 해주고 싶다, 나 때문에 재미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내 경우에는 '이 사람이 자신 나름의 이유로 재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할텐데' 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이 지적은 너무나 정확해서 깜짝 놀랐다. 나는 회사에서도 새로 직원이 들어오면 꼭 한 번씩은 그런 말을 한다. 출퇴근이 익숙해져서 하루 생활 패턴이 정착이 되면 그 다음엔 빠져나갈 무언가를 찾으라고. 그게 뭔지 모른다면 이것저것 한 번 해보라고. 운동도 해보고 책도 읽어보고 전시회도 가보고 음악도 들어보고 맛있는 걸 먹어보기도 하고 수다도 떨어보라고. 그래서 회사에서 빠져나간 에너지나 영혼 같은 것들을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물론 다 필요없고 집에서 퍼져서 자야한다고 생각하면 그게 답인 거라고. 이 모든 나의 말들과 MBTI 성향, 등장 인물의 내면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들이 모두 연관된 것 같았다. 나는 세계보다는 사람, 이라는 중심 축이 내 독서와 영화, 그리고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근데 왜 얘기가 여기까지 왔지. 여튼. 그래서 재미도 있고 흥미도 있으며 심지어 작가가 어마어마하게 공부까지 한 걸로 보이는 이 책이 내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고 훅- 하고 후려 갈기지도 않았다는 거다. 레 미제라블, 위대한 유산, 같은 작품들은 보면서 내가 눈물 콧물 다 흘렸는데. 지옥-천국은 완전히 등장인물이 되어 훅- 가슴에 날카로운 칼이 꽂혔는데.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에서 나는 완전히 에미가 되어 레오를 사랑했는데!!!!!!!!!!!!! 더글라스 케네디도, 기욤 뮈소도, 천명관도, 한 두권쯤 읽고나면 다음 작품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나는 했는데, 장용민도 내게는 그렇다. 이쯤이면 됐다, 싶다.
그리고 이 책을 읽다가 빡친 장면.
그곳은 일본식 정원 같은 지하 박물관이었다. 바닥에는 곱고 흰 모래가 깔려 있었고 그 사이로 검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길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모래 바닥에는 드문드문 천연석으로 이루어진 섬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사발을 엎어 놓은 것처럼 동그랗게 전정된 사철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위에 하얗게 고사한 단풍나무가 콘크리트 천장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로테스크한 행위 예술가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돌길을 따라 각종 유물들이 투명 케이스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유물들은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귀한 것들이었는데 신라 시대 청동 불상에서부터 나라 시대 자기, 아스카 시대 청동 검까지 다양했다. 그중에는 국립 박물관에 있어야 할 물건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노인은 산책을 하듯 여유롭게 돌길을 지나갔다.
"여긴 우리 가문의 박물관이네. 외부인이 들어온 건 자네가 처음이야" (p.254)
한 개인이 자신의 집안에 유물을 전시해 놓는다는 게 기가 막혔다. 옛것을 모으는 취미야 당연히 있을 수 있겠지만-나는 책을 사대지 않는가!-, 한 개인의 집 안에 가문의 박물관을 만들 수 있는 그 상황이 빡쳤던 거다. 이 책에는 말 그대로 정말 '지하'에서 살아가는 걸인들이 나오는데, 걸인과 개인 소장 박물관의 간극은 지독하게 멀지 않은가. 이게 속이 탔다. 불로의 인형을 차지하기 위해 욕심내는 인간들의 추악한 모습을 보는 것보다, 나는 저 개인소장 박물관이, 그걸 갖출 수 있는 커다란 부가, 그러나 반대편에는 제대로 먹고 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이 막 짜증났던 거다. 이런 상황이야 다른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또 현실에서도 종종 맞닥뜨리지만, 어휴, 저 개인 박물관 보는 순간 뭔가 폭발할 것 같았다. ㅠㅠ 그러나 그의 이를테면 '고상한 취미'에 내가 빡쳐도 좋은가? 세상은 모르겠는 것 투성이다.
어제 사람들을 만나 맛있게 술을 먹고 집에 가는데, 중간에 어떤 생각을 하다가 급 우울해졌다. 그 우울함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좀처럼 잘 되지 않았는데, 그래서일까 새벽에 딱- 얹히는 기분이 들면서 잠에서 깼다. 일어나서 손을 따고 오바이트를 하면 좀 나을 것 같았지만 당장 다음날이 출근이라 나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고만 싶었다. 참을만하니 참고 잠을 자보자 싶어서 내 손으로 내 배를 계속 쓰다듬었다. 내 배는 똥배, 내 손은 약손. 그러나 잠이 들라치면 탁 막힌 기운이 또 찾아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결국 잠을 자지 못한 나는 출근 전에 손을 땄다. 그리고 가슴에 얹혀있던 걸 모두 토해냈다. 덕분에 아침을 먹지 않았더니 지금 머리도 어질어질하고 힘도 하나도 없고 졸려...집에 가고 싶어 ㅠㅠㅠ 그러다 아침에 정식이랑 얘기를 조금 나누고 웃었다. 역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으흐흐흐. 아..죽 먹고 싶다..맛있는 죽 ㅠㅠ
아웅 오늘 K 대리가 왜이렇게 이뿌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