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69페이지 까지 읽었을 뿐이지만, 벌써부터 가슴이 서늘해진다. 주인공 '조앤'이 사막에 발이 묶인동안, 그녀가 돌아보게 될 그녀의 삶, 69페이지까지 돌아본 그녀의 삶이 이정도인데 앞으로 며칠동안 더 돌아보게 될 그녀의 과거는 어떤 모습일까. 그녀는 얼마나 많이 자신의 모습을 모르고 있었던걸까. 그녀는 얼마나 강하게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생각한대로 그리고 또 믿고 있는가.
이야기는 '조앤'으로부터 시작한다. 조앤이 바그다드에 있는 딸 바버라의 집에 갔다가 돌아가려는 기차역 숙소 식당에서 고등학교 동창 '블란치'를 우연히 만나면서부터. 학창시절 블란치는 모든 아이들의 우상이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초라해진 모습으로 혼자 앉아있다. 마흔여덟살인 그녀는 마치 예순살처럼 보인다.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었는지, 그래서 얼마나 한심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지를 조앤은 생각한다. 궁핍한 생활을 하는 블란치에게 언젠가 돈을 빌려주었던 생각도 나고. 그러나 블란치 역시 조앤을 발견하고 조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던 조앤의 모습이 사실은 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된다. 조앤이 그렇게 안다는 게 아니라 독자인 내가.
변호사로 일하는 유능한 남편과 제 각각의 몫을 알아서 잘 해내고 있는 성실한 세자녀들. 그러나 블란치는 그녀에게 '네 딸이 불행한 가정에서 도망치기 위해 맨 처음 청혼한 남자와 결혼했다'(p.17) 는 소문이 있다고 얘기하고 '네 남편이 연애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더라'(p.18) 는 말을 한다. 조앤은 믿지 않았다. 말도 안된다고 일갈했다. 조앤이야말로 블란치를 가여워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소리람. 그런데 그 한심하게 여겨졌던 블란치가, 그 어리석게 보였던 블란치가, 실패한 인생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블란치가, 조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 블란치는 그런 생각이 재미있는 듯했다. "넌 친절한 사람이야. 하지만 함부로 동정하진 마. 난 지금까지 꽤 재미있게 살아왔으니까." (p.20)
그러나 사람의 삶이란 게 그렇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판단할 수가 없는거다. 내가 보기에 한심해 보인 사람이 나름 자신의 삶을 최대한 즐기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사람의 눈으로 보는 나 역시 한심하고 초라할 수 있다. 늙어보이고, 늘 초라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돈이 없어 허덕이는 여자가 오히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의 삶 앞에 당당할 수 있다니. 조앤은 코웃음을 치지만, 기차가 기후사정으로 연착되어 사막에 발이 묶이고나자 의도치않게 블란치가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떠올려지는 과거의 삶 앞에, 나는 이제 조앤이 살고자 했던 삶이 어떤 삶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조앤이 원했던 건 '인정받는 삶' 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삶,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할 수 있는 삶,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삶. 그리고 그것이 조앤의 가족들을 얼마나 숨막히게 했는지를, 이제 나는 서서히 알게 된다. 단, 조앤은 아직 알지 못한다.
"나는 농사를 짓고 싶어. 리틀 미드 농장이 매물로 나왔어. 상태가 나쁘긴 하지만-홀리가 농장을 방치했거든-그 덕분에 싸게 나온 거야. 정말 좋은 땅이지, 잘 들어봐 ‥‥‥"
그는 빠르게 계획을 풀어놓았다. 전문 용어들이 쏟아져나오자 조앤은 적잖이 당황했다. (p.42)
조앤은 남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철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파트너 변호사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 대체 왜 그걸 마다하고 농사를 짓고 싶어한단 말인가. 조앤은 끊임없이 남편의 생각을 바꾸고자 설득한다. 남편은 변호사 일을 해보니 정말 나는 이 일이 싫더라, 고 얘기하지만 조앤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생각을 바꿔서는 안된다며, 자신의 말을 잘 들으면 행복할 거라고 장담한다.
"아니, 난 싫어해. 오 년동안 거기서 일했어. 내 마음이 어떤지는 내가 똑똑히 알아."
"적응할 거예요. 게다가 이제 사정이 다르잖아요. 아주 달라요.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결국은 업무에-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될 거예요. 두고봐요, 로드니. 결국에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질 테니까."
그 순간 로드니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슬픈 눈길로 오래도록. 사랑이 깃들었지만 절망감도 있었고, 그와는 또다른 뭔가도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희망이 슬쩍 번뜩인 것 같은 ‥‥‥
"내가 행복해질지 당신이 어떻게 알지?" 로드니가 물었다.
"분명 그렇게 될 거예요. 두고보면 알아요." 조앤은 재빨리 명랑하게 대답했다. (p.45)
아, 너무 싫다. 끔찍하다. 어떻게 타인의 행복을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본인에게 맞는 행복의 기준이 타인에게도 맞다고, 대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조앤이 그렇게 장담한 건, 그녀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자신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남자가, 그렇게 가족이 되어 함께 사는 남자가 자신과 다를 리 없다는 착각. 그에게 이토록 끔직한 희생을 강요해놓고 명랑해 질 수 있는 여자, 너무나 당당하게 너는 행복할 거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어리석은 여자.
저 순간, 남자는 자신의 결혼을 후회했을런지도 모른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좇지 못하는 상황을 원망했을테니까.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을 택했고, 그걸 선택한 이상 자신의 꿈만 좇자고 설득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는 것이 이래서 중요하다. 사랑과 이상은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이상의 방향이 다른 사람, 행복의 기준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사랑이 둘을 함께 살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될 순 있지만, 전부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나와 행복에 대한 기준이 다른 사람이라면, 나와 바라보는 방향이 맞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과 함께 사는 것 보다는 따로 떨어져 살며 사랑을 유지하는 쪽이 더 현명할 것 같다. 그게 서로의 행복을 무너뜨리지 않는 방법일 테니까.
여자가 떠올리는 며칠전의 바그다드. 자신에게 좀 더 있다가 돌아가라고 딸이 말하는 이유가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조앤은 당연히 생각하지만, 그녀가 회상하는 장면에서 나는 알 수 있다. 딸이 엄마를 붙잡은 까닭은 아빠를 좀 더 내버려두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딸이 그렇게 일찍 결혼해야만 했던 이유를.
'난 알고 싶지 않아' 라는 책 뒷표지의 문구를 보면, 아마도 내가 아직 읽지 못한 부분에서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진실을 알게 될 것 같다. 그 모든 사실들을 알게 됐을 때 그녀는 얼마나 휘청이게 될까.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무너지지 않을까. 이 책은 결국 어떻게 될까. 무너지는 그녀가 회복하게 될까? 아니면 무너지고나서 끝나고 말까? 현실을 부정할까? 무너지고나서 다시 일어서게될까? 어서 이 책을 읽고 싶고, 똑같은 마음으로 더이상 읽고 싶지 않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무척 우울했다. 아, 우울해지는 때가 또 왔구나. 나는 아침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를 지하철 역에서 youtube 로 찾아본다. 오늘은 책 읽지말고 음악을 듣자.
아! 우울한 기분이 이 영상을 보는데 풀리기 시작했다. 아, 너무 좋아. 나는 자꾸 웃었다. 저 병약해 보이는 남자가 힘차게, 안간 힘을 써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무척 좋은거다. 남자보다 300배는 더 강해보이는 핑크의 모습도 무척 마음에 들고, 높은음에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힘들게 노래를 해내는 남자를 보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거다. 아, 좋다, 좋아! 저 남자는 노래 한 곡을 끝내고 몸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듯하다. 당장이라도 수혈을 받아야 할 듯하지만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이 온 몸 전체에 퍼지는 것 같다. 하하하하하. 핑크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래, 이 기분을 유지하자 싶어 마이클 잭슨과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사랑스런 영상을 또 찾아봤다.
아 좋다 좋아. 브리트니의 저 건강함이 좋다. 야채만 먹고 비쩍 마른 여자들보다 나는 저런 단단함, 건강함이 좋다. 앗, 그러보고니 핑크도 건강건강! 아이쿠, 이 멋진 여자들. 좋구려~
오늘은 올림픽이고 뭐고 보지말고 일찍 자야겠다.
핑크 노래가 아침부터 너무 좋아서 오랜만에 음반하나 사자, 하고 알라딘 검색창에 '핑크' 넣었더니 '에이핑크'가 좌르륵 떠서 깜놀했다. 에이핑크, 니네 뭐냣. 어디서 핑크 검색하는데 껴들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