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티파니에서 아침을
어젯밤 엄마랑 티븨 드라마를 보다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저 여자는 어쩌다가 닥터랑 연애하고 결혼하게 됐을까? 그러자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 닥터가 여자를 쫓아다녔대.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닌데...어떻게 '닥터'를 만나 결혼했냐 뭐 그런건데.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닥터랑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여튼 잠깐동안 티븨를 보다가 들어가서 책이나 읽자, 하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친구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왔다. 처음으로 저녁식사를 하게 된 남자가 나랑 동갑이며 대학교 물리학 교수여서 기가 죽었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선을 봐서 만난 게 아니라 운동하다 만난거라 직업을 알고 만난것도 아닌데, 어떻게 우연히 교수란 직업을 가진 남자랑 데이트를 할 수 있었을까? 내 안의 속물근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왔다. 평소엔 내 잘난맛에 산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가끔 이렇게 누군가의 조건을 보고 기가 죽는 일이 생긴다. 대체적인 일상의 날들에 나는 '내가 아는 누구, 내가 만나는 누구'에 대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기보다는 '나'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렇게 사는것이 더 낫다고 믿고 있는 사람인데, 가끔 어떤 타이밍에는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고만다. '교수'란 직업은 어렸을 때 어렴풋이 근사하다고 생각했으며 환상적인 직업이라 여겨져 막연히 '나도 교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물론 교수를 하면서 같은 학교 남학생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는 불순한 욕망이 더 크게 자리잡긴 했지만, 어쨌든 공부와는 동떨어진 나는 그저 한순간의 로망 같은거였을 뿐 진짜로 교수가 될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래서 교수가 직업이거나 교수가 직업인 사람을 애인으로 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대단해 보였다. 교수랑 연애하는 건 어떤걸까, 뭐 그런 생각도 해보기도했다. 영화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보면서 그러나, 교수랑 연애하는 건 꽤 힘들고 어려운 일일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나랑 살면서, 나랑 연애하면서 매일 젊고 발랄한 여대생들 틈에 있게 된다면, 나에 대한 애정은 금세 식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들 때문이기도 했고, 동료교수랑 얘기하다 보면 나와는 대화가 한정적이지 않을까, 라는 못난이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뭐 어떤 생각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했든지간에, 나는 교수랑 연애를 해본 적도, 닥터랑 연애를 해본 적도 없다. 변호사 검사 모두. 그런 사람은 내 주변에 없는 저 너머 어디, 다른 세계의 사람 같은건데, 나를 만나 술도 마시는 내 친한 친구가 그런 교수를 만나 데이트를 했다고 하니, 나는 이날 이때껏 그 숱한 연애속에 왜 그런 직업군, 소위말해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는 직업군의 남자와는 데이트를 해보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친거다. 그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나보다 더 가난한 남자들이 내 연애상대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남들이 알아줄 만한 직업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더 나은건 아니라는 사실을. 실제로 그런 직업을 가진채, 더 좋은 학벌 더 높은 연봉을 받고 썩을놈이란 욕을 들어먹을 만한 사람들을 보기도 했었고. 직업과 돈이 더 나은 사람이란 걸 보장하진 않는다는 걸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더 많이 배우고 더 유식하고 더 돈이 많다해도, 예의 바른것과 거리가 멀 수도, 매너 따위는 키우지 않을 수도, 발기가 안되거나 1.5초만에 사정할 수도, 폭력을 휘두르는 개같은 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사귀는 남자가 잘났다고해서 내가 잘났다는 걸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언제나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끔 나는 지독하게 신세한탄을 하고야만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그런 사람들을 마냥 부러운 시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것이다. 나는 왜, 얼굴이 특출나게 예뻐서 버스정류장에서 저기요, 시간 있으면 차 한잔 하실래요, 라고 말을 거는 남자도 없고, 나는 왜, 하늘 높은줄 모르는 연봉을 가진 남자들과 사귀게 되지 않는걸까. 왜 내가 만나는 남자들은 내 외모에 반하는 남자도 아니고 왜 부자도 아닐까. 왜 그들은 지극히 평범하며 때로는 부족하게까지 느껴질까. 왜 그들에게서 누구보다 뛰어난 점을 찾는다면 그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 한 가지 뿐인걸까? 왜 그 사실이 내게는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조건 좋은 남자랑 연애하는 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시샘이 난다.
아까는 친구랑 이런 얘기를 메신저로 하노라니, 친구가 사주 얘기를 꺼냈다. 너 사주 볼 때, 그 때 그랬잖아.
락방씨는 락방씨보다 조건 좋은 남자 만나기 힘들어요, 라고.
아..그랬던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 조건이 뭔데. 내 조건이 이렇게 지독하게 평범한데, 이거보다 못한 남자들만 내 주위를 맴돌다니. 아, 무너지지 말자. 나는 무조건 나 잘난 맛에 살자. 내가 잘나면 되니까, 내가 잘났으면 됐지, 더 뭐가 필요한가. 닥터가 아니고 변호사가 아니고 교수가 아니어도 예의 바르면, 매너가 좋으면, 폭력과는 거리가 먼 남자라면, 발기도 잘 되고 사정을 조율할 수 있는 남자라면, 그래, 괜찮다. 우리가 웃으며 대화할 수 있다면 되는거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자. 이게 다 생리전증후군에서 나온거라고, 어깨에 힘을 빡- 주자. 가방 안엔 초콜렛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조건을 보고 기죽지 말자. 그거 보고 바닥으로 떨어지지 말자, 라고 생각하면서 전체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밉다. 못난이 생각하는 못난 여자가 된 기분이랄까. 나란 여자, 어쩔 수 없구먼.
그래서 그런지, 그냥 홀리를 보는 데 슬퍼졌다. 홀리가 나 같아서가 아니라 나랑 달라서. 홀리가 나랑 달라서 좋아해야 되는건지 우울해야 하는건지 모르는채로, 그냥 이 책이 슬펐다. 나는 하늘을 나는 사람이 아니고, 하늘을 나는 사람을 그저 밑에서 쳐다보는 사람이지만, 어쩌면 땅에 굳건히 두 발딛고 서서 하늘을 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게 가장 현실적이고 편한 게 아닐까. 그러나 하늘을 날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든 날아야 하겠지. 머릿속은 복잡하게 꼬이고 또 꼬이고, 최종적으로 홀리의 손을 잡고 바닥으로 내려오라 말하고 싶지만, 애초에 나는 홀리의 손을 잡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람.
"벨 아저씬 야생 동물은 절대 사랑하지 마요." 홀리가 충고했다. "그게 바로 닥의 실수였죠. 그는 항상 집에 야생 동물들을 안고 들어왔었어. 날개를 다친 매라든가. 한번은 다리가 부러진 다 자란 살쾡이를 데려왔지 뭐예요. 하지만 야생 동물에겐 마음을 주면 안 돼. 마음을 주면 줄수록 걔들은 더 강해지니까. 강해져서 숲 속으로 도망가버려. 아니면 나무 위로 날아가든가. 그 다음에는 더 큰 나무로 날아오를 거고. 그다음에는 저 하늘로. 그렇게 끝나는 거예요, 아저씨. 야생 동물을 사랑하게 되면. 나중에는 결국 하늘만 바라보며 끝." (p.104)
"행운을. 그리고 내 말 믿어요, 사랑하는 닥. 하늘을 바라보는 편이 하늘에 사는 것보다는 더 좋답니다. 무척 공허한 곳이에요. 무척 흐릿하고. 천둥이치면 다들 사라지는 그런 나라일 뿐이야." (p.105)
중간즈음 까지는 대체 뭘 말하고 싶은건지 잘 모르겠고 책장이 더디 넘어갔다. 홀리라는 여자에게 도무지 공감할 수 없기도 했고. 옆에 있었다면 잔소리 하고 싶은 여자였어..그런데 하늘에 있으면서 얼마나 공허했을까, 얼마나 공허하면 하늘에서 살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 점점 마음속에 퍼져나가 결국엔 책장을 덮고 한숨을 쉬게 됐다. 이상하게 마음이 아펐다.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살고 있는데, 그런 그녀를 보고 내 마음이 왜 아플까.
홀리가 하늘에 살았다면 그 하늘 다른 한 편에는 이 영화속의 주인공 '조던'이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평생 걸려 월급을 백프로 저축한다해도 조던처럼 살기는 불가능했을 터. 돈을 길에 뿌리고 다닐만큼 많이 가진 그는, 그 돈의 많은 부분을 마약과 여자에 쏟아부었다. 왜 하늘에 살면서 만족하지 못했을까. 그 하늘이, 그가 닿고자 한 하늘이었다면, 그랬다면 그는 약에 중독되지 않고, 섹스에 중독되지 않고도 충분히 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늘이 공허했던 건 아닐까. 큰 집 빠른 차 모델 아내를 가졌어도 왜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이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걸까. 일정부분에서 만족하는 게 좋았을텐데, 첫 아내가 '당신 달라졌어'라고 말했을 때 귀기울일 수 있었다면, 거기에서 멈췄으면 천둥치면 사라질, 그런 곳에 도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텐데. 물론 그는 다시 하늘을 날 준비를 하고 있지만, 하늘은 내게 너무도 높고 높은 곳이라 감히 가 닿을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역시 홀리의 말이 맞는 말인것 같다. 하늘을 바라보는 편이 하늘에 사는 편보다 나을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하늘을 바라보는 삶을 살 것이고, 가끔 일상속의 어떤것들이 하늘에 올라와보고 싶지 않느냐고 약올리면 그 때마다 흔들리면서, 또다시 중심을 잡을 것이다. 조던이 나랑 함께 사는 사람이었다면, 약을 끊으라고 울고 잔소리하고 타일렀겠지만, 결국엔 뒤를 돌아 그와 갈라섰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간극은 멀다. 손을 뻗는다고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걸로 만족하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역시 땅에 속한 사람이니까. 나는 땅에 속해서, 걷는 사람이라서, 조던이랑 함께 하늘을 날기 보다는 현실에서 디카프리오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기를 희망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이번엔 좀 디카프리오에게 줘요. 연기 진짜 쩔던데요. 그렇게 약에 중독되어 침흘리는 연기를, 월가에 입문해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그걸 그렇게 잘해내는 사람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디카프리오 줍시다!
근데 이 여잔 왜이렇게 이뻐.. 예쁘다기 보다는 뭐라고해야하지 암튼 짱멋져.. 마고 로비, 당신도 하늘에 살고 있는거 아닙니까, 혹시?
자, 다시 땅에서 일상을 돌 볼 시간. 점심 메뉴를 정하고, 뻑나버린 노트북 수리를 맡길 생각을 해야하고, 어제 점심에 배불러서 더 먹지 못한 갈비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갖고, 당장 구정에 돈이 필요한 데 그건 대체 어떻게 구해야되나 머리를 싸매고(고민해도 돈이 나오는 건 아니고), 왜 로또는 번호를 하나도 맞추지 못했을까 잠깐 생각해보고, 2월에 있을 모임의 기차표를 예매하고, 저울 위에 올라가 몸무게를 재보고(응?), 조카 사진을 보고, 책을 읽자.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여기 있을것이다. 가끔은 못난이가 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