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왜 사뒀는지 모르겠다. 고양이 사료 받을라고 산거였나...여튼, 별로 좋지 않겠지, 그렇다면 빨리 읽고 중고샵으로 고고씽, 하며 책을 펼쳤는데, 아이쿠야, 나는 이 책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밑줄을 그은 이상 내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 옆에 꽂아둘까 어쩔까 고민 좀 해보고.
그러니까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처음 밑줄을 그은 건 바로 25페이지의 이런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됐다고 해서, 모두에게 그렇게 살라고 희망적인 메세지만 던지려고 하지 않는 저자가 마음에 들었던 거다. '나봐요, 나는 이렇게 했잖아요, 이걸 진정 원했기 때문이에요, 당신들은 왜 못하죠?' 대부분의 꿈을 이뤘다는 멘토들이 해대는 멘트들이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웬디 웰치는 알고 있다. 모두가 다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음을.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고, 그 무엇보다 먹고 살기에 전념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주 힘든 일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점이 고마웠다. 꿈을 좇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의지박약아 취급하지 않아서.
그런데 읽다보니 이 저자가, 유머감각도 넘치고 마음도 따뜻하다. 새로 정착해 중고서점을 열게 된 마을에 서서히 섞여들어가는 모습이 인상깊다. 헌책방이 단순히 책에 대한 애정만으로는 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실감했다. 헌책방은 책과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책과 사람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 곳이었다. 사람들은 이 중고서점에 들러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소개되는 사연들이 인상깊은데, 그 중 몇 개의 이야기에는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에세이가 이럴 수 있다니, 이 에세이는 내가 그간 읽어왔던 에세이들에 비하자면 아주 훌륭한 에세이로구나.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빨아들이다니.
어느 화창한 봄날, 잘생긴 청년이 들어오더니 제임스 패터슨의 책을 찾았다. '터커(라고 하자)'와 나는 교회에서 만나 아는 사이로, 나는 그가 좀더 고전적인 소설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터커는 이 지역 독서클럽 회원이었는데, 그 독서클럽 회원들은 사람 많은 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혼자 욕조에 앉아 있을 때도 제임스 패터슨의 소설 같은 건 절대 손에 잡지 않을 사람이었다. 터커는 자기가 찾는 책의 제목조차 몰랐다(패터슨 군단이 출판한 책이 일흔두 권이나 되는데 제목을 모르면 어쩌라는 건가). 그게 "처음에 나온 책"이라는 것만 알았다.
"혹시 《스파이더 게임Along Came A Spider》을 말하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터커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어쩌다가 이 작가한테 재미 붙였어요?" 터커를 미스터리 및 스릴러 방으로 안내하면서 물었지만, 사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짐작할 수 있었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대답했다. "어떤 아가씨를 만났거든요."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계산한 페이퍼백을 건넸다. 물론 둘이 잘 안 될 거라고 그 자리에서 말해줄 수도 있었지만, 내 일이 아니라서 그냥 입 다물었다.
터커는 그 뒤로도 패터슨의 소설을 두 권 더 사 가더니 여자친구와 헤어졌음을 알렸다. 그리고 나중에 리 스미스를 좋아하는 멋진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우리는 두 사람에게 결혼 선물로 《결혼은 살인이다Marrige Is Murder》《사랑하고 소멸하고 To Love and To Perish》같은 코지 미스터리 열댓 권을 선물했다(코지 미스터리가 뭔지 모르는 독자들은, '주인공들이 새로운 요리법이나 섬세한 수공예에 푹 빠져, 옆에서 누가 죽어다고 콧방귀도 안 뀌는 범죄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pp.229-231)
터커가 고전 취향인데, 좋아하는 여자가 전혀 다른 취향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그 둘이 '잘 안 될 거' 라고 생각하는 게 내게는 좀 낯설었다.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책을 좋아하는 취향은 전혀 다를 수 있는게 아닌가. 나는 오히려 전혀 다른 취향의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는 게 너무 예뻤다. 물론, 저자가 예상한대로 그 둘이 깨지긴 했지만. 이 일화는 '책방 안에서 일어난 일은 책방 안에서만 머문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소개한건데, 뒷 얘기 때문이다. 뒷 얘기가 더 재밌다. 나는 이 뒷 얘기를 하기 위해 저 긴 걸 옮겼다능...
터커와 그의 아내 '비키(라고 하자)'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갈 때까지 우리 책방을 자주 찾았다. 한번은 내가 비키에게 제임스 패터슨의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비키는 뒷표지의 소개글을 읽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두어 권 읽어봤는데, 터커는 한 권도 안 읽어봤대요."
머릿속의 생각보다 먼저 내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에요. 전에 우리 가게에 와서 몇 권 ‥‥‥" 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차 싶었다.
터커의 아내가 썩은 미소라고밖에 묘사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의미를 해석할 수 없는 윙크를 내게 날리고는, 남편이 고전문학을 고르고 있는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듣는 귀가 그렇게 많은데 신경도 안 쓰고 패터슨의 책을 남편 얼굴 앞에 휘두르며 소리쳤다. "거짓말쟁이! 그년하고 데이트한 적 없다며!" (p.231)
하하하하. 어쨌든 이 일로 저자인 웬디 웰치는 교훈을 깨닫게 된건데, 서점을 차리고 정착하기까지 그리고 그 서점의 매출이 안정권에 접어들게 될 때까지, 무모한 도전이었던 만큼, 무계획의 도전이었던 만큼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사실,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특히나 마을 주민 한 명이 고양이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이야기는 눈물이 핑 고여서 얘기하고 싶은데, 내가 이것저것 다 얘기하다 보면 타자 치느라 팔목이 아플 것 같으니, 다 생략하고, 하나만 더 이야기 해야겠다. 팔목이 두껍다고 더 많은 타자를 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하루는 글을 읽을 수 없는 남자가 서점에 찾아와 '글을 읽는 법'에 대한 책을 사고 싶다고 한다. 웬디 웰치는, 그런 책들이 몇 권 있지만, 이건 글을 아는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줘야 한다, 혹시 도와줄 사람이 있느냐, 라고 묻는다. 남자는 없다고, 혼자 산다고 한다. 그러자 웬디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거라고, 이 동네에도 읽기 강좌가 있을 거라고 하며, 그런 강좌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 세 명에게 급하게 이메일을 보낸다.
그리고 이 분도 안 되어 전화벨이 울렸다. 제시카가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스티브(라고 하자)'를 어디로 보내면 되는지 알려주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또 전화가 울렸다.
"전화하라더니 통화 중이야?" 이사벨이 뿌루퉁하게 꾸짖었다. "설명해주게 전화 바꿔봐."
그렇게 해서 알아낸 수업 장소로 잭이 스티브를 직접 데려다 주었는데, 알고 보니 스티브의 집에서 몇 블록 안 떨어진 곳이었다(스티브가 이정표와 설명만으로는 못 찾아갈 듯해 일부러 데려다준 것이었다).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또 전화벨이 울렸다. 청소년 단체 관계자가 읽기 강좌를 진행하는 선생님에게 연락해서, 그 선생님이 다시 내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잭이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음료가 담긴 잔을 만지작거리다가-밖의 기온이 32도는 됐을 것이다-한마디했다. "대단했어."
"나도 얼떨떨해요." 내가 대꾸했다. "쉰네 살이나 됐는데 자기 이름밖에 못 읽는다니, 믿겨요?"
잭이 손사래쳤다. "내 말은, 우리가 몇 분 만에 네트워크를 가동시킨 게 대단했다는 거야. 그 사람, 겨우 ‥‥‥얼마였더라, 십 분만에 도와줄 사람들이 생겼잖아."
방금 일어난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잭의 말을 듣는 순간 따스한 감동이 밀려왔다. 먼저, 한 남자가 비웃음이나 놀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지 출신인 우리 책방에 들어와 도움을 청했다. 둘째, 내가 도움을 청할 사람을 세 명이나 떠올린 것도 새삼 놀라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락을 취한 세 명 모두 거의 곧바로 전화를 해주었다.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pp.302-303)
글을 읽지 못하는 당사자인 스티브에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서 도움을 요청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당연히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용기를 내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강의 얘기를 했다면, 자칫 스티브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에겐 자존심이 가장 중요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도와달라고 자기 사정을 얘기했고, 이에 웬디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내고 연락한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도움의 손길을 맞잡아 응대한다. 그들이 거절하지 않고 도와주려고 했기 때문에, 스티브는, 쉰넷의 나이에 비로소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흑.
게다가 웬디는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던 분야의 책들에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모든 사람들의 책에 대한 취향이 다른것처럼.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나이든 여자가 '딘 쿤츠'의 책을 찾는걸 보고, 그녀의 취향이 이해되지 않았던(전혀 다른 취향의 책도 찾는 여자니까) 웬디는, 그녀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나는 딘 쿤츠의 소설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온갖 시름을 싹 잊게 해주거든요. 이 양반 책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일들에 비하면 나한테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요." (p.377)
아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헌책방을 운영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이 책을 읽으면서 좀 희미해졌다. 그녀의 헌책방이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곳을 마을회관처럼 찾는 사람들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단골이 되고, 그들과 좋은 친구가 되고, 웬디의 책방을 사랑방처럼 찾는 건 물론 의미있고 뜻깊은 일이지만, 내가 해낼 수는 없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는 장소에서, 내가 일하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뜨개질을 하고 독서모임을 하고 글쓰기 수업을 하는 일. 그 일을 내가 좋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나는 아마도 처음부터 그런 모임을 가지려 하질 않았을 것이고, 추진도 하지 않거니와, 설사 제안이 들어와도 '다른곳에서' 하라며 거절하게 됐을 것 같다. 지역공동체가 살아가는 건 바로 그런 끈끈함이 바탕이 되기 때문일텐데, 나는 그보다는 이방인이기를 더 즐겨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고 고르고 사는 일까지는 즐겨할 수 있지만, 자리잡고 앉아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건 못할 것 같은, 나는 그런 사람인거다. 어딘가에 소속이 된다는 건, 내게는 그다지 달갑지가 않다. 학교도 싫었고 회사도 끔찍한데...쩝. 어딘가에 소속되는 건 이것만으로 정말이지 완전 충분하다.
이 책을 읽다보니 당연히 몰랐던 책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데, 제일 기가찼던 건, 새뮤얼 리처드슨의 [클래리사] 라는 작품. 이 작품은 웬디와 친구들이 '싫어하는 작품'에 대해 얘기하며 언급한 작품인데, 뭐길래 그렇게 싫어하지? 하고 검색해봤다. 호기심에 읽어볼라고. 그런데 헐. 여덟권이나 되는 게 아닌가! 윽.
'보디스 리퍼'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알게됐다. '남자가 여자 주인공의 속옷을 찢는 장면이 자주 등장해 붙여진 로맨스소설의 별칭' 이라는데, 아흑, 이런게 어딨단 말이냐, 대체. 보디스 리퍼 장르의 소설 아시는 분들은 제게 추천 좀 해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꾸벅) 읽고싶다 읽고싶다 읽어보고싶다...
밑줄 그은 문장들이 제법 되는데, 그건 봐서 마음이 내키면 옮기던가 해야겠다.
오늘 이 책방에 대한 영상을 찾았는데, 하하하하, 잭과 웬디 모두 내가 상상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