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장 처음 피자를 사준 사람은 막내이모였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던것도 같고 중학교 1학년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제과점에 들어가 팥빙수와 빵을 제일 처음 먹어보았을 때도 막내이모와 함께였다. 막내이모는 피자를, 팥빙수를, 제과점 빵을 사줬고 샤프와 노트를 사주기도 했다. 영화를 보러 극장에 데리고 가 준 사람도 막내이모였다. 나는 막내이모 덕에 극장에 가서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라는 영화를 봤다. 샤프와 노트를 사주는 건 우리 엄마도 해 준 일이었지만, 극장에 데리고 가고 제과점에 데리고 가고 피자를 사다 준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이모였다. 


가끔 내가 조르면 엄마도 책을 사 주셨지만, 나는 내가 골라서 읽는 책 보다 이모네 집에 갔을 때 이모 책장에 꽂힌 책을 빼내어 읽는게 더 좋았다. 내가 고른 책들은 기껏해야 어린이신문에 실린 책들이 전부였지만 이모네 집에 가면 어른들의 소설이 있었다.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책들을 그 때는 빼내어 읽었다. 어떤 책이었더라, 밀크 초콜렛, 하얀 겨울, 겨울나그네, 뭐 이런 뉘앙스의 제목이었는데, 그 책을 읽을 때는 이모가 그건 아직 네가 읽으면 안될 것 같은데, 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읽었고, 이모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모의 책장에 책은 결코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가면 언제나 꼭 읽고 싶은 책들은 있었다. 


잘 때는 주로 이모 옆에서 누워 잤는데, 그 때 이모가 조용히 틀어두었던 음악들을 기억한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건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 이었다. 그 뒤로 나오는 노래는 신승훈의 노래가 아니었던걸로 보아, 그 테입은 아마도 최신인기가요 테입이었던 것 같다. 이모는 나랑 고작해야 십년남짓 나이차이가 날 뿐이었고, 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는 이모에게 더티댄싱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내 기억속의 이모는, 엄마가 내게 해주지 못한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었던 사람이다. 지금은 딱히 그렇게 살갑거나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요즘의 나는 내 조카에게 그런 이모인 것 같다. 제 엄마가 채워주지 못하는 것들을 채워주는 환상의 존재. 아직 3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이 작은 아이가 내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어한다. 샤워를 하고난 후의 내게 찰싹 달라붙어 화장품의 뚜껑을 열어준다. 외출하려는 나에게 이모 예쁘다, 라고 말하고 같이 외출하려하면 나에게 구두를 신으라고 말한다. 제 엄마는 그렇게 높은 구두를 신질 않으니까. 간혹 내 구두에 제 발을 쓰윽- 밀어넣고는 신발장에 달린 거울을 보기도 한다. 항상 책이 들어 있어 무거운 내 핸드백을 조카는 들어보려 한다. 아이쿠 무거워 들지마, 라고 말해도 기어코 한번 들어올린다. 며칠전 어린이집의 한 아이가 손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왔는가보다. 집에 돌아온 조카는 제 엄마에게 매니큐어를 발라달라 했단다. 여동생은 엄마는 매니큐어가 없어, 라고 말했고, 조카는 이모는 있어, 라고 말하고난 후 이모에게 발라달라 할거야, 라고 했단다. 우리집에 오면 내 방을 가장 좋아하는 조카는 내 화장대에 뭐가 있는지 깜찍하게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어제 우리집에 온 조카는 내 발에 칠해진 매니큐어를 보고는 자신이 매니큐어를 바르고 싶었단 걸 기억했다. 이모, 매니큐어 발라줘, 란다. 



조카는 내게 열 손가락을 내밀고 나는 거기에 차곡차곡 매니큐어를 칠해줬다. 조카는 이내 발도 내민다. 나는 조카의 발톱에도 차곡차곡 매니큐어를 발라줬다. 움직이면 안돼, 이거 다 마를 동안 가만히 있어야 돼, 라고 하니 조카는 이내 얌전해진다. 마치 짓궂은 사내아이처럼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소리지르고 노래부르고 구르는 조카인데, 손가락을 쫙 펼쳐서는 조심조심 걷는다. 조카야, 이제 다 말랐어, 손가락 움직여도 돼, 라는데도 굳이 쫙 펼치고는 조심조심한다. 여동생은 이 모습을 보고는 잘됐다고 한다. 얌전해졌다고. 



여동생과 조카와 내가 외출을 했다. 외출후에 돌아오니 온 몸이 끈적거린다. 여동생은 조카와 샤워를 하기 위해 들어갔는데 곧이어 조카의 벼락같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여동생은 계속해서 말한다. 안지워져, 안지워진다고, 이거봐 안지워져. 나는 똑똑 노크를 한 후 욕실에 얼굴을 빼꼼 들이민다. 왜그래, 무슨일이야? 조카는 자신의 열 손가락에 물이 닿자 울어대기 시작한거다. 매니큐어 지워진다고. 나는 조카에게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조카야, 지워지면 또 발라줄게, 라고 말했다. 그래도 조카는 좀처럼 울음을 멈추질 않는다. 



샤워를 하고난 조카가, 발톱의 매니큐어를 다시 칠해달라 한다. 내가 칠해준 매니큐어는 보라색 반짝이었는데, 아까 조카가 발라주자마자 움직여 이불에 묻었고 그에 연해졌던 것. 아마도 샤워후에 다시 보니 그게 보였는가보다. 나는 알았다고 다시 발라준다. 다시 발라준 매니큐어는 처음보다 좀 더 진해졌다. 조카도 이 사실을 알아챘다. 다시 열 손가락을 내민다. 손도 또 발라줘, 라고. 나는 조카의 손에 다시 매니큐어를 발라준다.



매니큐어를 바른 조카는 연신 자신의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예뻐, 예쁘다, 한다. 아직 자신의 아이를 갖지 않은 이모는, 아직 누군가의 부모가 되지 않은 이모는, 여자조카에게 환상의 존재, 되고 싶은 존재가 아닐까, 꿈을 이뤄주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내 어린 조카를 보면서 한다. 나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들고 다니며, 화장을 하고 외출하고, 매니큐어를 발톱에 바르는 이모다. 


아, 어제는 내 방 책장에서 책을 두 권 꺼내들고 와(예의 그 수키시리즈) 한 권을 내게 읽어보라며 내밀고는 자기도 펼쳐든다. 글을 읽지 못하는 조카는 중얼중얼하고 나는 글씨를 읽는다. 읽기를 멈추면 조카는 고개를 들고 나를 본다. 계속 읽어, 라고 말한다. 


나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들고 다니며, 화장을 하고 외출하고, 매니큐어를 발톱에 바르고, 책을 읽는 이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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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6-0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의 성별이 궁금합니다.

다락방 2013-06-07 17:07   좋아요 0 | URL
조카의 성별은 제 성별과 같습니다. ㅎㅎ

2013-06-07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1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3-06-0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쁘다~ 신발 신어보려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귀여워요^^
어제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울 언니 만나 이야기 했는데, 어린이집에서 일하지만
애들 절대 어린이집 보내면 안된다고 강조하더군요. 울 언니는 애들 이뻐해요. 그래서 안아주고 달래주려고 하면
원장이 너무 싫어해서 눈치 많이 본다고, 어제 원장 욕을 한웅큼 했어요.
정말 원장은 아이들 하나 하나가 돈으로만 보인다고..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울 언니도 굉장히 회의적으로 어린이집 원장 바라보던데,
다락방님 조카는 엄마랑 이모의 사랑 듬뿍 받으니 얼마나 좋아요~

간만에 컴 켜고 들어오니 댓글도 길게 달고 좋네요. 모바일로는 덧글 진짜 안 달게 되더라구요~

다락방 2013-06-11 17:52   좋아요 0 | URL
저는 서운하기도 해요, 기억의집님. 너무 빨리 자라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지금 너무 예쁜데, 이 예쁘고 순수한 모습이 사라지고 어른이 되어갈 거란 걸 생각하면 좀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다 싶고 그래요.

조카도 지금 어린이집 다니고 있는데, 처음엔 적응 안되서 가기 싫어 하더니 이제는 어린이집 가는거 되게 좋아해요. 게다가 좋아하는 친구까지 생겼나봐요. 이성으로...orz
빨리 가고 싶다고 하고 막 그래요. 어린이집에서 잘 지내는건지 어쩐건지 하루종일 어떻게 노나 지켜보고 싶기도 해요. 조카 보고싶네요, 기억의집님. 흑흑.

레와 2013-06-0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 ^^

다락방 2013-06-11 17:52   좋아요 0 | URL
나도. 히히 :)

비로그인 2013-06-08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가끔씩 우리 집에 와서 이모 좀 해주세요~ㅎㅎ

다락방 2013-06-11 17:52   좋아요 0 | URL
저 여기 대기하고 있다가 둘째조카 나오면 또 힘 센(응?) 이모 되어주어야 해요. 둘째 조카가 여동생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답니다. 흣.

자작나무 2013-06-08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 속의 이모는 만날 때마다 만원을 주셨지요.

다락방 2013-06-11 17:53   좋아요 0 | URL
오! 완전 좋은 이모네요. 이모가 부자셨나봐요. 만원 씩이나....부럽........습니다.

치니 2013-06-0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이 포스팅 눈물나게 좋네요.

다락방 2013-06-11 17:53   좋아요 0 | URL
눈물까지나;; 히히.
아 조카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요 치니님 ㅠㅠ

오로라 2013-06-10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이모가 저한테 딱 그런 존재였어요.예쁘고 엄마보다 더 다정한! ㅎㅎ 이모가 보고싶어져 문자 한번 보내야겠네요~

다락방 2013-06-11 17:54   좋아요 0 | URL
흐음. 예쁜거로 치자면 저는 조카의 엄마에게 밀려요. 하하하핫
다정한거로도 밀리는 건 아닐까...
저는 그저 회사다니는 이모일 뿐이네요. 하하하하

이모님께 문자는 보내셨나요, 오로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