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로맹 가리'의 『유럽의 교육』을 읽고 싶었는데 품절이었다. 막연히 나중에 중고샵에 들러서라도 사야지, 하며 간혹 검색해봤는데, 언제였지, 품절이 풀린거다. 그래서 잽싸게 사두고 책장에 꽂아 두었었다. 그러다가 얼마전에 이 책의 개정판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 속쓰려..조금만 참을걸. 개정판 표지가 더 멋지구먼...아니다, 그래도 괜찮다. 굳이 개정판으로 읽지 않아도 좋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영화 『타인의 삶』의 '비즐러'가 떠올랐다. 극작가와 배우가 사는 집을 염탐하고 도청하는 비즐러. 그런 그가 어느날 극작가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감동하고 만다(극작가가 틀어둔 음악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그 때의 음악은 비즐러에게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인식된 것. 예술 앞에서 제대로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근사한가. 그 순수한 감동을 나는 존경한다. 그리고 이 책, 『유럽의 교육』에서의 열네 살 소년, '야네크'도 피아노 연주에 감동한다.
"피아노 쳐주세요." 그가 불쑥 부탁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아노로 갔다. 놀라워하지도, 이상해하지도 않는 듯했다.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연주를 했는지 야네크는 알지 못했다. 그는 정말 알지 못했다. 한 번도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어느 순간 그녀가 몸을 돌렸다.
"쇼팽이야. 폴로네즈란다." 그녀가 말했다. (p.33)
야네크에게 쇼팽의 폴로네즈는 특별한 음악이 된다. 나는 쇼팽의 폴로네즈가 어떤 곡인지 알지 못하고, 그 곡을 듣는다고 해도 그 곡에 정신을 잃을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전쟁중에 부모를 잃고 혼자 살아가는 소년이 피아노 연주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에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어쩌면 예술이 우리를 구원해주는 마지막 보루일지도 모르겠다.
"쇼팽의 폴로네즈야." 그녀가 말했다.
거기에 모인 빨치산들 중에는 십 킬로미터 이상을 걸어 거기까지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모두들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듯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소리를 한 시간이 넘도록 들었다. 피로에 지치고 상처받고 굶주리고 쫓기면서도, 어떤 추악함도 어떤 위기도 손상시킬 수 없는 품위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한 시간이 넘도록 그렇게 자신들의 믿음을 찬양했다. 야네크는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p.69)
쇼팽의 폴로네즈는 어떤곡일까? 나이도 다르고 처한 입장도 다르지만, 비즐러와 야네크가 묘하게 겹친다. 자꾸 나는 비즐러 생각이 난다.
이 책 속의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은 전쟁으로 인한 아픈 생활을 담보로 하고 있다. 감히, 거기에 무어라 말을 덧붙일 수가 없다. 도대체 왜, 전쟁은 일어나는 것일까. 그들은 누구를 위해 총을 들고 싸우는걸까. 그들은 누구를 위해 숲에 숨어있어야 하는걸까.
그녀는 자문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인데, 평화롭게 사랑하는 것, 굶어 죽지 않는 것, 얼어 죽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지구는 둥글며 자전한다든가, 맞춤법이 어떻게 된다든가 하는 것 등 제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다 깨우치는 것보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p.194)
이 전쟁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은 누구일까? 적어도 참전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있다. 또 귀환해봤자 그들의 가정은 파탄이 나 있을 것이다. 아니다. 전쟁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슈미트 같은 작자에게 내가 멀리 가 있을 때 나에게서 내 아내를 빼앗아가는 이 슈미트 같은 작자에게 ‥‥‥ (p.267)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계속 행복할까? 행복하기만 할까? 그 틈으로 불행을 끼어들 여지가 없을까? 정말 그럴까? 이 책속의 조시아는 야네크에게 말한다.
"너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어째서?"
"왜냐하면 너는 불행하니까.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는 그 무엇도 너를 불행하게 하지 못해. 알겠지, 나도 대단한 걸 배웠어." (p.274)
나는 내가 사랑했던 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때의 나는 불행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는지. 그런데 잘 떠오르질 않는다.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때의 사랑했던 순간들만 떠오를뿐 불행했다고 느꼈던 기억들이 떠오르진 않는다. 이건 사랑에 대한 기억이 불행에 대한 기억보다 더 강해서인지, 정말로 사랑할 때는 어떤 불행도 나를 침략하지 못하는지, 단순히 시간이 오래 되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건지 잘 모르겠다. 정말 그럴까? 사랑하고 있을 때는 그 무엇도 나를 불행하게 하지 못할까? 그럴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다.
로맹 가리는 읽을수록 궁금해진다. 읽을수록 로맹 가리를 알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질 않고 대체 그의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과 이야기와 아픔들이 숨겨져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던걸까. 어떻게 이런 글들을 쓸 수 있을까, 하고. 그의 단편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서도 엄청 멍했던 기억이 있는데 장편도 마찬가지. 아직 내가 읽지 못한 그의 작품들이 있다는 것이 나를 들뜨게 만들지만, 그러나 그것이 유한하다는 것은 조금 슬프다. 그가 살아있고 그래서 계속 글을 써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 지난밤,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는 꿈을 꾸었다. 만나본 적 없는 알라디너와 밤 새 술을 마시는 꿈이었다. 지칠정도로 술을 마시고 어디에서 자야 되나 허우적대다가 깼는데, 대체 이게 뭘 뜻하는 꿈인지 모르겠다. 봄이 되려니 그저 봄날의 개꿈인건가.
- 어제는 조카를 만나고 왔다. 조카는 하루종일 땅콩을 먹는다. 땅콩이 좋으냐고 물어보니 응, 이라고 대답한다.
땅콩이 좋아, 이모가 좋아?
땅콩이 좋아.
아, 나는 땅콩만큼도 못한 이모. 흑흑. 조카의 사랑을 받고자 조카가 갖고 싶어하는 인형도 사서 선물로 들고 갔건만 조카가 좋아하는건 이모가 아니라 땅콩이다. 무릇 사랑이란 그런것이다. 나에게 잘해줘서 나에게 친절해서 할 수 있는게 아닌것이다.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좋은거, 그게 사랑인거다. 조카는 인형을 사주고 놀아주는 이모보다 땅콩을 더,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것이다.
- 2공장에 있는 L 대리와는 업무상으로 가끔 통화할 일이 있다. 전화를 하면 항상 작고 조용하고 지친 목소리로 자신의 소속을 밝히는 L 대리이지만, 전화를 건 상대가 나인걸 알면 갑자기 목소리가 밝아지고 힘차진다. 네, 과장님! 하고. 나는 그게 너무 웃겨서 한 번은 물었었다. 대리님, 항상 침울하게 전화받다가 저라고 하면 목소리 밝아지는거 아세요? 하니까 본인도 안단다. 그래서 내가 그거 너무 웃겨요, 하니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목소리가 달라진단다. 그래서 푸핫, 하고 뿜었었는데, 엊그제 금요일은 더 심했다. 나라고 밝히는 순간 갑자기 과장님!!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거다. 아 놔, 나는 말도 뭇하고 그냥 뿜어버렸다. 그리고 타부서의 C 대리에게 L 대리는 너무 귀엽다고 말했다. 하하. 귀여워... 그렇지만 L 대리가 귀엽다고 L 대리 본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 여동생과 남동생과 함께하는 스맛폰 그룹채팅창으로 나는 메세지를 띄웠다. 어제 티븨를 보다가 현빈의 티븨 광고를 보고 또 심장이 훅끈- 해졌던 것.
「현빈이랑 커피 한 잔 하고 싶다.」
그러자 남동생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나랑 하자 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현빈 광고 볼 때마다 미치겠다. 진짜 커피 한 잔 하고 싶다. 좋아하는 남자랑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건 진짜 완전 짱 좋잖아!! ㅠㅠ
- 좀전에는 뒷산에 산책을 다녀왔다. 남동생은 아빠의 K2 자켓을 입고 갔다. 따뜻해서 좋다고 말하더니 이어 이렇게 말했다.
나 K2 입으니까 현빈 같지 않냐?
하아- 일요일이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 벌써 오후 네 시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