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해연(진산)'의 소설 『가스라기』에는 이름이 '한입이' 인 토끼가 나온다. 주인공 가스라기가 언제고 잡아먹기 위해 이름을 '한입이'라고 지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이름을 가진 한입이는 가스라기의 식량이 되지 않고 친구가 된다. 한입이란 이름이 색다르게 느껴져서 나는 언제고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게 된다면 그 이름을 한입이로 지을테다, 라고 생각했었다. 잔인하게 느껴지지만 실상은 잔인하지 않은, 이름. 그리고 나는 이름이 '기린'인 몰티즈 강아지를 이 책에서 만난다.
제일 처음에 실린 단편 '김연수'의 「깊은 밤, 기린의 말」이 바로 강아지 기린(!)이 등장하는 소설. 등장인물인 자폐아 태호는 다른 모든것에 반응하지 않지만 유독 '기린'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다. 기린이란 단어에 웃는다. 그런 태호가 애완견센터의 몰티즈를 보고 좋아한다. 그 몰티즈를 태호의 엄마는 집으로 데리고 오고 당연히 이름을 '기린'이라 짓는다. 오, 색다른데. 나도 앞으로 강아지와 함께 살게 된다면 이름을 기린이라 지을까? 그리고 책장을 넘기다가 이런 문장을 읽었다.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나면 기린은 어쩔 줄을 모르고 덜덜 떨다가 구석으로 도망갔다. (p.33)
이 문장을 읽고 내가 떠올리는건 진짜 기린이었다. 목이 아주아주 긴, 그 기린. 청소기와 기린이라니, 기린이 거실의 구석으로 도망가는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리다가, 어떻게 그 커다란 기린이 거실에서 구석으로 도망간단 말인가, 하다가, 아뿔싸, 이 기린은 그 기린이 아니지, 내가 생각해야 하는건 강아지지! 하게 됐던것이다. 아, 이름이 가진 강력한 힘이여. 내 머릿속의 기린은 너무도 선명하게 기린으로 박혀있어 책 몇장으로는 쉽게 그 이미지가 바뀌지 않는것이다. 지금도 기린, 이라고 하면 강아지보다 길고 긴 기린 생각이 먼저 난다. 기린이라니!
그렇게 이 소설을 읽다가 나는 그만 이런 문장에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말았다.
시라는 건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바람개비의 푸른 원 안에 든 하늘이라는 건 그날 밤, 북상하던 제4호 태풍을 뜻하는 것일까? 아이가 석류처럼 웃는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일까? 그리고 왜 보이지 않는 소망만 진짜 소망이란 말일까? 우리는 마트에 가서 석류까지 사서 먹었지만, 석류처럼 웃는다는 게 어떻게 웃는 것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대신에 우리는 그 석류가 이란에서 온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입에 넣고 석류 알을 하나하나 터뜨리며 그 먼 나라를 상상했지만, 이란에 대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p.27)
시라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가 아니라, 석류처럼 웃는 아이 때문이 아니라, '석류 알을 하나하나 터뜨리며' 라는 문장 때문에. 마치 내 입안에서 석류알이 터지는 것만 같아서. 석류 알을 터뜨리며 머언, 나라, 이란에 대해 생각하는 골똘한 표정,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그 장면이 마치 손에 잡힐듯해서. 아주아주 잘 읽히는 단편이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대부분 좋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보통 이상으로 잘 쓰여졌다. 물론, 내 기준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소설이 한 편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어쨌든 마지막의 단편 하나만을 읽지 못하고 남겨둔 현재, 다 좋다. '권지예'의 「퍼즐」은 무섭고 소름이돋아, 으윽, 이걸 마지막으로 읽고 잠든다면 바로 악몽을 꿀것같군, 생각하고는 그 다음 단편인 이승우의 「한 구레네 사람의 수기」도 읽었다. 늦은 밤이었다. 그런데 읽기를 잘했다. 아, 평온해졌어. 그동안 내가 읽어왔던 이승우의 작품들과는 달랐지만 달랐다고해서 나쁜게 아니었다. 좋았다. 간혹 이승우 특유의 반복적인 문장들이 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 이야기 자체가, 마치 잘 쓰여진 성경을 읽는 느낌이었달까. 가장 좋은게 어떤 단편이었냐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다. 이승우 것이라고 할까, 권지예 것이라고 할까, 아니 박완서도 좋았는데, 김연수도 괜찮았어! 아, 모르겠다. 이토록 좋은 단편집이 알라딘에서 현재 반값이다. 이 좋은 책의 가격이 고작 6,000원이다. 6,000원으로 이 단편들을 만난다니 이 얼마나 좋은일인가, 에 앞서, 어쩐지 좀 서운하다. 그보다 더한 돈을 들여서라도 읽을 가치가 있는데. 이승우와 권지예, 박완서와 김연수의 단편이 있다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 철저히 내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들의 그 자유로움이 놀라웠고, 그것을 이해하는 상대방들에 대해서 또한번 놀라웠다. 그러다 그건 그들 모두가 개인적으로 기준이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런거다. 연인이 아닌 사람과의 섹스는 절대 안되는 일이라고, 그건 상대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나와 사귀면서 다른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고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는 걸 알게 됐을때 미쳐버리게 될 것이다.
'나는 너 아니면 누구와도 자지 않아,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여기엔 '나의 기준'이 적용되는거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럴수 있어?' 라고. 그러나 상대의 기준이 나와 다르다면? 상대는 섹스를 '사랑하는 사람과만 나누어야 할 은밀한 접촉' 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욕망의 해소방법 그러나 크게 의미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의 행동 자체도 달랐을 것이고 이에 따라 상대에게 반응하는게 달랐을 것이다. '야, 그게 뭐 별거라고 그렇게 난리를 쳐? 다른사람하고 하룻밤쯤 잘 수도 있지' 라면서.
이 영화속의 등장인물들에게 섹스와 사랑은 자유로움, 그 자체인것 같았다. 각자가 그것에 대해 가진 기준이 크게 다른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곳 전체의 분위기가 그런것 같았다. 그 자유로움은 벅찰 정도였다. 뭐, 자유롭고 어쩌고간에 어쨌든 영화는 재미없었다. 프랑스영화는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완전 쐐기를 박았다고나 할까. 졸다 깨고 졸다 깨고를 반복해도 영화가 안끝나더라. 올해 본 가장 재미없는 영화가 아닐까. 게다가 상영시간은 두시간을 넘는다. 영화가 안끝나. 영화를 보는중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보지말고 이 전화 받으러 나가서 들어오지 말까, 하고 잠깐 생각도 했다. 영화를 보다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재미없다고 귓속말을 했는데 친구도 졸았다고 했다. 어휴..
이 영화는 초반 10분만 봐도 끝까지 결말을 알 수 있는 아주 단순하고 뻔한 영화다. 그러니 딱히 재미있거나 하지도 않고 뭔가 가슴 깊이 울림을 준다거나 하는 일도 없다. 어쩌면 이렇게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상대로 진행될까 놀라울 정도라니까. 이 영화는 이야기보다는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강제로 집어넣었달까. 영화를 보는 내내 캡쳐하고 싶은 장면이 몇 번이나 나왔다. 와- 저긴 대체, 와- 엄청난데! 감독은 작정하고 카메라를 풍경으로 돌린걸까. 와 회사 때려치고 당장 이탈리아로 날아가고 싶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검색하니 몇 개 나오질 않는다. 그렇게 아름다운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고작 이정도밖에 검색이 안되다니!
이탈리아에 있는 피어스 브로스넌의 집에는 레몬나무 농장이 있다. 초록이 우거진 나무들 틈틈이 노란 레몬이 열려있는 풍경은 장관이다. 그런데 그 장면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바로 위의 사진은 그 이탈리아 집의 2층(이라기보다 더 높은 층 같긴한데..)인데, 여기에 이렇게 서면 그 농장이며 바다며 하는 풍경들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창이 방 마다 나있어서 이렇게 나와있을 때 옆 방 사람도 나와있으면 서로 인사를 할 수도 있다.
하아- 그런데 돈이 없다. 회사를 때려쳐도 저기에 가서 머무르며 저 공간을 마음껏 즐길 돈이 없어. 왜 나는 늘 돈을 버는데 늘 돈이 없을까? 엿같다.
일요일인 어제 아침. 엄마는 찰밥을 하고 여러가지 나물을 요리하셨다. 그리고는 내게 여동생의 집에 함께 가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찰밥을 했더니 찰밥을 좋아하는 여동생 생각이 났다시며. 나는 토요일까지 잠시도 쉬지 못해 목이 잠길 정도로 피곤했지만, 찰밥을 받아 맛있게 먹을 동생을 보고 싶었다. 조카도 보고 싶었고. 그래서 알았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그리고는 남동생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다. 우리는 음식들을 싸들고 여동생 집으로 갔다. 우리가 간다고는 말해두었지만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착해서 커다란 가방에 든 밥과 반찬을 꺼내며 엄마가 너 생각나서 가져오신거야, 라고 말했더니 여동생은 '어머' 라고 감탄하다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먹고 싶었다고. 역시 엄마가 짱이구나. 이제 임신 6주째를 넘기고 있는 여동생은 이번에는 입덧이 없을 것 같다며 엄마가 가져온 밥과 반찬을 당장 그자리에서 맛있게 먹었다.
남동생과 나는 집에서 찰밥과 나물을 먹고온터라 제부에게 우리 짬뽕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하는데 조카가 나를 보더니 곧 울것같은 표정으로
이모 가지마
한다. 이모 안가, 라고 하니 또 그런다.
이모 가지마.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조카야, 이모 가는거 아니야. 이모 밥 먹고 올게. 밥 먹고 금방 올게. 그제야 조카는 응, 한다. 짬뽕을 먹고 와서 조카랑 놀다가 집에 돌아가기 전에는 계속 조카에게 얘기해줬다.
이모는 내일 회사 가야되니까 지금 이모집에 갈거야. 그런데 우리는 또 만날 수 있어. 조카야, 네 밤자고 이모집에 와. 그러면 또 만나. 내가 이렇게 얘기하고 우리 엄마도 계속 할머니 또 만날거야, 네 밤자고 와, 라고 일러두었다. 조카는 울지않고 우리에게 안녕히 가시라며 인사를 했다.
제부가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간 짬뽕집은 안산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사람이 바글바글 했는데, 와, 정말 맛있었다. 나는 너무 맛있어서 제부에게 그동안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 잘 먹었다고. 나는 최근의 식사중 오늘 이 짬뽕이 최고라며 짬뽕값을 내가 내겠다고 했다. 이렇게 맛있는 거 먹은것 만으로도 고맙다고. 그러자 제부는 여기는 자기 구역이니 자기가 내겠다며 계산서를 들고 가 계산을 했다. 참 훌륭한 제부다. 좋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