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간이 고작 삼십분 남았을 뿐인 지금, 나는 몹시 우울하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 평상시보다 조금 더 예쁜데, 아무도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단 한명도 평소보다 더 예쁘다는 말을 해주지 않을까? 그 말 좀 들어볼라고 특별한 볼 일 없이 타부서의 사무실에 들르기도 했는데? 나를...잘 못봤나? 눈에 띄게 더 왔다갔다 했어야 했나? 울적하다.
그래도 수키 시리즈 최근작은 재미있었다.
이번 시리즈를 읽으면서는 작가에게 놀랐다. 『죽음의 계산』은 잠깐 외전으로 나온 단편집-그건 정말 멍청하고 형편없는 책이었다-을 빼고는 열한번째 수키 시리즈인데, 어떻게 이렇게 매번 싸움과 질투와 시기를 만들어낼까? 새로운 인물들을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놀랍고, 그것들이 그동안의 이야기들과 맞물린다는 것도 놀랍다.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의 열한 번째 작품인 『죽음의 계산』은 시리즈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원래 계획되어 있던 10권에 더해 출간하게 된 세 권의 첫 이야기다. -책날개中
절반 조금 안되게 읽었을 때, 나는 그동안의 수키를 차곡차곡 모아놨으나, 이번 책 부터는 이제 팔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졌다. 그러나 수키는 한 번이상은 꼭 나를 웃게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수키를 책장에 꽂아두기로 한다. 이번 시리즈에서 수키는 자신의 친척 요정인 클로드와 더모트와 한 집에 산다. 그들에게 위층을 내어주고 자신은 아래층에 산다. 하우스메이트인 셈. 함께 살면 분명 좋은점도 있겠지만 불편한 점도 엄청나게 많을텐데, 그중에 하나가 연인과의 사적인 부분을 혹여라도 침해하거나 침해받거나 하고 신경쓰는 것일테다. 오늘 수키에게 에릭이 찾아오기로 했다. 에릭이 오기전에 수키는 클로드에게 전화해 오늘 집에 올건지의 여부를 확인한다.
「에릭과 함께 집에 가기 전에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려고 전화한 것뿐이야.」
「우리는 오늘 밤 클럽에 머물 거야. 네 뱀파이어 섹시남과 즐거운 시간 보내.」클로드가 대답했다. (p.199)
하하하하. 난 이 부분이 왜이렇게 웃긴지. 굉장히 어색하고 또 굉장히 웃긴거다. 하하하하. 잠깐, 만약 나였다면 이럴때 어떻게 돌려 말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생각을 멈췄다. 어떤것들은 닥쳐야만 가능해지는 것들이 있고, 이런 통화는 아마도 내게 그런 부류의 일종인것 같다. (이걸 쓰면서도 웃고있음.)
이 시리즈를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수키는 현재 에릭이라는 뱀파이어와 연인이고, 빌이라는 뱀파이어는 수키의 첫사랑이었다. 그런데 빌은, 수키와 헤어진 후로 다른 연인을 만나도 수키를 잊지 못하고 여전히 수키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빌의 옆에 있고 싶었던 주디스는, 수키를 찾아간 빌을 몰래 따라가 수키와 이야기하는 빌 앞에 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이 수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건 들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왔어요. 당신이 이 여자와 섹스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요. 수키가 다른 사람에게 빠져 있다는 것도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나보다 수키를 더 원한다는 것도 알아요. 난 나를 동정하는 남자와 섹스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를 원하지 않는 남자와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보다는 더 가치가 있어요. 내 생의 나머지 시간이 다 걸린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없앨 거예요. 당신이 여기 조금 더 머물 거라면, 나는 당신 집에 돌아가서 내 물건을 싸서 사라질게요.」 (pp.212-213)
나는 이렇게 말하는 주디스에게 순간 심하게 감정 이입을 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주디스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해야하고, 그리고 그렇게 포기한다고 그에게 알리는 일. 그가 사랑하는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는 일. 그러나 당당하게 너를 잊겠다고 말하는 일. 이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당연히 해야하는 말과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하기는 쉽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주디스의 이런 말과 태도에 깊이 감명받았고, 그런 그녀에게 감동한건 나뿐만은 아니었다.
나는 감명을 받았다. 정말 멋진 말이었고, 나는 주디스가 한 모든 말이 진심이기를 바랐다. (p.213)
수키도 그런 그녀에게 감명받은 터다.
주디스는 떠났지만 빌은 그녀를 붙잡는 대신, 자신의 마음이 더 향하는 수키 옆에서 떠나지를 않고 그녀에게 고백한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아름답고 친절하고 선량하면서도 자립적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이해심과 동정심이 아주 많지만, 호구는 아니에요. 그리고 몇 단계 내려가 육체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당신은 <미스 아메리카 가슴 콘테스트>에서 상을 타야할 가슴을 가졌어요.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칭찬을 같이 묶는 건 참 드문데요.」
나는 애써 미소를 억눌렀다.
「당신이 드문 여자니까요.」(pp.213-214)
이런 식으로 칭찬하며 고백하는 빌이 물론 좋지만, 난 빌의 이런 말이 더 좋다.
「좋은 밤 보내요, 수키. 문 잠가요.」(p.216)
그러니까 수키에게 문을 잠그고 자라고 말해주는 빌. 나는 그런 빌이 좋다. 나는 언젠가부터 에릭이 수키의 연인이라는 포지션에 있지 않기를 바랐다. 빌에게 애틋한 감정이 남아서일수도 있고, 에릭처럼 강한 매력을 가진 남자는 뭐랄까, 음, 헤어지면 남이 되는 그런 연인의 포지션 보다는 정신적 지주라든가, 멘탈 친구, 또 어떤 표현이 있을까, 여하튼 수키의 믿을만한 구석으로서 오래오래 함께해주기를 바라니까. 그렇다고 빌과는 헤어지는게 더 낫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현재는 수키의 말없는 지지자는 빌 같다. 수키의 옆에 있되 수키랑 함께 있을 수는 없는 옛 연인, 빌.
어떤 남자를 좋아하느냐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나는 그가 강한 사람일때 끌리고, 그 강함으로 여자를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그러니까 그런 의지를 보이고자 할 때 끌린다. 빌에게서는 문을 잠그라는 말에 끌렸다면, 에릭한테는 이런 말들에 정신줄을 놓게 된다.
집에서 전화가 울려서 나는 뒷문으로 뛰어갔다.
「당신 거기 있어? 거기 있고 괜찮은 거야?」(p.240)
나는 약하지 않다. 나는 결코 약한 여자가 아니고 꿋꿋하며 혼자서도 대체적으로 많은 것들을 잘해낼 수 있다. 남자가 꼭 있어야 한다거나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간혹 이런 문장들에 정신줄을 놓으면서, 내게는 이런식의 어떤 컴플렉스가 있는건가, 하고 갸웃하게 된다. 뭐, 있든 없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지만.
마지막으로 또 빵 터졌던 부분은, 좀 거친 욕이 나온다. 이게 원문은 어떨지 궁금하다. 어떻길래 이런 욕으로 번역했을까. 물론, 나는 욕에서 빵터진게 아니라 '개 남친' 에서 빵터졌다. 그래, 이 대사에 등장하는 '그 자식'은 개로 변신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마. 아니면 네놈들을 쏴버릴 거야! 너, 이 개년아! 그 자식 머리가 총알에 날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지, 응? 네 조그만 개 남친 말이야.」 (p.422)
정말로 남자친구가 개로 변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개 남친이 틀린말이 아닌데, 아, 개 남친이라니, 너무 웃겨 ㅠㅠ
우앗, 삼십분내로 다 쓰고 퇴근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여섯시가 되기전에 다 썼네? ㅋㅋㅋㅋㅋ 다행이다. 다 못썼으면 약속시간에 제 때 맞춰 나갈 수 없을 뻔했다. 울적한 마음을 술로 달래야지. 오늘도 술마시러 간다. 이번주에 오늘로서 연속 나흘째. 하아- 정말 피곤하구나. ㅎㅎㅎㅎㅎ
아, 그런데, 나는 에릭도 그렇지만, 빌이..포기가 안돼.. 너무 애틋해. 둘다 가지면 안되는걸까. 그럴수는 없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