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가끔 어, 정말 그래도 되나? 싶을만큼 미심쩍은 부분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러면 책장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흐음, 진짜 이래도 되는걸까, 하고. 그런데 섣불리 그래 이러자, 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런 부분.
"내가 보기에 너는 선생님에게 두 가지 감정을 갖고 있어. 좋아하면서도 싫어해." (p.54)
선생님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그건 나쁜일이다, 라고 아이의 죄책감을 키워주는 일 보다는 그 아이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인정해줘서 그 죄책감을 덜어주는 일이 더 좋다는거다. 물론 아이의 감정에 그건 나쁘다라고 말하는게 좋지 않다는것쯤은 나도 알지만, 그래도 저런 애매모호한 말로 아이의 감정을 들여다봐주는게 그렇게 큰 도움이 될까? 정말 그럴까? 이건 조금 더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책은 '부모와 아이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필요한 태도들이 잘 담겨있다. 확실히 이 책을 읽은 나는 그전보다 조금쯤 더 착한 여자사람이 될 것 같다. (응?) 그리고 나는 이런 부분을 책에서 맞닥뜨렸다.
어렸을 때 받은 훈련과 커서 받은 교육은 우리에게 양쪽의 견해에 대한 편견만을 가르쳤다. 부정적인 감정은 모두 나쁜 것이며,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적 견해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드러난 행위에 대해서는 좋다 나쁘다 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지만, 마음속의 행위에 대해서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행동(conduct) 자체는 비난이나 명령을 받을 수 있지만, 감정을 그럴 수도,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감정에 대해 판결을 내리거나, 상상을 검열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고와 정신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감정은 우리가 유전으로 받은 소산이다. 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날고, 인간은 느낀다. (pp.55-56)
이 부분을 읽는데 뭔가 해방되는 느낌인거다. 나는 지나치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그간 억누르려고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 나 자신이 밉지 않았던가. 그러나 감정이란 어쩔수 없이 자유롭다. 내가 그 감정으로 악랄한 행동을 하지만 않는다면, 내 감정은 그대로 나만의 것이 아닌가.
그렇다.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혐오하기도 하며 경멸하기도 한다. 싫어하기도 한다. 이런 감정들을 어떤 사람에게든 생길 수 있고 또 언제든 생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감정들은 사라지기도 하고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그럴경우 나는 그런 감정을 들게 하는 상대에게 여러가지 행동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랑 더이상 친구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두자, 라고 말한다거나 일방적으로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잠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너가 나에게 말을 거는게 몹시 불쾌하니 더이상 말걸지 말아줘, 라고 쏘아붙일수도 있을것이다. 이건 그 사람과 나의 문제이고 그 사람과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건 그 사람에게 갖는 나의 감정이니까.
굳이 친한 관계에서뿐만이 아니라 온라인 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내가 불쾌한 댓글을 받았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한다. 너의 댓글은 나에게 악플이다, 라고. 이것이 나를 불쾌하게 한다고. 그게 나의 감정을 건드렸다면 나는 그사람에게 나의 감정을 말함으로써 더이상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수도 있고 나쁘게 진행된다면 그 사람과 크게 싸울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의 기분을 건드릴 수도 있고 혹은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할 목적으로 거친 말들을 내뱉을 수도 있을것이다. 이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동창회 모임에서도 일어나는 일이고 그리고 인터넷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나의 욕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혼자서 핑킹가위로 앞머리를 자르면서 사는게 아니라면, 나는 이사람 혹은 저사람과 얽혀 지내면서 얼마든지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고 그것을 해결할 수도 있으며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누구때문에 불쾌해서, 그래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더 유지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혹은 더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그 사람과 나와의 사이에 관계를 끊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할까? 그게 정말 나에게 유리할까?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지않다 고 생각한다.
오늘 고객센터에 건의된 된장님의 글을 읽었다. 나를 즐겨찾는 사람이 누군인지 드러났으면 좋겠고 내가 싫다면 그들을 삭제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건의였다. 그건 그 분이 알라딘에 건의한 것이니 내가 답할수는 없는 부분이다. 알라딘이 어떤 답을 할지는 나도 지켜보아야 할 부분인데, 나는 기본적으로 나를 즐겨찾는 사람을 내가 싫다는 이유로 삭제할 수 있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너 싫어, 너 나한테 말걸지마, 난 내가 좋은 사람들하고만 소통할거야, 라고 나를 즐겨찾는 사람을 삭제한다니, 그건 지나치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지 않나? 그런 감정을 갖는거야 누가 뭐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걸 굳이 제도적 장치로 마련해줘야 하는걸까? 나는 이글루스에도 티스토리에도 네이버에도 즐겨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 모두에 다 나는 회원이 아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싸이트에 내가 즐겨찾기했다고 알리지 않는다. 내가 즐겨찾는 사람들에게 '내가 너를 즐겨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꼭 말해야 하나? 내가 북스피어 출판사의 글을 읽는다고 그들에게 말해야 하나? 이동진의 블로그에 간다고이동진한테 말해야 하나? 그리고 즐겨찾기한 사람만이 내 글을 읽을거라는 생각을 대체 어떻게 할 수가 있을까? 나는 내가 즐겨찾기 한 사람이 얼마 없다. 그러나 알라딘에 올려진 거의 모든 글을 읽는다. 그리고 예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느끼기에 반대되는 생각이 있으면 나의 생각은 다르다고 댓글을 달았던 때도 있고 그냥 지나칠 때도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스팸댓글을 달 목적으로' 누군가를 즐겨찾기 한 적이 없다. 아무리 각자가 가진 생각이 다르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말로 '악플을 달기위해 나를 즐겨찾기 한다'는 생각을 하는걸까? 정말 그런가?
즐겨찾기를 했든 하지 않았든 비공개로 쓰지 않은 다음에야 내 글은 누구나 와서 언제든 볼 수 있다. 몇 년전의 글들에도 가끔 댓글이 달리는 경우가 있다. 알라딘이 아니라 어떤 경로로도 들어와서 우연히 내 글을 읽게 되는거다. 그 글은 내 글을 좋다고 말하는 글이기도 하고 내 글을 비판하는 글이기도 하다. 그들이 내 글을 비판하기 위해 내 글을 읽은게 아니다. 내 글을 읽었는데 본인들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댓글을 다는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서도 또 직장에서도 나는 말을 한다. 그게 어떤 말이든 일단 내 입으로 내뱉은 이상 나는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내 말에 누군가 그건 잘못됐다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나는 그사람에게 입닥치라고 하지 않는다. 왜 내 말에 반박해? 너 싫어 앞으로 이 자리에 나오지마, 라고 말하지 않는다. 글도 마찬가지다. 내가 써놓은 글에 반대되는 댓글을 달았다고 해서 야, 너 오지마, 라고 하는건 지나치게 부당하지않나? 너 앞으로 내 글에 댓글 달지 못하도록 하겠어, 클릭. 이게.........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인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좋아하는 이야기들만 하고 살면 그 안에 오류가 숨어있고 잘못된게 있을 때 그것을 고칠 가능성을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알라딘이 어떤 답을 할지 모르겠다. 알라딘 쪽에서는 싫어하는 사람을 차단하는 제도를 마련해주는 것이 옳다고 여길지도 모를일이다. 만약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장치를 마련한다면, 나는 정말 마음에 안들지만, 그렇다고 알라딘을 떠난다거나 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렇지만 그 제도가 마련된다 한들, 나는 나를 즐겨찾기 한 사람이 그게 누구든, 그들을 삭제하지는 않을것이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책에는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좋은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져 있다. 나는 밑줄을 그었고 여동생에게 이 책을 줬다. 그 부분들 중에는 여전히 아이들을 때려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런 구절도 있었다.
맞아본 아이들은 분노를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다스리는 법을 배우게 된다. 체벌은 아이들에게 극적으로 말해 준다.
"화가 나거나 불만스러울 때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 마. 때려. 부모들도 그렇게 하잖아."
거친 감정을 배출할 수 있는 세련된 출구를 찾아내는 독창성을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글의 방식을 가르치고, 때려도 된다는 허가를 내주고 있는 셈이다.
손위 아이들이 동생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의 부모들이 화를 낸다. 하지만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의 엉덩이를 때린 때, 손위 아이들이 그걸 보고 그와 똑같은 행동을 배운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한다. (pp.209-210)
교사의 체벌을 금지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교사를 무시하고 막나간다는 뉴스나 신문기사를 접할때마다 세상은 체벌을 허용하는 것이 더 바른 세상을 위해 나은 길임을 암시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폭력을 일상적으로 삼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자랐다. 그런데 갑자기 폭력이 안된다고 한다. 그 아이들에게 '이젠 어떻게 해도 우리를 때릴 수 없어'는 일종의 해방으로 느껴진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정말 안때리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기분을 주지 않았을까. 그들은 지금 폭력과 비폭력의 과도기쯤에 놓여있는게 아닐까. 맞지 않고 자란 아이들이 부모가 되면 그때부터 세상은 훨씬 나아져있지 않을까. 나는 문득 밑줄을 그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잘못은 역시 체벌을 함으로써 고쳐야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에게 이 부분을 꼭 들려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