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가 왔다. 책 박스가 도착했다. 2012년 들어 처음으로 주문한 책들. 게다가 나의 순수 구매 결제액 580원! 580원! 아,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중고책을 팔아 예치금을 쌓아두고, 선물용 책들은 신용카드로 결제해서 마일리지를 쌓았다. 거의 매일 땡스투 적립금이 100~200원 사이로 들어왔다. 그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5만원을 채울 수 있기를 기다렸다. 5만원어치를 주문하려고. 드디어 지난 월요일! 예치금과 마일리지와 적립금을 다 합쳐서 53,000원이 쌓인것을 보고 기뻐 날뛰며 나의 장바구니를 클릭했다. 장바구니에는 이미 이십권 가량의 책이 담겨 있었다. 이 중에 어떤걸 선택해서 결제할까? 몇백권이 들어있는 보관함을 먼저 봐줄까? 다시 5만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야, 신중하자. 아주 신중하게 책을 고르자. 일단 『16인의 반란자들』은 결제해야지, 이건 꼭 살거야, 그리고 ... 책들을 선택하지 못하다가 외근을 나가야 했다. 그래, 다녀와서, 다녀와서 다시 골라보자. 나는 사무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한겨레21]을 집어들었다. 혹시라도 외근중에 기다려야 되는 시간이 있다면 이걸 읽을까. 회사빌딩의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 주간지를 (당연히)뒤에서부터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신형철의 리뷰를 보게됐다. 어어, 신형철? 신형철이라고? 그래서 읽었다. 신형철이 [한겨레21]에 리뷰한 책은, 바로 이것, '안토니오 타부키'의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리뷰를 읽으면서 이 책을 사려고 했던건 아니다. 나는 그저 신형철의 글을 읽는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 제기랄, 이 책의 리뷰 마지막에 신형철이 이렇게 써놓은게 아닌가.
1938년의 포르투갈, 1994년의 이탈리아, 2012년의 대한민국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면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한 전직 국회의원을 감옥에 처넣는 나라에 살고 있다. ( -한겨레 21 제894호, 2012.01.16, 신형철의 문학사용법 p.88)
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만이 운명이 아닌거다. 사람과 책이 만나는 것도 운명인거다. 왜 하필 너는 내 책상에 굴러다녔니, 왜 하필 나는 외근길에 이걸 집어들고 나간거니, 왜 하필 신형철의 리뷰가 거기에 실린거니, 그러니까 왜 하필, 내가 책을 사겠다고 마음먹은 바로 이 때에!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래, 이 책을 사자 마음먹고 나의 서재로 들어왔다가 나는 후* 님의 댓글을 읽게 되었다. '알고있겠지만 『호프만의 허기』가 재출간 되었다'는 .. 아아..몰랐어요, 몰랐습니다. 며칠전 후*님의 서재에서 이 책에 대한 포스팅을 보고 너무 사고싶어서 검색했는데 품절인거다. 그래서 품절이라 아쉬워하는 댓글을 달았었는데, 아아, 그 사이에 재출간 되다니.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가?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은 내가 결제하기만을 바라고 출간되는 것인가. 이를 어쩌면 좋아. 아니야, 다음에 사도 되잖아, 흥분하지마, 라고 책을 검색했다가 어므낫, 표지 좀 봐, 완전 이쁘잖아! 나는 또 이 책 역시 사기로 결심한다.
왜 후*님은 내가 장바구니를 결제하기 전에 이런 댓글을 달아두신걸까, 왜 나는 장바구니 결제하기 전에 댓글을 먼저 읽은걸까, 왜 이 책은 며칠 있다가 나오질 않았을까. 결국 나는 장바구니에 있던 그 모든 책들 중에 딱 두 권만 선택하고 다른 두 권은 이 날 아침 만난 이 두 책을 넣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네 권 사는데 53,000원이 훌쩍 넘어버리더군. 아아, 역시 책과의 만남도 운명이 아니던가. 운명이 아니라면 나는 장바구니 결제할 아침에 왜 이 책들을 마주친것인가.
5만원이 모이면 인피니트의 CD를 사려고 계속 벼르고 있었다. 너무 가지고 싶어서 신용카드로 CD하나만 결제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중고책 판매 예치금과 적립금과 마일리지등으로 구매하는 건 책에만 적용시키자, 그런 룰로 가자, 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때마다 다시 고개를 저었고, 드디어 지를 수 있게 되었는데, 막상 결제하려고 하니 인피니트 CD는 안중에도 없었다. 인피니트의 시디를 가지고 싶은 욕망은 단 며칠짜리 였는가 보다. 아, CD 영어로 쓰려니까 귀찮네. 처음부터 시디 라고 쓸걸. 짜증나..
책 박스가 왔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받는 박스. 기쁘다. 우리의 만남은 운명인 것이다.
덧. 오늘 아침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무척 좋은데, 이건 좀 더 읽어보고 얘기하기로 하자.
(저는 어떤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요? 알아맞혀 보십시오 . 우하하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