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는 소설이 그렇듯이 아주 많은것들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다. 얼마전에 어느 신춘문예 응모후의 글을 봤는데 많은 시들이 이번 해에 저항에 대해 얘기했다고 했다. 그래, 시를 수단으로 삼아 저항을 얘기할 수도 있을테다. 인생을 얘기할 수도 있고 분노를 얘기할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사랑에 대한것은 빼놓을 수 없고. 그리고 시로 말하기에는 일상도 가능하다. 나는 지겨울정도로 말해왔지만 시를 잘 읽지 못하고, 그래서 시를 잘 읽는 사람들을 보는것이 몹시 질투난다. 왜 나는 그들처럼 시를 읽지 못할까? 왜 내게 와서 그것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까? 시는 내게 다가서기 어려운 친구같다. 몇번이고 시도하고 또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나 따위에게는 절대 곁을 주려는것 같지가 않다. 뭐, 괜찮다. 내게는 나의 구원, 소설이 있으니까.
시에게 실연당한 내가 오늘 만난 시집은(나는 참 끈질기기도 하지), 제목이 아주 근사한 시집이다. 내가 만약에 단편 소설을 쓴다면 시인에게 정중히 묻고 싶다. 제 단편소설 제목으로 이 시집의 제목을 그대로 써도 되겠습니까? 라고. 그러나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박성우 시인의 『자두나무 정류장』. 아. 제목좀 봐. 자두나무 정류장이래. 너무너무 예쁘다. 자두나무 정류장. 배나무 정류장보다 낫다. 사과나무 정류장은 괜찮았을 것 같다. 벚꽃나무 정류장도 어쩐지 낭만적이고. 아, 그런데 자두나무 정류장은 뭔가 특별하다. 자두나무라니. 나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자두를 따먹어도 될까? 자두를 따먹고 자두즙이 흘러내리면 손으로 쓰윽- 훑고. 끈적해진 손이 낭패스러워지면 옆에서 함께 기다려주던 이가 물티슈를 건네주고. 버스가 오고, 우리는 나란히 타고. 이 밤에 자두가 먹고싶다.
자두나무 정류장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그래, 정류장에서는 버스를 기다리기도 하지만, 내게로 올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한다. 문득 이 시를 읽는데 마중이란 단어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마중이란 단어는 애틋하니까. 그 마중을 자두나무 정류장에서 한다는 건 꽤 특별하게 느껴져서, 내가 자두나무 정류장에서 누군가를 마중한다면 혹은 누군가가 나를 자두나무 정류장에서 마중한다면 우리는 헤어질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다음에 또 자두나무 정류장에서 보자.
헤어짐의 인사로는 꽤 낭만적이지 않은가.
바닥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이 시를 읽고서야 새삼 바닥을 나누는 일이 사랑을 나누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다. 혓바닥을 나누는 일은 사실 사랑 없이도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은 욕정만으로도 해낼 수 있는 일이니까. 손바닥을 서로 내보이며 악수를 하든 손을 잡든, 그것도 사랑까지 가지 않아도 가능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순간의 충동으로. 그러나 발바닥까지 함께 내보인다면, 그러니까 내 몸의 모든 바닥과 당신 몸의 모든 바닥이 만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수 없겠다. 그건 사랑이겠지, 라는 시인의 말은 그래서 네, 사랑이죠, 라는 대답을 불러낸다. 그런데 사랑이 뭐지? 라고 물으면 그때는 대답하기가 어려워질 것 같기는 하다. 바닥을 나누는거요, 라고 하기엔 충분하지 못한 느낌.
별말 없이
윗집 할매네
밭가에 우거진 가시덤불을 일없이 쳐드렸다
그러고 나서 두어 날 집을 비웠는데
텃밭 상추며 배추 잎이 누렇게타들어간다
일절 비료도 안하고
묵힌 거름으로만 키워 먹는 풋것인지라
내 맘도 여간 타들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요소를 쪼간 허쳤는디 너무 허쳤는가?
아깐디, 뭔 비료를 다 주셨어라
윗집 할매는 고맙다는 표시로 별말 없이,
내 텃밭에 요소비료를 넘치게 뿌려주셨던 것이어서
나도 별말 없이,
콩기를 한 통 사다가 저녁 마루에 두고 왔다
내 호박넝쿨이며 오이넝쿨이
윗집 할매네 부추밭으로만 기어들어가
여름 가을 내내 속도 없이 퍼질러댔지만
윗집 할매는 별말 없이,
비울 때가 더 많은 내 집을 일없이 봐주신다
이 시는 엄청 아름답다. 풍경이 눈에 보이는듯 하다. 별말 없이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별말 없이 나누는 마음이 비료이고 콩기름이고 비운 집을 봐주는 일이라는것이 살풋 미소짓게 한다. 저녁에 집에서 콩나물과 고추장을 세숫대야에 넣어 밥을 비벼먹는데 엄마가 참기름 넣어줄까, 하신다. 응, 이라고 하니 엄마는 참기름 뚜껑을 열고 내가 밥을 비비는 세숫대야에 넣어주시는데 이건 참기름을 넣는 수준이 아니고 숫제 들이 붓는다. 어어, 엄마, 기름에 밥 비벼먹는거 아니잖아 왜이렇게 많이 넣어, 라고 하니까 엄마가 맛있으라고, 하신다. ㅎㅎㅎㅎㅎ 이런게....아름다운거 아닌가!! 박성우 시인에게 콩기름이 있었다면 나에겐 참기름이 있다. 엄마의 참기름. 별말 없이 들이붓는 참기름. 그리하여 아름다워진 저녁 밥상.
항생제와 소염제 그리고 진통제가 잔뜩 들어간 약을 먹었더니 내내 졸립다. 자도자도 졸립다. 그것들은 사람을 졸리게 만드는건가? 여튼 이제 자야겠다. 내일은 금요일이고, 그 다음날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작년 이맘때, 나는 백화점에 가서 반지를 샀었지. 그 뒤로 그 반지는 내내 내 손에 끼워져 있었고, 나는 이제 그 반지 없는 내 손가락은 허전하다. 앗. 와인을 마시고 싶어지네. 얼른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