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학기초였다. 반 아이들 모두의 이름과 얼굴을 익히지는 못해도 가까이에 앉은 아이들과는 조금씩 친해진 상황. 그때는 한 반에 60명 이상의 아이들이 있었고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에 비해 현저히 많았다. 그래서 키 순으로 짝을 정해 자리에 앉게되면 키가 큰 남자아이들은 결국 남자아이들끼리 짝이 되곤 하던, 그런 때였다. 나는 보통의 키였고, 늘 앞에서 세번째나 네번째 줄에 앉았었는데, 어느 쉬는 시간. 내 짝꿍은 뒤를 돌아본 앞자리의 남자아이에게 내 얘기를 했다. 

난 얘 처음에 남자앤줄 알고 선생님한테 짝 바꿔달라고 말했잖아. 여자애랑 앉고 싶어서. 근데 선생님이 얘 여자애라 그러더라. 

수줍음이 무척 많았던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애초에 이렇게 머리를 자르면 안되는 거였는데, 엄마가 시키는대로 미장원에 가서 바가지 머리로 해주시래요, 했더니 이런 모양새가 된 거였다. 자르고 나서도 엄청 속상했는데 결국 남자아인줄 알았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너무 챙피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뒤돌아 있던 앞자리 남자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 난 얘랑 앉고 싶은데. 너랑 짝 바꾸고 싶다.

오, 세상에. 나는 차라리 욕을 먹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남자아이 같다던 짝궁의 말을 견디기가 더 쉬웠다. 뒤를 볼아보며 자꾸만 나랑 짝을 하고 싶다는 그 남자아이를 내가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는거다. 열 살때의 일이고 벌써 이십오년전의 일인데 나는 아직도 이 일이 생각난다. 그 남자아이들의 얼굴도 이름도 생각나지 않지만, 그 아이들의 대화와 그때의 내 기분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남자아이 같다던 짝궁의 말이 그 상황의 마지막 말이었다면 나는 혹여 그것을 가슴 아픈 일로 기억하게 될까? 그랬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앞자리 남자아이의 나랑 짝궁하고 싶다는 말 때문에 이 일은 결국 지금은 웃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남자는 암에 걸렸다. 삶과 죽음의 확률은 50:50. 무덤덤하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상황을 받아들이다가 항암치료가 듣지 않으며 그래서 위험할지도 모를 수술을 해야 된다는 상황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이 무너지고 만다. 신경쇠약에 걸려버린 그는 소리를 지르고 차의 핸들을 쿵쿵 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밤 열두시에. 나와 전화하기 전에 뭐했어요? 페이스북? 나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아요. 여자는 그의 말을 들어주고 또 대꾸해준다. 그런데 어느참에 남자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내 애인이라면 좋을텐데. 

여자는 그 말에 대꾸할 수가 없다. 그저 그 말을 듣기만 할 뿐. 진심이 가득 담긴 저 사소한 말을 아마 그녀는 먼 훗날이 지나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하늘의 달과 별을 모두 너에게 따줄게, 라고 했다면 여자는 대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의도로 접대용 멘트들을 날렸다면 그녀는 그 모두에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내 애인이라면 좋을텐데, 하는,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를 남자의 그 진심 앞에서는 대응하기가 힘들어진다.  

당신이 내 애인이라면 좋을텐데. 

영화를 보면서 이 말을 듣는데, 이 말이 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맨틱해. 이건 진짜야. 진심이지. 이건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당신이 내 애인이라면 좋을텐데. 와-
게다가 그는 그녀에게 이런 말도 한다. 

당신에게 종종 팬케이크를 구워 주고 싶어요. 

아우. 이건 뭐. 후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 아닌가. 물론, 나는 요리를 못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긴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애인이 될 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할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일 다정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후에 그들은 서로에게 질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순간이 어느 순간 어떻게 찾아온다한들, 이 평범하고 착하고 다정한 남자는 이 서투르고 마음씨 따뜻한 여자에게 최선의 남자가 되어줄 것 같다. 여자는 길을 걷다가 혹은 텔레비젼을 보다가 키가 크고 잘생기고 건장한 남자들을 보면서 한순간 반할지도 모르지만, 옆에 앉아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남자를 보며, 나는 이 남자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순간이 있을것이다. 그 순간이 좀 오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짧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에게 그녀라서, 그녀에게 그라서, 그것이 다행이다.  

 

 

 

 

Do you hear me,
I'm talking to you
Across the water across the deep blue ocean
Under the open sky, oh my, baby I'm trying
Boy I hear you in my dreams
I feel your whisper across the sea
I keep you with me in my heart
You make it easier when life gets hard

I'm lucky I'm in love with my best friend
Lucky to have been where I have been
Lucky to be coming home again
Ooohh ooooh oooh oooh ooh ooh ooh ooh

They don't know how long it takes
Waiting for a love like this
Every time we say goodbye
I wish we had one more kiss
I'll wait for you I promise you, I will

I'm lucky I'm in love with my best friend
Lucky to have been where I have been
Lucky to be coming home again
Lucky we're in love every way
Lucky to have stayed where we have stayed
Lucky to be coming home someday

And so I'm sailing through the sea
To an island where we'll meet
You'll hear the music fill the air
I'll put a flower in your hair
Though the breezes through trees
Move so pretty you're all I see
As the world keeps spinning round
You hold me right here right now

I'm lucky I'm in love with my best friend
Lucky to have been where I have been
Lucky to be coming home again
I'm lucky we're in love every way
Lucky to have stayed where we have stayed
Lucky to be coming home some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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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3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벼랑 끝에 선 이의 절망을 보았어요.

다락방 2011-11-30 12:46   좋아요 0 | URL
벼랑 끝에 선 자라면 누군들 절망을 맛보겠지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의 마지막 자막을 봤어요.

비로그인 2011-11-3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얘랑 짝꿍하고 싶은데. 이 말에 짝꿍 바꿔준 아이였어요 난ㅎㅎ

그 때 내 앞자리 남자 애가 내 짝꿍을 좋아하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여자애도 나보다는 그 애한테 가고 싶어하는 낌새였구요. 그래서 자리 바꾸자고 했어요. 누가 나한테 짝꿍하고 싶다는 말을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허구한 날 짝꿍 바꿔주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한 번은 바가지 머리 한 여자 애랑(!) 굉장히 친해서 짝꿍 되려고 제비뽑기 조작한 적도 있어요. 맨날 수업 시간에 둘이서 자음 퀴즈 맞추고 그림 그리고 그랬어요. 그 생각이 나네요 ㅎㅎ

솔직한 게 짱인 것 같아요. 욕도 솔직하게 팍팍 해야 제맛이고 사랑도 솔직하게 말해야 착착 감기고.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더니 기운이 돋네요, 히히 (미니김밥 김치국수 먹었어요!)

다락방 2011-12-07 13:08   좋아요 0 | URL
전 점심도 먹고 사과도 먹었는데 수다쟁이님의 이 긴 댓글에서 왜 김밥이란 글자만 강하게 보일까요? 짝꿍이고 뭐고 다 필요없어, 김밥 먹고 싶어, 이런 마음이 막....

전 초등학교때 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었거든요. 3학년때였는데,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있었어요. 하루는 선생님께서 '내일은 너희들이 앉고 싶은 아이와 앉아라' 고 하시는 거에요. 전 그 남자아이랑 너무 앉고 싶은데 차마 말을 못하겠고... 그래서 결국 늘 앉던 자리에 앉았어요. 제 짝꿍도 늘 앉던 자리에 앉았구요. 기존 짝꿍과 계속 짝을 하는 아이들은 우리가 유일했는데, 선생님은 너는 왜 그아이랑 앉고 싶었니, 를 여러 아이들에게 물으셨거든요. 제 짝한테도 물으셨어요. 그런데 제 짝은

"아침에 오니까 얘가 여기 앉아있었어요." 라고 말하더라구요. 전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죠. 결코 이녀석을 좋아했던 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전 누구에게도 먼저 같이 앉자고 말할만한 용기가 없었을 뿐인데.

그 날 쉬는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남자아이랑 짝을 한 여자아이가 제게 찾아왔어요. 야, ***이가 너랑 앉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나랑 앉자고 했어. 이러면서 가버리더라구요. 아...속상해.....

마늘빵 2011-11-30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땐 짝꿍이 누가 되느냐가 정말정말 중요했죠. 그게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다니까요. 심지어는 어떤 예쁜 여자애랑 짝 하고 싶어 하는 남자애들 여섯 정도가 건물 밖에 모여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는데, 전 머뭇머뭇 얼결에 거기 끼어들어갔는데, 첫 판에 지고 말았어요. 이런 젠장.

나도 내일 저 영화 보러 가요.

다락방 2011-12-07 13: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쁜 여자를 두고 싸우는데 왜 첫 판에 진겁니까. 역시 가위바위보도 잘해야 예쁜 여자를 차지하는거로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키가 커서 남자아이들끼리 짝을 한 녀석들은 제발 여자아이랑 짝하게 해달라고 담임선생님께 졸라보기도 하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

영화는 봤어요, 아프님?

무스탕 2011-11-30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국민학교를 다녔지만) 1학년때 아마 첫 짝이었나봐요. 그 애만 기억에 남는걸로 미뤄보면요.
1학년에서 5학년 중간까지 같은 반이었고 (5학년 중간에 한 반이 더 만들어져서 각 반에서 몇명이 글루 갔는데 그때 그 애도 날라갔지요^^) 이름이랑 어려서 얼굴은 확실하게 생각나는데 졸업하고 본 적이 없어서 그 이후론 끝.
근데요, 작년엔가, 그 '아이러브스쿨' 엘 오랜만에 들어갔더니 그 애가 절 찾는거에요. 오호~
그 애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잡히더라구요. 사진에 예전 얼굴이 많이 남아 있어서 보면 알아보겠던데 연락 안했어요.

이 영화 보고 싶은데 영 시간이 안 맞아요 -_-

다락방 2011-12-07 13:10   좋아요 0 | URL
저 역시도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교로 바뀐후로는 자연스럽게 저도 초등학교라고 말하게 됐어요. 국민학교란 말은 어색해서 못쓰겠어요. 저는 적응이 빠른가봐요. ㅋㅋㅋㅋㅋㅋㅋ

아이러브스쿨로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를 애타게 찾던 남자애가 결국은 그 여자아이랑 결혼하고 애도 낳고 잘 살고 있어요, 제 친구중에 말입니다. 영화같은 일이죠. 하하하하하. 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아무도.

영화는 보시면 좋을텐데. 괜찮은 영화거든요.

이진 2011-11-30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요즘 어떤 글이던지 저 포스터가 떠올라서 두근댑니다...
조셉고든레빗, 너무 멋진걸요 ^^

당신이 내 애인이라면 좋을텐데.... 아련합니다 ㅠ

다락방 2011-12-07 13:12   좋아요 0 | URL
조셉고든레빗은 점점 더 좋아지는 배우중의 1人 이에요. 앞으로 그가 어떤 영화를 찍든 별로 실망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이 내 애인이라면 좋을텐데.

정말 좋지요? 히힛

moonnight 2011-12-0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셉고든래빗 참 귀여워요. ^^ 각본 쓴 사람의 이야기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맞나요? 영화에서 친구로 나왔던 사람이 정말 투병을 지켜봤던 친구였다고요. 영화 꼭 보고 싶어요.

다락방 2011-12-07 13:14   좋아요 0 | URL
네, 각본 쓴 사람의 실화라고 하네요. 오, 영화에서 친구로 나왔던 사람이 정말 그 친구였던 거군요! 영화속에서 자신의 병을 이용하기만 할줄 알았던 친구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때 갑자기 마음속에 따뜻함이 퍼지더라구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꼭 보셨기를 바랄게요. 혹은 꼭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