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첫문장은 내가 제대로 읽은게 맞나 싶을만큼 흥미롭다.
매년 여름 쿵린은 수위와 이혼하기 위해 어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p.7)
어? 이혼하기 위해 돌아간다고? 그것도 매년 여름에?
그러나 잘못 읽은것도, 잘못 이해한 것도 아니다. 맞다. 쿵린은 매년 여름 이혼하기 위해 아내가 있는 시골집으로 돌아간다. 그 여름의 며칠간을 빼고는 모든 시간을 군의관이란 직업을 가지고 도시에서 지내고 있다. 같은 부대내에서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여자친구는 작년에도 그랬던것처럼 올해도 그의 이혼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는 올해도 작년처럼 이혼하지 못한 채 돌아온다.
하아- 이 책 참 좋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된 문학작품을 만난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너무 좋다. 나는 이런 작품을 읽고 싶었고, 이런 작품을 기다려왔단 말이다. 하아- 좋아. 가슴속이 꽉 차오르는 기분이다.
이 책에는 우리의 삶이 그러한것처럼 숱한 기다림들이 나온다. 아내는 남편이 오기를 시골에서 기다리고, 여자는 남자가 이혼에 성공(?)하기를 기다린다. 아내는 남편의 옆에서 다시 한번 잠들 수 있기를 기다리고,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특별하게 봐주게 될 날을 기다렸었다. 여자가 남자를 가슴에 품기 시작하면서, 여자는 그와의 데이트를 기다렸고, 남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 여자는 경극 공연장 그의 자리 옆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두었었다. 그리고 아주 대담하게, 여자는 먼저 남자의 손을 잡는다.
부드럽게 그녀의 손가락이 린의 손바닥을 훑었다. 마치 손바닥의 감정선과 지능선을 더듬는 것처럼. 그는 만나의 손을 잡았다.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굳은살이 없었다. 수위의 손과는 얼마나 다른지. 만나가 엄지손가락의 통통한 살을 한번 꼬집고는 이내 새끼손가락 쪽으로 움직여 앞뒤로 비틀었다. 그러더니 손톱 끝으로 린의 손목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너무 간지러워서 린은 만나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잠시 두 손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곧 손을 돌려 서로 맞잡고는 오랫동안 상대의 손을 애무했다. 린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p.78)
그는 여자의 대담함에 놀라고 가슴이 뛴다. 여자는 적극적이다. 먼저 산책하자고 말하는 것도 여자다. 남자는 그러자고 응하면서 점점 더 여자에게 빨려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연애가 시작된다면, 이젠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p.83)
사실 그는 아내가 있고 아이도 있지만 연애를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정해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여자와 결혼을 했다. 싫다고 했지만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한번도 한 방에서 잔 적도 없다. 그래서 여자와의 사이에 나누는 대화와 그녀를 만나는 시간들이 그에겐 낯설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다가 이젠 점점 더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된다.
한번은 그녀가 다른 육군병원에 환자를 이송하는 일을 맡아 약속한 날에 만나지 못한 적이 있다. 그날 저녁 그는 사무실에서 두 시간이나 서성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여자가 보고 싶어서 괴로워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p.88)
그에게 찾아온 이 감정들을 대체 어쩌지. 그의 말이 절대 진리인 듯 따르는 그의 아내는 또 어쩌지. 그가 이혼하기만을 기다리면서 노처녀로 늙어가고 있는 그녀는 또 어쩌지. 그가 아내와 이혼하려고 시도했던 시간, 그러니까 그녀가 그의 이혼을 기다리던 그 시간은 올해로 무려 18년째인 것이다. 하아- 너무 길어져버려서 여자도 다른 삶을 선택할 수가 없다. 만약 그녀가 이 이혼이 제대로 되지 않을것임을 짐작했다면, 희망 따위 갖지 않았다면, 진작에 다른 남자를 찾아보고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내년이면, 어쩌면, 그 미친 희망이 그녀를 40대가 지나서도 그의 곁에 머무르는 여자일 수 밖에 없는,18년간 애인관계인 남자와 한방에서 밤을 지새본 적도 없는, 그런 시간을 보내도록 만들었다. 물론 중간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했지만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한번도 품으려 하지 않는 이 남자에게로. 하룻밤을 둘만이 보내자고 말한 여자에게 남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쑤란에게 규정을 어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이렇게 하면 그 사람마저 곤란해져. 난 유부남이야.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우린 범죄자가 되는 거야. 그런 생각 못해봤어?"
"상관없어요."
"이성적으로 생각해, 만나. 순간의 쾌락이 영원이 우리 삶을 망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p.105)
아 진짜....orz
그래, 소설들이 금서로 지정되어 감추며 읽어야 했고, 연애도 자유롭지 못했던 그런 시대였다. 시대의 탓으로 돌리자. 그러나 아무리 시대의 탓이라 돌린다한들, 내가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들어야 하다니. 절망스럽다.
이 소설속에는 남자의 아내가 전족을 해서 뒤뚱거리고 모두가 신기한 듯 쳐다본다고 하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전족? 대체 전족이 뭐지? 나는 전족을 검색해봤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지식-e 동영상을 보게됐다.
아...맙소사. 발을 완전 기형을 만들어놨네. 하아- 이걸 보는데 완전 가슴이 답답해져서..정말 저런 삶을 그 당시에는 살아야 했단 말이야?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전족이 없어진건 1930년대라고 하는데, 이 소설의 배경은 1960년대에서 1980년대이다. 전족은 그때까지도 완전히 없어진게 아니라 시골에서는 여전히 존재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어서 빨리 다 읽고 싶은데, 어떤식의 결말을 보여줄지 엄청 궁금한데, 내가 이 시간 회사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야속하다. 후아- 린과, 만나와, 수위에게는 이제 어떤 시간들이 남아있을까.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덧붙이자면, 이 책의 번역은 김연수(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바로 그 분) 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