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였나. 늦은밤에 텔레비젼에서 성시경을 보았다. 사람들이 성시경 좋다고 말할때에도 나는 도무지 성시경에게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하는 여자사람이었는데, 그날따라 떡 벌어진 어깨가 멋지게 느껴지고-저사람이..저런 어깨가 있었나?- 그것이 아주 강한 남성성으로 내게 다가오는거다. 시간은 자정을 넘겼고,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야심한 밤에는 글만 쓰면 안되는게 아니라 남자를 만나도 안되겠구나. 낮에 느끼는것 보다 더한 감정이 저절로 얹혀지니.
나는 신승훈, 성시경, 이승환, 조규찬 등의 가수에 대해서 좋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오히려 아무런 개성도 없고 밋밋하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남성적인 매력은 찾아볼 수가 없는 그저 평범하고 착하게 생긴 '남자' 보다는 '사람' 쪽에 방점이 찍히는 그런 사람들이랄까. 그런데 어제 오만년만에 『나는 가수다』에서 조규찬을 보고, 오, 내가 나이들어 가는가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조규찬이 멋진거다. 나는 그동안 '남자'에 방점이 찍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호감을 느껴왔는데, 조규찬의 그 강아지 같은 눈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 자체로 '또다른 남자'의 매력으로 보이는거다. 착하게 보이는 남자가, 나긋나긋해 보이는 남자가, 그런 남자가 내게 매력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니.
그래서 사람은 무엇이든 함부로 단정지어서는 안된다. 내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이 책속에서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여자주인공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이다. 그녀는 철저하게 혼자지만 아주 강하다. 물론,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서 상처를 받는 여자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혼자 잘 극복해낸다. 아버지뻘의 남자인 미카엘은 그녀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걱정한다.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샤워하러 가야겠어요. 그리고 옷 벗고 당신 침대에 누워 있을 거예요. 당신이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여겨지면 주방에 있는 야전침대에서 자면 돼요." (구판, 1부-하권,p.252)
그녀에게 사랑은 낯설다. 그녀에게 세상은 잔인하다. 그녀에겐 이 세상에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녀의 편이 없다.
한밤중에 잠이 깬 그녀는 침대 위에 자기 혼자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더니 그가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그를 한동안 바라다보았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갑자기 그녀에게도 묘한 느낌이 찾아왔다. 산다는 것이 자못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p.290)
나는 나의 행복이 중요하다. 내가 살면서 끝까지 가지고 가고 싶은 건 나의 자존심이고 나의 행복이다. 나는 언제나 나를 위한 선택을 하고 싶고,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싶다. 나는 내가 내 자신에게 내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고, 오로지 나를 위해서 욕망을 실현하거나 혹은 억제하고 싶다. 그런데 그 행복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는 것'으로도 채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웃고 있어', '저 사람이 나와 있는 순간 행복해하고 있어'. 그것으로도 내 행복은 충만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고, 그것은 이 책속의 리스베트처럼 '산다는 것이 자못 만족스러워지는' 순간을 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녀는 아마도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고 있는것 같은데, 그녀의 놀라운 능력은 수학을 이해하는 데서도 발현되지만, 기억력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그녀는 일명 '사진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것. 한번 읽거나 본 것들은 몽땅 기억해내는 거다. 그것이 성서라고 할지라도.
오늘 아침 출근길은 제법 쌀쌀해서 이제 더 따뜻한 자켓으로 바꿔입어야 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출근을 하고 차를 한잔 하기 위해 물을 끓이면서 문득, 한 남자의 어떤 모습이 선명하게 눈 앞에 떠올랐다. 맙소사. 나도 사진기억력을 갖고 있구나. 나는 안면장애를 가지고 있고, 암기과목을 전혀 암기하지 못하지만, 어떤 것들에 대해서만큼은 사진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잖아. 심지어 나는 그날 내가 가졌던 느낌까지 선명한걸. 대단하다. 멘사테스트..해봐야 할까?
사람들이 대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사회적 위치는 당연히 편견을 불러온다. 그는 보이는만큼, 드러난만큼 훌륭한 사람일 거라는 편견.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이미지를, 불의를 없애기 위해 싸우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글을 쓸수도 있고 말을 할 수도 있고 돈을 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그 이미지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닐뿐더러, 그것은 그의 가장 치졸하고 비열한 모습을 감추는 '만들어낸'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그것이 '만들어진' 것임을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역시, 알아차릴 수 없다.
닐스 비우르만 변호사는 자신의 피후견인을 강간하는 몹쓸놈이다.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그녀를 장난감인듯 다룬다. 그런데 그는 사회적으로 어찌나 근사한 분이신지.
닐스 비우르만은 그린피스 회원이며, '청소년을 위한 봉사 활동'등을 통해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한 존경받는 변호사로 소개되고 있었다. 한 단에는 비우르만의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이며, 그와 같은 건물에 사무실이 있는 루네 호칸손 변호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싣고 있었다. 호칸손은 비우르만이야말로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후견위원회의 한 공무원은 "피후견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 대한 진정한 봉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구판, 2부-하권, p.129)
반면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정신병동에 갇혔었고, 정신치료를 권유받는 사람이고, 폭력성을 인정 받았던 사람이다. 사람들은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당연히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비우르만 변호사가 리스베트에게 한 짓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하아- 이 책에는 나쁜놈들이 여럿 나오는데, 정말 다들 어찌나 나쁜 놈들인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읽다가 아, 이새끼 정말 나뻐, 하는 울컥거림이 한두번 솟아나는게 아니다. 그들은 누군가를 죽이고 때리는 육체적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기 보다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그것을 거둘 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일때가 더 많았다. 피어싱을 여러개 한 사람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리 없다는, 레즈비언이 똑똑할 리 없다는, 야한 옷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창녀일 거라는 편견으로 똘똘뭉쳐 그 편견에 갇힌채로만 사고하려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시선을 버리라고 말하면 왜, 너도 레즈비언이냐? 라는 대꾸를 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경찰이라는 위치에 있는게 너무나 끔찍했다. 아우. 욕나와.
이제 3부를 시작했는데, 1,2,3부를 내리 읽어가다보니 좀 지겹다. 그래서 3부를 시작하기 전에 다른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다 읽어치우기로 했다.
이번해가 어떻게 갈지 몰라 사주를 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월이다. 맙소사.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남았어..
시월달에는 남자사람친구의 결혼식이 있다. 나는 나의 여자사람친구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궁금해했다. 대체 그토록 똑똑하고 따뜻한 남자가 선택한 여자는 어떤 사람인걸까. 그 여자사람은 어떻게 그 남자와 함께 살 수 있게 된걸까. 그러자 나의 여자사람친구는 '그녀는 아마도 전생에 지구를 구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세상에. 그렇다면 나는? 나는? 나는 그럼 전생에 지구에 테러라도 한걸까?
다음생을 위해 지금이라도 지구를 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