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이었나. 술을 엄청 마시고나서 집에 돌아가 기절하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 엄청 후회를 했다. 젠장. 나는 오늘 할일도 많은데 이렇게 취기가 남아있어서 어떡하나, 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엘리자베스 게이지'의 『스타킹 훔쳐보기』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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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이러는 게 아니었는데......." 로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행복했잖아."(하권,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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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출근해서 업무에 시달리면서 나는 내내 계속 내가 그러는게 아니었는데, 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괜찮아 행복했잖아, 라는 생각을 반복했다.
책속에서 저 구절은 과거의 연인이었던 남자와 여자가 오랜 시간이 지난후에 그들이 자주 찾던 센트럴 파크에서 우연히 재회한 후, 함께 호텔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나누는 대화이다. 나는 그 장면이 무척 좋아서 센트럴파크에 가고 싶은 생각을 내내 했었는데, 어쨌든, 나는 과거의 남자와 재회해서 호텔에 들어갔다 나온건 아니지만 ( '')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괜찮아 행복했잖아, 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시간을 내가 이러는게 아니었는데, 라는 생각에 할애하기는 했지만.
오늘도 그렇다. 오늘 아침도. 또 저 구절이 생각났다. 대체 잊혀지지가 않아. 어제는 저녁에 샤브샤브를 먹기로 했던 약속이 어찌어찌하다보니 삼겹살로 바뀐 것. 삼겹살을 먹으면서 나는 많이 먹지 않을것이고, 적당히 먹을것이야, 밥은 먹지 않겠어, 라고 말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삼겹살에 소주에 밥과 냉면까지 흡입하고난 뒤였다. 젠장. 왜 늘 이모양일까. 그리고 다시 맥주를 마시고 배가 부른 상태에서, 비염에 시달리는 육체를 쉬게 해주겠다며 열시반부터 잠들었는데 오, 세상에, 열두시에 잠을 깨보니 그때도 계속 배가 부른거다. 대체 밤 열두시에 자다 깨서 배가 부르면..뭘 어째야 하지? 하아- 피곤하고 졸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런데 너무 배가 불러. 그러니까 배가 어느정도 부르면 잠도 더 잘오고 행복해지는데, 어제는 진짜 '너무' 불렀던거다. 너무. 너무. 그래서 자정을 넘긴 그 시간에 침대위에서 뒹구르르 구르면서 저 구절을 또 생각했다.
내가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하아-
오늘 아침 출근길. 시집을 읽었다. 근래 읽은 시집중에 가장 만족도가 큰 시집. 낯선곳과 낯선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그런 시집. 반갑다, 정말. 언젠가 어느분이 내게 댓글로 달아주기도 했던 시가, 이 시집속에 있다. 출근하자마자 동료에게 얘기해주며 소름 돋았던 시.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그런데 그의 시는 좀 길다. 나는 짧은 시가 좋은데. 긴 시는 좀처럼 읽고 싶어지지 않는데, 어젯밤 잠깐 휘리릭 넘겼을 때 그의 시집에는 좀처럼 짧은 시가 눈에 띄질 않는거다. 어쨌든 차분한 마음으로 오늘 버스안에서 시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긴 시의 마지막 연이 아주 좋다.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하는 구절.
인중을 긁적거리며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 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 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3일, 5일, 6일, 9일 ‥‥‥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아 길어..너무 길어..옮겨 쓰기 힘들잖아. 좀 짧게 써줘요, 시인님들. 그리고 또 긴 시. 그리고 참 좋은 시. 제목도 좋은 시 한편 더, 마지막으로.
4월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지의 별빛과
제국 빌딩의 녹슨 첨탑과
꽃눈 그렁그렁한 목련 가지를
창밖으로 내민 손가락이 번갈아가며 어루만지던 봄날에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손가락 외에는 아무것도 어루만지지 않던 봄날에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1월과 3월 사이의 침묵을 물수제비뜨며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마지막으로 왔다
5월에도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에는 천사가 위로차 내 방을 방문했다가
"내 차라리 악마가 되고 말지" 하고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
심리 상담사가 "오늘은 어때요?" 물으면 나는 양미간을 찌푸렸고
그러면 그녀는 아주 무서운 문장들을 노트 위에 적었다
나는 너의 소식을 ‥‥‥
물론 7월에도 ‥‥‥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마지막으로 왔다
8월에는 어깻죽지에서 날개가 돋았고
9월에는 그것이 상수리나무만큼 커져서 밤에 나는 그 아래서 잠들곤 했다
10월에 나는 옥상에서 뛰어 날아올랐고
11월에는 화성과 목성을 거쳐 토성에 도착했다
우주의 툇마루에 쭈그리고 앉아 저 멀리 지구를 바라보니
내가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이 늙은 개처럼 엎드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2월에 나는 돌아왔다
그때 나는 달력에 없는 뜨거운 겨울을 데리고 돌아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4월은 그해의 마지막 달이었고 다음해의 첫번째 달이었다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손가락 외에는 아무것도 어루만지지 않던 봄날에, 라는 표현을 하다니, 정말로 시인은 시인인가보다. 나는 왜 저런 표현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손가락이 손가락 외에는 아무것도 어루만지지 않던 봄날, 이라니. 4월이라니, April come she will 이라는 노래도 생각나고, '다구치 란디'의 『4월이 되면 그녀는』이라는 단편소설집도 떠오르고,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도 생각난다. 4월, 너의 소식이 마지막으로 들려온 달, 그래서 그해의 마지막 달, 다음해의 첫번째 달. 시인이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눈앞에 없는 사람이겠지. '정미경'은 그의 소설 『아프리카의 별』에서 '부재하면서 온통 저 남자를 사로잡고 있는 건 누구일까'라는 문장을 써낸적이 있다. 그래, 대체로 그렇다. 그건 사실이다. 나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건 대체로 내 눈앞에 없는 사람, 혹은 내 옆에 부재한사람.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아주 오래 기다리고 있다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가끔은 손톱도 깨물면서
매달 한번씩은, 네 소식을 좀 들려줘.
오늘,
꼬꼬면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