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끔 그런 상상을 해. 아주 멀고도 작은 나라, 그곳의 더 작은 도시, 거기에서 나는 그보다 더 작은 여인숙을 운영하는 거야. 조용하고 한가로운 그곳에서 나는 나의 남은 일상을 살아가는거지. 그 날들중에 어느 하루, 당신은 우연히 그곳에 들르게 되는거야.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았던 바로 그곳에. 여기까지 상상을 한 다음에 나는 잠시 갸웃해. 당신에게 어떤 옷을 입힐까. 당신이 출장을 오는걸로 할까, 여행하다 들른걸로 할까. 당신에게 양복을 입히고 서류가방을 들게 할까, 캐쥬얼한 복장에 배낭을 메게할까. 당신이 나의 여인숙에 잠시 들렀을 때, 나는 잠시 자리를 비웠어. 일하는 소녀가 내게 일러주지. 좀전에 한국 손님이 들어왔어요, 하고. 소녀는 늘 내가 없는 사이 들르는 한국 손님들에 대해 얘기해줘. 누군가 들어올때마다 내가 기대한다는 걸 알고 있거든.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도. 눈치빠른 아이야. 나는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당신을 마주하게 돼. 외출을 하려던 당신이 프론트에 있는 나를 보게 되는거지. 아니, 내가 먼저 당신을 보게되는게 나을까. 누가 먼저가 됐든 상관없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테니까. 언제쯤으로 할까. 몇년후로 정할까. 나는 또다시 망설여.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후였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너무 늙지는 않은 때였으면 좋겠어. 나는 당신의 젊은 모습만을 기억할텐데, 너무 늙어버리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잖아. 그건 싫어.
우리는 우리의 재회에 호들갑 떨지 않아. 우리는 마치 우리가 언젠가는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자연스런 인사를 하지. 나는 당신을 보고 웃어줄거야. 당신도 나를 보고 웃어줄까? 같이 커피를 마실까? 저녁을 먹을까? 술을 마실까? 상상속에서도 결정해야 할 게 한두가지가 아냐. 이렇게 오랜 시간 후에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우리가 만났다니. 나는 아마도 우리는 만나기로 예정되어진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소녀같은 감상에 젖어 중얼거릴지도 몰라. 그러나 당신에게는 들리지 않을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얘기할거야. 우리는 어떤것을 함께하고,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당신은 이제 당신이 있던곳으로 돌아가야 해. 나는 당신에게 나와 함께 머무르는게 어떻겠냐고는 말하지 않아. 우리는 운명이라고도 말하지 않아. 당신은 내가 여기있다는 걸 아니까,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할거야.
언젠가는 또 올건가요?
가지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여기에 이렇게 방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 언제고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고도 말하고 싶지만, 나는 그런 모든 말들을 하지 않아. 나는 내가 당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을 이토록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당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당신을 가질 수 있었어. 나는 점점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당신을 기억해. 함께 있었다면 그러지 못했겠지만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을 생각해.
오늘 아침, 마을 버스안에서 시집을 펼쳐들고 제일 처음의 시를 읽었다. 새들의 북 호텔 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새들의 북 호텔
북 호텔에 새벽이 깊다
새벽은 하늘로부터 천천히 하강하여 지상의 뿌리에까지 닿는다
천사들이 북 호텔로 내려오는 새벽이면 새들의 날개 북 호텔의 환한 지붕이 된다
고독은 한 마리의 감정, 무한의 지평선 위에 걸쳐져 있다
나는 새벽마다 조그만 사다리를 타고 2046호로 올라간다
새벽은 아주 늦게 내 방 창가로 와서는 끝내 방 안까지 파고든다
나는 세상을 오래 떠돌다 온 바람의 외투를 벗기고 그녀의 차가운 손을 녹이며 따스한 공기의 품속으로 넣어준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내리는 눈발을 조금 받아 주전자에 넣는다, 물이 끓는다
물이 끓는 밤, 난로는 북 호텔을 위해 한 통의 뜨거운 목욕물을 덥히고 북 호텔이 따스해질 때 지상으로 내려온 새들의 발톱은 착하고 부드러워진다
한 잔의 에스프레소, 한 모금의 담배연기, 한밤의 축구 경기
북 호텔은 세상의 북쪽에 있어서 언제나 북 호텔이겠지만 나의 북 호텔은 하얀 눈발과 추위를 피해 온 새들과 난로와 음악이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숙소가 된다
눈보라에 뒤덮인 새벽 열차에서 내린 손님들이 무거운 가방을 이끌고 와서는 따스한 커피로 몸을 녹이는 곳
한 잔의 술로 영혼을 덥히고 마음껏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
온 세상을 다 떠돌다 온 영혼이 허름하고 두툼한 외투 같은 육체를 걸친 채 그대로 투숙하는 곳
여기는 내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새들의 북 호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작은 방을 하나쯤 마련해두고 싶은 소망이 있는건지도 모르겠다고, 그 소망을 가진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고, 오늘 아침 이 시집의 첫 시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방을 마련했다는 말을 하기 위한, 자기 자신을 위한 소망일런지도 모르겠다.
마을버스 안에서, 그리고 출근길의 지하철 안에서, 나는 이 시집의 절반정도 밖에는 읽지 못했다. [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 이란 시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내가 처음부터 그대를 선점하기 위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리스본 쟁탈전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몇 점, 화가들이 그린 몇몇 구름에나 남아 있는 인류의 세계사, 생태발생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인류는 최고의 생명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인식을 바꾸어놓은 것은 바람이 고요히 나뭇잎을 흔들듯 어느 날 나의 들창을 두드리며 다가온 그대의 방문이었다
그대를 선점하기 위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하는 부분에서 훅- 가버리는 것 같았는데, 그러나, 내가 그동안 읽었던 모든 시집들에 대한 감상과 마찬가지로, 이 시집의 다른 시들에 대해서는 사실 그다지 큰 감흥이 없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다. 리스본,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이자벨 아자니, 페르난두 페소아, 구스타브 쿠르베, 같은 단어들을 시 안에서 만나야 하는 것이 낯설다. 내가 원하는 시는 낯익은 단어들로 구성되어진 시다. 낯익은 단어들로, 그러나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내는 그런 시. 그래서 이 시집이 많이 벅차다. 내가 무슨 시를 얼마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이런 시. 잘 있나요 그대, 라는 한 줄 만으로도 좋아지는 이런 시.
갈라파고스 고독의 제도
흐린 오후엔 음악을 들어요 노래는 벌써 마지막 곡 톰 웨이츠가 부르는 몇 방울의 독 커피에 약간의 독을 넣어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면 오후가 다 가요
잘 있나요 그대
갈라파고스, 갈라진 파도들의 고원을 다 지나면 나타나는 고독의 제도
이런 시도 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하여 내가 이 지상에 내려왔다고 말하는 이런 시.
그녀에서 영원까지
생의 불꽃이 환하게 타오르던 밤이었을 것이다
푸얼 푸얼 찻물이 끓어오르던 밤이었을 것이다
천사들이 지상으로 자꾸만 하강하던 밤이었을 것이다
나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그녀는 고요히 나를 바라보며 춤을 추었을 것이다
베를린의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아니 생의 어느 고요한 밤이었을 것이다
무대 한구석에 기타를 세워두고 담배를 피워 물어도 그녀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을 것이다
그녀가 왜 나를 바라보는지 왜 아무 말도 없는지 알지 못하지만 나는 담배를 끄고 다시 기타를 연주했을 것이다
그녀가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나는 영원에서 지상으로 하강하였을 것이다
그녀가 펼쳐놓은 침묵의 악보를 넘기다가 나는 문득 계절을 느끼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베를린의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녀에서 영원까지 내가 걸어가던 생의 어느 고요한 밤이었을 것이다
생이 불꽃의 날개를 달고 환하게 타오르던 그런 밤이었을 것이다
푸얼 푸얼 끓어오르던 찻물이 생의 비등점을 향해 가던 그런 밤이었을 것이다
천사들이 지상으로 하강해 음악을 연주하고 나는 자꾸만 담배를 피우며 천사들을 만들어내던 그런 밤이었을 것이다
마을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서 시집을 읽고 있다가 시집을 덮고, 나는 음악을 들었다. 요즘에는 임태경의 『이젠 잊기로 해요』를 종종 듣는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앨범이었는데, 그때는 한번도 좋다고 생각해본 적 없던 노래였는데, 요즘 새삼 하루에 한번 이상 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노래가 되어버렸다. 퇴근길 강변역에서도 나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그 노래를 듣는다. 강변역의 통과의례 같은 음악. 동영상 찾아 올리려고 했는데 찾을수가 없네 젠장.
어제 집에 돌아가는 마을 버스 안에서 나는 취해서 어질어질했다. 술주정 하고 싶은 아주 강한 욕망에 휩싸였지만, 그 누구에게도, 아무에게도 꼬장을 부리지 않았다. 꾹 참았다. 확실히 나는 십년전보다는 어른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