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순간도 '엄마'로 살아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엄마'가 된다면 내 아이가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괜찮은 어른'이 되는것에 엄마가 '절대적인'영향을 미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옆에서 끊임없이 '그럴수도 있지' 혹은 '그렇지 않을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조언을 해주며, 편견을 가지지 않는, 차별하지 않는 아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며 등돌리지는 않는 아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더 나은 세계가 될 수 있도록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아이. 단순히 이것이 정의다, 라고 곧은 길로 가기보다는 이것이 정말 정의인 것은 맞는 것일까, 를 더 고민할 수 있는 그런 아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나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나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훗날 젊은 사람들이 봤을 때 '그래도 저런 어른이 있어서 든든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나는 돕고 싶다.
조국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느낀 것 처럼.
우리는 계속 '장례식 모드'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두 거인은 갔습니다. 두 분은 자신의 몫을 다했습니다. 할 만큼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이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대중의 고통이 어디에 있고, 그 고통을 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삼아야 하는지 제시해야 합니다.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조직·세력을 대중의 눈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명박은 물론,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서는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히 정립하고, 그 가치를 실현할 세력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p.33)
33페이지를 읽으면서,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해주는 어른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니.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 또 다른 형태로 이런 어른들이 더 있을거라고 생각하면 뭔가 묵직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정치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정치에 크게 관심도 없지만(이 책에서 조국 교수는 '탈정치'도 정치적이라 말했다), 앞서서 이렇게 하자고 선동할 수 있는 사람은 못되지만, 이런 어른이 이렇게 해보자 라고 하면 그런 사람의 뜻에 동조할 수는 있으니, 믿을만한 어른이(혹은 정치인이) 좀 더 앞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지지해줄 수는 있으니까.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괜찮은 어른은 칠레에 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에 지진이 일어난 칠레의 전직 대통령인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의 실천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이 미혼모 출신이어서 보육 문제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2006년 집권 후 0~4세 아동에 대한 무상급식·무상보육·무상의료 지원 정책을 실시하고, 임기 중 하루 2.5개씩 총 3500개의 국립보육시설을 만들었어요. 칠레는 1인당 GDP 가 약 1만 5000달러로,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인데도 말입니다. 당연히 전국적으로 고용 창출이 일어났죠. 연이어서 소비가 진작되어 경기도 좋아졌고, 보육 부담이 없어지니 출산율이 급증했어요. 이 사례는 국가가 복지를 강화함으로써 일석 삼조도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좋은 예입니다. 바첼레트는 퇴임했지만 인기가 여전하여 국민들이 재출마하라고 압박을 넣고 있다고 합니다. (P.109)
자신이 느꼈던 문제를 권력과 지위를 확보하고 나자 해결해 내려고 하는 것은 가장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하지는 못하는 일이다. 다들 어려웠던 시절을 살았다고 해도, 그 상황을 벗어나면 자신이 겪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이상은 노력하지 않는게 대부분의 어른들이 취하는 자세 아닌가. 그런데 그녀는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을 때 해결을 해줬고, 그랬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믿고 따르고 지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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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가 궁금해져서 검색해봤다.
미첼 바첼레트(스페인어: Verónica Michelle Bachelet Jeria, 1951년 9월 29일)는 칠레의 외과 및 소아과 의사이며 중도 좌파정치인이다.
사회당의 당원으로서 2002년과 2003년 사이 리카르도 라고스의 보건 장관으로 일했으며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의 여성 국방 장관이 되었다.
2006년, 칠레의 최초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으며 전임 리카르도 라고스의 후임으로 2006년 3월 11일 취임, 2010년 3월 11일 퇴임하였다.
[생애와 학업]
공군 소장(General de brigada) 알베르토 바첼레트와 고고학자 안헬라 헤리아의 딸로 산티아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킨테로, 모레노 공항과 산베르나르도의 공군 기지에서 살았으며 1962년과 1963년사이에 미국에서 살았다.
이후 산티아고로 귀환하여 하비에라 카레라 1번 고등학교에서 고교 과정을 이수하며 여러 음악과 연급 그룹에서 활동하며 마르코 안토니오 데 라 파라등의 호세 미겔 카레라 전국 학교의 학생들과 어울렸다.
1970년 바첼레트는 칠레 대학의 의대에 입학하여 이후 전염병 전문 외과 의사로 졸업하게 된다. 이리하여 살바도르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 초기에 사회주의 청년에 입당했다. 1972년, 아버지는 배급과 가격 훈타 (JAP)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가 벌어지자 알베르토 바첼레트는 "국가 반역"을 구실로 공군 사관 학교에 감금되었다. 부하들에게 집중적인 고문을 당한 끝에 장군은 1974년 3월 12일 산티아고 공중 형무소에서 살해되었다. 당시 살해이유는 반역죄를 지었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이유는 아옌데 대통령 지지자를 숙청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의대 3학년이던 미첼레 바첼레트는 학업을 계속하며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좌파 탄압을 피해,지하 전위당으로 탈바꿈한 칠레 사회당을 계속 지지하다 1975년 1월 10일 정보국(DINA)에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었다.
고문과 암매장으로 악명높은 비야 그리말디(centro de detention) 으로 후송되어 고문 취조를 당하며 쿠아트로 알라모스로 후송되었다. 모녀는 일년 뒤 오스트레일리아로 망명을 떠나 동독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칠레의 좌파들은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오스트레일리아, 미국등으로 망명하는 일이 많았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의학 과정을 계속하며 건축가 호르헤 다발로스와 결혼하여 라이프치히에서 맏아들 세바스티안을 낳는다.
1979년 칠레 대학으로 귀환하여 학업을 재개하며 1982년 학위를 받고 딸 프란시스카를 낳는다.
기관들은 "정치적 이유"를 들어 의사로서의 활동을 불허했다. 그러나 칠레 의사 학교의 장학금을 이용하여 로베르토 델 리오 병원에서 소아과와 공공 보건 전문 과정을 밟았다. 호르헤 다발로스와 이혼하며 비정부단체인 피데에 (PIDEE, 비상사태등에 의하여 유아기 상처에 대한 보호 단체)에서 군부 체제 피해자들의 자녀들에게 지원을 제공하며 1990년까지 일했다
[FPMR과의 관계]
다양한 정보 출처에 의하면 미첼레 바첼레트는 1980년대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조직된 칠레 공산당 테러조직인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 전선 (FPMR)의 일원과 애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자신이 절대로 FPMR 의 활동 또는 어떠한 테러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FPMR의 일원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시인하였다. 이것은 우알펜 대선 토론에서 후보가 공개적으로 시인한 바 있다.
[정치활동]
1990년대 초기 칠레 수도권 서남부 보건 서비스와 이후 전국 에이즈 위원회에 의해 전염병 전문가로 채용되었다. 여기서 전염병 전문가 아니발 엔리케스를 만나 동거에 들어가 1993년 막내딸 소피아를 낳았다.
1994년과 1997년 사이 바첼레트와 알레한드로 산도발은 보건 장관의 보조 책임을 맡았다. 1996년 정치.전략 문제 연구소에서 "대륙 방어 전략" 강의를 수강하고 좋은 성적과 대통령 장학금에 힘입어 미국 워싱턴의 범아메리카 방어 전략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998년 돌아와 국방 장관을 보조한다. 2000년 3월 11일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이 바첼레트를 보건 장관으로 임명하며 보건소의 소위 "cola" (대기 명단 초만원 현상)를 삼개월만에 없애줄 것을 부탁했다. 비록, 임무에 실패했지만, 보건소 이용자들이 불편을 겪는 일은 다소 개선되었다. 바첼렛은 자신의 임무실패에 대해 책임지는 뜻으로 사표를 제출했지만, 대통령은 바첼레트에게 계속 직책을 맡겼다.
2002년 내각이 재편성되며 바첼레트는 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국방 장관이 되었다. 임직중 여론 조사에서 그의 대중적 지지도가 상승하며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대권후보]
2004년 9월 말 장관 솔레다드 알베아르의 사임과 동시에 바첼레트는 차기 대선을 겨냥하여 국방 장관직을 사임했다. 민주화를 위한 정당 협력체는 이러한 상황하에 당시 칠레 연합 (야당)의 단일 후보 호아킨 라빈에 맞설 후보 단일화를 모색하여 2005년 7월 31일 경선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5월 24일 알베아르 후보가 기권하자 바첼레트는 연대의 유일 대선 후보가 되었다.
2005년 12월 11일 선거에서 바첼레트는 45.95%를 얻어 25.41%를 받은 세바스티안 피녜라를 제치고 첫 후보가 되었으나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여 2006년 1월 15일 이차 선거에서 53.5%를 확보하여 칠레의 196년 독립 역사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동시에 라틴아메리카의 여섯째 여성 국가 수반이 되었다. (직선으로 당선된 것은 셋째임)
[대통령 재임시절]
그는 남미 첫 여성 국방장관 등을 거쳐 대통령에 오른 뒤 남녀 동수 내각을 구성했고, 과거사 청산도 주도했다. 중도실용주의 리더십으로 건실한 경제성장을 이끌어, 칠레는 2010년 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2010년 3월 11일 퇴임했다. 퇴임 이틀 전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85%의 기록적 지지율을 얻었다.
[퇴임 이후]
2010년 9월 15일 유엔여성(U.N. Women )기구 대표에 임명됐다.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으로 2009년 대선에 출마하지 못했지만, 국민 지지율이 매우 높기에 2013년 칠레 대선 출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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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고통과, 빈민과, 불행과, 불편을 반드시 '경험'해 봐야만 그것이 문제임을 깨달을 수 있는걸까? 그래야만 그것을 고치려고 할 수 있는걸까? 가진게 많았고 여유롭게 살아왔다면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이 어떤 불편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을 가질 수 없는걸까?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미 많이 '가진자'들이 정치를 하면 서민들의 문제를 풀어줄 수 없는걸까?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물론, 자신이 어렵게 살아봤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박수를 쳐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문제에 닥쳐 보지 않았어도 그것이 문제임을 인식하고, 그것이 불편할 거란걸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어른은 그렇게도 나타나기 힘든걸까? 대체 어떻게 해야 '나와는 다른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줄 수 있을까? 아직 이 책을 절반밖에 읽지 않았는데, 다 읽고 나면 나는 좀 더 명징한 기분을 가질 수 있을까?
일이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