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친구와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를 시키고 와인을 한병 주문했다. 물론 가장 저렴한걸로. 담당 서버는 오늘이 무슨 특별한 기념일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오늘이 기념일이면 사진을 찍어주려 했다고 말했다. 친구와 나는 그게 무슨소리냐며 기념일이어도 사진은 안찍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사진 찍기 열나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날이 기념일인건 맞았다. 그날은, 일요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기념해야 할 날. 내가 실패한 날이다, 그날은.
작년에서 올해로 넘어올때도 그리고 올해로 넘어와서도 한동안, 나는 엄청나게 생각과 고민을 거듭하다가 그래 이것을 한번 해보자, 라고 생각했던게 두 가지가 있었다. 사실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이라는 가능성에 조금 기대를 걸었었다. 나는 실패할 걸 알고 있어, 그러니 실패한다고 해도 실망하지마, 라는 마음가짐으로. 그러나 '꼭 성공했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했던 건 물론이었다. 하나는 진작에 실패했고 나머지 하나는 일요일, 그 날 실패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다. 무슨소리냐, 그게. 실패는 실패일 뿐이다. 실패는 다시 도전하지 못하게 기를 꺾는 것이다. 나는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니 실망하지 말자고 미리 다짐했던 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실망하지 않게 된 건 아니었다. 두 실패 모두 나를 절망하게 했고 좌절하게 했다. 그리고 지났으니 말인데,
뱃속을 커다란 칼로 난도질당한 기분이었다.
두가지의 목표가 있었고 그 두가지를 다 실패했다. 그래, 나는 사실 고작 이런 인간이었다. 실패하는 인간. 이제 올해 내게 남은 목표는 없.고. 그렇기에 나에게 남은 실패도 없.다. 좋은건지 싫은건지 모르겠다. 기대하지 않는 대신 난도질 당하지도 않을것이니. 그래, 어깨나 한번 으쓱해주자. 노멀한 삶을 살자.
영화를 봤다.
사실 다른 영화를 볼까 이걸 볼까 망설이다가, 평소라면 내가 다른 영화를 골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일요일, 나는 실패할 것이다 싶어서 이 영화를 골랐다. 다 때려부수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내 선택은 정말 훌륭했다. 극장안에 맥주를 사가지고 들어가서 빨대로 쪽쪽 빨면서 이 영화를 보는데 진짜 최고최고. ㅠㅠ 옵티머스와 범블비는 보통의 남자사람들보다 훨씬 더 섹시하다. 나는 섹스 없이 살 수 있는 여자사람이니, 보통의 남자사람들을 사랑하느니 옵티머스와 범블비와 관계를 유지하며 남은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부르면 달려오고 나를 좋은친구라 칭해주고 어디서든 나를 지켜줄 마음가짐이 되어있고, 나에게로 달려오면서 i'm coming for you 라고 말해주는데, 대체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나보다 훨씬 훠어어어어어얼씬 덩치도 큰데, 그렇게 크고 강한 옵티머스가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위해 달려오다니. 미치겠다 진짜. 눈물나게 멋지다. 최고다 최고. 옵티머스와 범블비-나는 강하고 충성스런 그 모든것들에게 사랑을 바치는 바이다-때문에 나는 이 영화의 한장면도 놓치고 싶지가 않았는데, 오, 맙소사, 이 영화는 그게 다가 아니다. 세상에.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는 군인들 떼거지가 나온다. ㅠㅠ 어떡해 ㅠㅠ 감동 감동. ㅠㅠㅠㅠ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는 박쥐처럼 난다. 위의 장면은 뛰어내리다가 날개 없이 낙하산 펴는 장면중 하나이고, 내가 반한건 뛰어내리면서 날개가 있는거다. 날면서 무전기로 의사소통도 한다. 왼쪽으로 가, 뒤를 조심해. 하면서. 아... 나는 메신저상에 보이는 남자사람 세명에게 군대갔다 왔을 때 그런걸 해봤냐고(날아봤느냐고) 물었다. 모두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아쉽다는 듯 열나 멋지던데...했더니 그 중 한명이 말했다. "결론은 그겁니까?" 그래서 내가 네, 그게 결론이었어요. 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멋있죠. 힘들고 위험하니까요." 라고 말했다. 아. 힘들고 위험해서 멋지구나. 그러면서 그가 추가했다. "거의 대부분은 밤에 뒤로 숨어 다니죠." 라고. 으응, 그렇군. 이렇게 날 일은...없는 거군. 날지도 못하는 남자들을 메신저에 추가해두고 있었다니. 죄다 삭제해버릴까.. 어쨌든, 아, 좋겠다. 빌딩 사이를 막 날아다녀서. 나도 날고 싶다. 나는건 정말 멋져. ㅠㅠ 그것도 신체 건장한 남자들 여럿이서 날다니. 후아- 나는 어젯밤에 내 등에서 날개가 생기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메간 폭스도 예뻤는데 이여자도 완전 짱 예쁘다. 몸매도 짱이지만 입술이 완전 예술이다. 일전에 친구들을 만나서 성형수술을 하게 된다면, 꼭 한군데를 한다면 어디를 하고 싶냐는 질문을 서로 한적이 있었다. 그때 한명은 콧대를 세우고 싶다고 했고 또 한명은 턱뼈를 깍고 싶다고 했던가. 암튼 그때 나는 입술을 좀 찢고 싶다고 했다. 양쪽으로 조금씩만. 그래서 입 더 커지게. 그리고 살짝 뒤집어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아.. 예쁘다.. 입술 진짜 짱이네. 이러니까 영화속에서 샘이 이 여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너를 꼭 지켜줄게, 라고 말하는건가 보다. 이런 입술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뭐, 괜찮다. 나한테는 내가 있으니까. 나는 내가 지키니까. 그러니까 입술 성형은..안할거다. 뭐 그래도 예쁘긴 하다. 예뻐.. 이렇게 예쁜 여자들은 어디에서 어떤 실패를 하고 살까?
오늘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이 책을 읽었다.
여러 작가들이 짤막한 에세이를 쓴 모음집인데, 이중에 권지예가 쓴 「어머니, 사랑합니다」에는 권지예가 병원에서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읽다가 인용한 문장이 있다. '고리끼'의 「어머니」는 나도 대학시절 레포트 쓴다고 읽었는데, 오, 이런 구절이 있었던가. 놀랍다. 음, 역시 독서는 강제적이어서는 안되는구나. 하나도 기억이 안나잖아..
한번은 파벨이 이고르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안드레이, 가슴앓이를 많이 한 사람들이 농담을 잘 한다는 걸 알아요?"
우크라이나 인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두 눈을 찡그리면서 대꾸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전 러시아가 폭소로 망해버렸게....." (p.90)
가슴앓이를 많이 한 사람들이 농담을 잘 한다는 걸 알아요? 하는 구절이 너무 좋아서 나는 이 부분을 두번쯤 더 읽었다. 그렇구나, 그런거구나.
40분만 있으면 점심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