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다. 지난주 일요일에 본 [나는 가수다]의 2차경연 중간점검 무대의 박정현이 얼마나 여성스럽고 예뻤는지(좋아한다는게 아니라) 얘기하고 싶고, 다음 생에 아이돌 가수로 태어난다면 씨스타의 보라로 태어나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도대체 어떤 문장으로 정확한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몰라 리뷰를 쓰다 멈췄지만 『환영』의 김이설 작가에게도 조금 더 해보라고, 그러니까 뭘 더 해보라고 해야하는건지 그걸 모르겠는데, 암튼 조금 더 해보자고 자꾸만 얘기하고 싶다. 내가 당신과 사귀는 사람을 좋아할 필요는 없잖아요, 라고 말하는 수키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나한테 전화한걸 보니 너는 뭔가가 끝장났다는 걸 육십프로쯤 짐작할 수 있다는 친구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고, 그와 결혼한건 행운이고 인생의 목표였다고 말했다가 몇년 후엔 내가 미쳤었지, 라고 말했던 한 여자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그렇지만 다 생략하고 오늘은, 상반기의 독서에 대해서만 얘기하겠다. 상반기에 출간된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상반기에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 1월1일부터 6월30일까지의 읽었던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 출간은 언제됐든 나는 전혀 관심없다. 나는 사실 세상의 모든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자, 어찌됐든,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하자.
* 문장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힘
'필립 베송'의 『포기의 순간』은 책 한권이 모두 아름답다. 처음에는 주저주저 하다가 읽어가다 보면 그 아름다움과 적막함과 건조함에 이끌린다. 이 책이 가장 놀라운 건 문장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의
「루크 혹은 구원」이란 소제목을 보는 순간,
그 순간, 그 구원이 나에게 느껴진다는 거다. 구원받은 느낌, 그 느낌을 내가 문장들에 이끌리다가 받게 된다는 거다. 구원을 받는게 단순히 글을 읽는 행동으로 이해가 되다니. 나는 아직도 이럴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
가만히 앉아서 조용하게 문장들을 읽다가 누군가 구원받는 순간을 목격하고 싶다면, 그 느낌으로 안도하고 싶다면, 나는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내 소중한 책들만 모아둔 그 한칸의 책장, 거기에 꽂혔다. 그 책장에 새로운 책을 꽂은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 당신의 모든 책을 읽어보겠습니다. 아, 그렇지만 천천히요.
상반기 최고의 책은 '존 쿳시'의 『추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장을 덮고나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책으로부터 빠져나오질 못했는지. 무릇 문학이 갖는 힘이란 바로 이런게 아닐까 싶다. 내가 세상을 바꿀수는 없겠지만,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이 세상을 다 뒤엎어 버릴수는 없겠지만, 이 세상이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바로 그 지점. 혹은 한 개인의 삶이 이보다는 더 나아져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 내가 아닌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다른 누군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보게 한다는 것. 그것이 내가 문학에서 찾는 의미이고 의의인 것 같다. 그 책을 『추락』은 얼마나 잘해줬는지.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잔혹하고 무서운 결말 때문에 나는 이런책엔 별 하나밖에 줄 수 없어, 라고 말해보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자 그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별은 다섯이 되어버리고야 만다. 그 시대, 그 장소, 그 상황에 처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이의 삶에 함부로 말할 수 없는게 아닐까. 무섭고 슬프고 충격적인 소설이다. 존 쿳시의 다른 책들도 모두 그러할까? 하나씩 읽어봐야겠다.
'코맥 매카시' 의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도 결코 놓치고 싶지 않다. 그가 보여주는 끔찍한 현실과, 그 현실에서 살고 있는,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보고자 하는 인간들을 나는 계속 만나고 싶다.
* 소설가가 된다면 이런 소설을 쓰고 싶어요.
'줌파 라히리'를 알기 전까지의 나는 누군가 어떤 소설가처럼 글을 쓰고 싶냐고 물으면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다니엘 글라타우어'라고 말했더랬다. 그러나 줌파 라히리를 알고 나서는 줌파 라히리라고 답한다. 그건 지금도 변함없다. 나는 줌파 라히리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줌파 라히리가 써내는 소설, 바로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 『축복받은 집』에 실린 모든 단편들, 그런 글들을 쓰고 싶고, 가장 쓰고 싶은 건 『그저 좋은 사람』에서의 「지옥-천국」같은 단편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그 순간, 그 잠깐의 순간에만 아름답다고 나는 글로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수키 김'을 읽어서 올해 상반기에는 잠깐동안 수키 김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기로 했다. 내가 세상에 단 한권의 책만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수키 김의 『통역사』같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 이 책 단 한권이라면, 나는 죽기전까지 내내 뿌듯할 수 있을 것 같다.
* 재미와 흥분과 먹먹함이 모두 이 책 한권에. 고마워요.
나는 읽으면서 재미있고 흥분을 시키되, 책장을 덮고 나면 사라지는 책에 대해서는 사실 그다지 좋다고 말하지도 않고 추천을 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저 재미있다, 고만 말하는 정도지. '더글라스 케네디'의 『위험한 관계』도, '넬레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도, 정말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시간가는 줄 모를정도로 한번 책장을 펼치자마자 멈출 수가 없었다. 책 내용에 흠뻑 빠져들었다. 물론 어떤 책들은 재미도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으므로, 이정도의 재미만 보장한데도 아주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토록 재미있게 읽었어도 결코 별 다섯을 줄 수가 없다. 나는 그것보다 더한것까지 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러나 '마이클 코넬리'의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달랐다. 정말 달랐다. 재미있고 속도감있고, 영화처럼 머릿속에 그려지지만, 이 책은 재미,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책을 덮고 나면 주인공 '미키 할러'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무고한 의뢰인'때문에 내내 마음이 무겁다. 미키 할러는 앞으로 내내 그 때문에 자유롭지 못할텐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반대도 안할것이고, 꼭 보겠어요.
'케빈 브룩마이어'의 『로라, 시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기꺼이 볼 의향이 있다 .이 책은 잘만 만들어진다면 꽤 좋은 영화가 될 것 같다. 이 세상에 혼자만 살아남은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 아니 그 이전에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일단 아름다운 소재를 찾은 셈이다. 지구상에 혼자 살아남은 로라, 그녀의 역할은 누가 하는게 좋을까 혼자 가만히 캐스팅을 해본다. 그녀는 결코 '안젤리나 졸리'나 '모니카 벨루치', 혹은 '제시카 알바' 여서는 안된다. 누가 좋을까. 강하되 여성스럽고 똑똑하며 요란하지 않은 그런 여자. 검정색 머리였으면 좋겠다. 음...
아, 애슐리 쥬드!! 그녀가 적당하다.
'미셸 깽'의 『처절한 정원』은 유럽에서 만들어지면 좋겠다. 그리고 씨네큐브에서 상영하는 그런 영화였으면 좋겠다. 보면서 관객들은 조용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 같다.
* 도무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소설도 있었지요.
'하재영'의 『달팽이들』은 뒤의 단편 두개가 꽤 좋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단편들이 두고두고 생각날 만큼도 아니며, 게다가 앞의 뻔하디 뻔한 단편들을 커버할 만큼의 단편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참..이 단편집에서 아무런 의미도, 재미도, 문장도 찾을 수 없다.
'박범신'의 『비즈니스』는 신문의 한 기사에 작가의 로망실현을 버무린 소설 같다. 작가는 전작 『은교』에서도 그랬는데, 남자 주인공을 심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근육질의 칠십대 노인도, 그리고 '상큼한 도둑'도 일종의 판타지 같다. 이 책에서도 나는 의미도, 재미도, 문장도 찾을 수 없었다. 『은교』는 문장은 좋았는데............... 참고적으로, 이 두 책 모두 다른이들의 서평에서는 '꽤 좋은' 평을 받고 있다.
* 출간되어줘서 고마워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영어로 번역되어줘서 고마워요. 그러니까 또 욕심이 나는데 말입니다,
문학동네 소설 관계자 여러분들. '다니엘 글라타우어' 작품 또 번역할 생각 없습니까? 네? 네? 시도해봐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방금 막, 추천했어요.
방금전에 친구가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쉬운 책으로 한권만 추천해 달라고. 딱 한권만. 사실 '쉬운 책'이라는 조건이 없었다면 나는 『포기의 순간』을 추천하려고 했지만 '쉬운 책' 이라고 해서 이 책, '어마 리 에머슨'의 『그 숲에는 남자로 가득했네』를 추천. 유쾌하고 재미있고 여자들이 읽기에는 참.. 좋다. 일단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잖아. 나도 벌목꾼이 가득한 숲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부작용 말고도, 이 책을 읽으면 다른 부작용도 생기는데, 그건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는 것. 하아-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여태까지 계속 스테이크를 먹고 싶은 강한 욕망에 휩싸이고 있다. 중간쯤만 익힌 뜨거운 스테이크. 그것을 씹으며 틈틈이 와인을 삼키고 싶다. 그래서 손과 발이, 얼굴이,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졌으면 좋겠다.
오늘은 1일이고 금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