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소년이 나온다. 소년은 누구에게든 말을 하고 싶지만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자신이 그런 심정이라는 것을 자신을 좋아하는 소녀에게 말한다. 그러자 소녀는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럴 땐 편지를 써. 누구에게든. 그 편지를 보내도 좋고 태워도 좋아. 그러고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거야."
구스 반 산트님, 사랑합니다. 진심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거에요. 그런말은 부질없죠. 어떻게 [마레 지구]같은 영화를 만드셨나요? 어떻게 [아이다호]같은 영화를 만드셨나요? 어떻게 [엘리펀트]를, [파라노이드 파크]를 만드셨나요? 앞으로 만드실 영화도 기대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준 영화 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좋아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유일한 감독님이십니다.
얼마전에 내가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타이레놀을 먹어볼까 했더니 꼬마요정님이 그럴땐 그 생각들을 적어보라고 하셨다. 오. 나는 사실 '사라 쿠트너'의 소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에서 정신과 상담의가 여자주인공에게 '생각을 멈추세요'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런 처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래서 정신과 상담을 받아봐야 겠다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생각을 적어보라니, 이것이야말로 좋은 처방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전부터 하고 싶은 말, 언젠가 해야 할말 등을 수첩에 적긴 했었지만, 지금 내 머릿속의 생각을 적을 생각을 하지는 못하던 터였다. 그래서 적었다. 내 생각들을. 늘 핸드백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만년필을 꺼내서 지하철에서도 적었고, 집의 식탁에 앉아서도 적었다. 까페에서도 적었고 사무실에서도 적었다. 신기한건, 머릿속의 생각들을 바깥으로 다 꺼내서 적으면 머리가 조금쯤 가벼워질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였다. 적는건 좋은 방법이었지만 생각은 줄지 않았다. 생각을 이십개 꺼내서 마구 적으면 또다른 이십개가 금세 그자리에 채워졌다. 할 수 없다. 나는 계속 적었다. 계속, 계속. 급기야 오늘 새벽 두시 사십분, 만년필의 잉크가 다 닳아버렸다. 내가 두시 사십분에 수첩에 적은건 내 생각은 아니었다.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의 한 단락이었다. 마침 그 시간에 보고 있던 어떤 책에서 이런 문장이 나니아 연대기에 나온 문장이라고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If you've been up all night and cried till you have no more tears left in you - you will know that there comes in the end a sort of quietness.
나는 이 문장이 어떤 뜻일지 궁금해서 내 책장에서 이 책의 번역본을 꺼내와서 찾아보았다. 이렇게 번역되어 있었다.
만약 밤새 깨어 더이상 눈물이 남지 않을 때까지 울어 본 적이 있다면, 결국에는 일종의 고요함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두시 사십분에 깨어있는 내 친구에게 이 문장을 문자메세지로 쳐서 보내줄까 싶었는데, 망설이다가 참았다.
만년필의 잉크를 갈아끼우려다가 만년필을 망가뜨린 새벽 두시 사십분, 젠장,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지만 살리지 못했고, 나는 마음이 초조해져서, 두시 사십분 그 시간, 망가진 만년필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져버리고 새로운 만년필을 샀다. 나는 계속 적어야 하니까. 그리고 오늘 오후 두시, 나는 이촌역 근처의 까페에 혼자 앉아서 또다시 수첩을 꺼내 생각을 마구 적었다. 내 안에서 이런 생각들이 튀어나온다는 게 놀라울 만큼 많은 문장들이 튀어나왔고, 그리고 그 문장들은 다시 읽어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챙피한 것들이었다. 내 안에 이런 챙피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있다니. 이건 적기만 하고 말아야겠구나. 그래 사람이 적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만년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 막 적고 있을 때, 까페에서는 노래가 나왔고, 그 노래중에 유독 just call my name 이라는 가사가 들렸다. 바로 이때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이 노래를 검색했다. 이 앨범이 검색됐다.
코린 메이(Corrinne May)의 Shelter 란 노래였다. shelter 의 뜻이 뭔가 사전을 검색해봤다. 피난처, 은신처라고 나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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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wrong, what's getting you down?
Was it something I might have said?
You're walking around with your head to the ground
And your eyes are watery red
I know you've been through tough times
Kicked around, thrown to the ground
But you've always been the strong one
So don't tell me that nobody gets you
'cos I'm standing in your corner
Knocking at your door
You don't have to be alone
Just call my name, let me be an answer
'cos it hurts me to see you this way
I wanna ease your pain, help me understand
Let me be your shelter my friend
We share a bond, you and I, we belong
We're like coffee and morning trains
You strip my defenses, I catch your pretenses
The same blood runs through our veins
I swore I'd be your lifeline, made a vow
That I'd surround you with love at every milestone
I'll listen when nobody gets you
I'm still standing in your corner
Waiting by your door
You don't have to be alone
Just call my name, let me be an answer
'cos it hurts me to see you this way
I wanna ease your pain, help me understand
Let me be your shelter my friend
It was not too long ago
You sought to understand
You helped me mend
Remember when
So promise me you'll call my name
Let me be an answer
'cos it hurts me to see you this way
I wanna ease your pain, help me understand
Let me be your shelter my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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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전에 음원을 다운 받았다. 알라딘에서 마일리지로.
이촌역에서 볼일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나는 책을 펼쳐 들었다. 청소년 소설이니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윽, 역시 잘 읽을 수는 없었다. 한 페이지에서 내가 해석이 가능한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꾹 참고 해석이 안되도 그냥 읽었다.
그러다가 주인공인 Heidi 가 엄마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리스트를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Heidi 의 엄마가 아는 단어는 고작 23단어에 불과하고 모든 색은 blue 라고 말한다. Heidi 의 엄마는 글을 쓸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So Be It 이라고 말한다. Heidi 는 엄마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적어보기로 한다. 이런식이다.
Things I Know About Mama
Name: So B. It
이렇게 적고 난 Heidi 는 그러나 다른것을 더 적지 못한다. 엄마의 이름 말고는 엄마에 대해서 확실히 아는 것이 더는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Heidi 는 그렇다면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것을 적어보기로 한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Things I Don't Know About Mama
What is soof?
역시나 이 한줄만을 적었다. soof 는 엄마가 아는 단어 23개중의 하나이다. 그 단어들은 모두가 아는 일반적인 단어인데, soof 라는 단어는 알지 못하는 단어이다. 엄마만이 아는 단어.
Most of the words were common ones, like good and more and hot, but there was one word only my mother said, soof. (p .33)
여기까지 읽고 나자 만년필이 빨리 배송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리스트를 만들어보고 싶어져서. 지금 딱 떠오르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고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적어보는 거다. 그리고 바로 옆장에는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적어보는 거다. 아마 처음에는 한두개밖에 적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뭘 알지? 뭘 알지 못하지? 하고 생각해보니 퍼뜩 떠오르는 것들이 많지 않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씩 둘씩 더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중에는 아마 그 사람에 대해서 나만이 아는 것이 있을 수도 있고, 나 혼자만 모르는 것이 있을 수도 있을거다. 아, 나의 수첩은 아주 잡다한 낙서들로 빼곡해지겠구나. 점점, 점점 더.
일요일 밤 열시. 넷북을 끄고 나서는 뭘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