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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불의의 사건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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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필립 베송'의 『포기의 순간』의 옮긴이의 말을 보면, 작가인 필립 베송이 파리 도서박람회에서 사인을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선 끝에 책을 내미는 독자들에게 써준 문장이라고 한다. 나는 반드시 이 작가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어쩌면 불의의 사건이 필요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속의 인물은 여덟살 난 아들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나서-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으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진정 원했던 삶을 살 수 있게 되니까.
오랜만에 만나는 아주 건조하고 덤덤한 문체였다. 나는 한적한 마을에서 아들을 죽인 남자가 형기를 마치고 돌아와 그 곳에서 그를 멸시하는 시선들에 맞서 살아가는 내용일거라고 짐작했다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당황했다. 그리고 좋았다. 불의의 사건을 겪지 않았었다면 물론 더 좋았겠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그가 원하는 인간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 책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자꾸만 자꾸만 밑줄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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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이 되는 데, 되어야만 하는 사람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p.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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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던 것은 한때, 가능했던 때, 그때 '노' 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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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결정적인 순간에 알맞은 말을 찾지 못했다. 메리앤과 결혼한것도 아직 '노'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했던 때 '노'라고 말할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었음이 기억난다. 나는 자주 의지와 혜안이 부족했고, 그 때문에 몇 년의 젊은 시절을 잃었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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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노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 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노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구원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노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상황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노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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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으며, 만남을 구체적으로 정한 적도 없었지만, 결국에는 그가 오리라고 굳게 믿었다.
내게는 확신이 있었다. 설명할 수 없고, 선명하게 손에 잡히지도 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 이 내밀한 직감이. 이런 믿음에 대한 아주 사소한 증거조차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그냥 알았다. 그게 전부다. 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p.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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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확신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았고, 나의 확신은 이제 옅어졌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했다. 이 책의 제목은 무려 '포기의 순간' 이었으니까. 나는 포기하려고 하고, 관심을 기울이기를 멈추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속에서 이런 문장을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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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길 멈추었다. 서로를 염려하는 것을, 상대 때문에 가슴 떠는 것을 멈추었다.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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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장은 내가 이 책속에서 가장 처음 밑줄을 그은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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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p.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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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그가 원해서 누군가에게 다가선다. 다른 누군가 때문도 아니고 상황 때문도 아니다. 그저 그가 원한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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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페 앞 보도에 서서 어떻게 작별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p.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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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장을 읽으면서는 나는 어느해 가을, 작별인사를 하던 그와 나를 떠올린다. 나는 그가 내 여행의 끝이기를 바랐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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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종착역에서 내렸고, 이제 더 멀리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 왔다는 것을, 여행의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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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내가 그의 여행의 끝이기를 원했던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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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둘이서 함께,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떨어져 있어서는 결코 되지 못했을 사람들이 되었다. (p.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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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이 그동안 가졌던 것을 잃어야 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가진것을 잃었으나 그 자신이 되었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이 되었다. 게다가 그 자신이 되어서 그 자신을 사랑해주고 그 자신이 사랑하게 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을 '포기하기 위해서' 읽었는데, 포기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게 아닐까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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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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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시종일관 건조함을 잃지 않는 문체로 절망속에 빠진 남자의 구원에 대한 소설을 읽었는데, 그 구원에 대한 안도감 보다는 건조함에 대한 것만 온 몸에 스며든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건조해지고 만다. 어쩌면 일요일밤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곧 월요일이 오기 때문에,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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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멀리서 돌아왔다. 오로지 이렇게 환하고 분명한 확신속에 함께 마주하기 위해서, 모든 길을 떠돌아야 했다. 이 확신을 모른 척해야 했었고, 특히나 길이란 길은 모두 돌아야 했으며, 우리에게 예정된 운명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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