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희네는 아이가 둘인 과부이며 서른세살이다. 문기사는 서른살의 총각이다. 홍합공장에서 일을 하는 그들에게는 묘한 감정이 싹튼다. 윽.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고백을 한 것도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신경쓰는 상황. 그런 둘이 함께 밀폐된 공간에 있으려니 참으로 간질간질 민망한 상황이 되고야 만다.
둘은 박스 무더기 사이 오목한 곳에 있는 팔레트에 엉덩이를 붙였다. 백이십 평 냉장실에는 홍합 박스 외에도 미역, 갈치, 서대, 게 따위들이 포장되어 있거나 그냥 내용물만 뭉쳐 잔뜩 쌓여 있었다. 이런 자리라는 게 처음부터 우스개 소리나 하며 넘어가면 자연스럽게 되고 아주 짧은 한순간에 어색하고 심각한 것에 잡히면 또 그렇게 되는 거였다. 둘은 자연스레 있을 수 있는 정점을 놓쳐버려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렇듯 말없는 시간에 마음 속에서는 더 많은 말들이 만들어지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지는 말들이란 게 입 바깥으로 나오기는 아주 어려운 것들이어서 문기사는 문기사대로 큼큼 헛기침만 하고 승희네는 승희네대로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해봤자 고작 오 분 정도. 그예 승희네가 슬그머니 어깨를 기대 오기 시작했다. 문기사는 속으로 놀라기도 하고 싫지 않기도 해서 그냥 어깨를 대고 있었는데 말로 만들어지지 못할 많은 것들이 작업복을 통해 오고 갔다. (pp.62-63)
만약 승희네가 문기사를 신경쓰지 않았다면, 문기사가 승희네를 신경쓰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정도의 관심만 가진 상황이었다면 저 안에서 어색한 시간을 보내는 일 따위는 없었을 거다. 슬그머니 어깨를 기대다니, 늘 그렇듯 나는 그렇게 먼저 다가서는 여자들에게 크게 존경을 표한다. 남자든 여자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이십대 중반에 다녔던 회사는 겨울에 일이 많았다. 겨울만 되면 아르바이트생을 엄청 불러들였다. 열명이 넘는 젊은 남자들과 다섯명쯤 되는 아줌마들로 구성된 단기 알바들. 어느 하루, 창고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담당자가 나더러 창고에 가서 일을 맡아 달라고 했다. 알바 한명을 붙여주겠다면서. 나는 알았다고 말하고 아줌마 알바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런데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S 였고, 그는 나와 동갑인 젊은 남자였다. 아 하필 왜 저 남자를. 그가 누군가! 그와 나 사이에는 므흣한 기운이 흘러서 종종 다른 알바생들로부터 놀림감이 되는 그런 남자가 아니던가. 왜 하필 저 남자를. 담당자의 짓궂음에 조금 분노했지만 우리는 둘이 묵묵히 앉아 일을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해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일을 다 했다고 했더니 자기가 올때까지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답하고 S 와 그 공간에 말없이 앉아있었다. 마침 작업을 마친 책을 박스에 넣는 작업을 마무리 짓고 있는 중이었는데, 나는 S 가 무얼할까 싶어서, 그러나 그가 무얼하는지 보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머리는 박스에 둔 채로 눈만 위로 살짝 올려 마주 앉은 S 를 쳐다보는데, 나와 똑같은 자세로 눈만 움직여 나를 보고 있던 S 와 눈이 마주친다. 아, 어색해! 아 긴장돼! ㅠㅠ
S는 나를 두고 갑자기 바깥으로 나간다. 나는 그제서야 참아두었던 숨을 내쉬었다. 담배를 피러 나간걸까? 그렇겠지? 하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그는 금세 들어온다. 그리고는 내게 캔음료 하나를 내민다. 이거 마셔요, 하면서. 2프로 부족할때, 라는 복숭아맛 음료였다. 나는 와- 하는 감탄사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음료를 받아들자 그는 "고맙죠?" 한다. 나는 네,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너무 고마워하지 말아요. 혼자 마시기 민망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사온거에요." 한다. 나는 피식 웃었다. 담배 피러 나간 줄 알았어요. 아니에요, 음료수 사러 갔다온거에요. 라고 그는 말했더랬다.
[홍합]을 읽으면서, 창고안의 승희네와 문기사의 그 미묘한 분위기를 읽어내면서 나는 스물다섯의 나와 그 때 내 앞에 마주 앉아있던 그가 생각났다.
자, 다시 승희네와 문기사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아주 관심이 많다. 그들의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자꾸만 나 역시 신경이 쓰인다. 그들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 책을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문기사는 승희네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 여인네가 이렇게 손에 잡힐 만한 거리로 들어온 게 언제부터였나 얼른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순간이었다. 공장에 오기 전에 주변 여자는 친구나 후배들뿐이었는데 매사에 어른스럽고 모든 것이 성숙한 여인네 하나가 눈앞에 나타난 거였다. 팔십년대는 지식의 시대였고 주변의 모든 것을 경계해야 했던 시기였다.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도 불편함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서른이나 먹도록 여자로 인해 눈이 떠질 기회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승희네를 보고 있으면 인류의 역사가 생겨나기 시작한 최초의 정사(精事)가 막연히 떠올랐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몸짓. 거칠 것 없이 휘몰아 타오르는 생산의 그 무엇. 막힐 데 없이 휘돌아 터져 나오는 풍요의 그 무엇. 꿈틀거리는 모든 것을 풀어놓고 매만지고 쓸어 안아주는 그 무엇. 덥다고 날씨 타박은 하나 땡볕 아래서 어느 한곳도 허물어지지 않고 탱탱한 이 여인의 품에 자신도 모르게 깃들고 싶어지곤 했다. (p.167)
승희네는 문기사와 함께 있는 시간을 꿈꾼다. 문기사와 데이트를 하고 싶다.
정말로 문기사와 데이트를 한다면 어떨까 싶어서 그녀는 불가에 쪼그리고 있지만 몸과 달리 마음이 멀리로 떠다녔다. 일에서 벗어나 극장 구경도 가고 제과점에 들어가 팥빙수도 사먹고 음악도 듣는다면. 한 삼 년, 아니 한 삼 일 그것도 아니, 한 세 시간 만이라도 그와 단둘이서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듣기에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얼굴이나 한없이 들여다보고 손이나 한없이 만져 보고, 말이나 한없이 나눠 보고, 아, 한번쯤 뜨겁게 껴안아 봤으면 싶다. (p.176)
그와 단둘이 앉고 싶다. 그를 마주 보고 싶다. 그의 얼굴을 한없이 들여다보고 손이나 한없이 만져 보고, 말이나 한없이 나눠 보고. 아! 한번쯤 뜨겁게 껴안아 보고! 승희네의 이 작은 소망이, 한 남자를 보고, 만지고, 안고 싶은 사실은 작은 욕망이, 그가 같은 마음으로 나를 봐주지 않는 이상 결코 이룰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갈망이 되고야 만다. 승희네 앞에 마주 앉아 소주를 한잔 따라주고 싶다.
가든이나 한식집이니 횟집이니 이런 데 말고, 듣자니 문기사가 기웃거리기 좋아한다는 어디 허름한 대폿집에 앉아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 중에 저희도 그들에게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되어, 서로 옛사랑 이야기나 나누면서, 언젠가 본 영화이야기나 하면서, 한다면 용기 내어 막걸리에 사이다 몇 방울 타 마셔도 보련만. 그것이 아니면 온 밤중을 한하여 손잡고 이 골목 저 골목 싸돌아다니거나, 분위기 좋은 맥줏집 같은 데 가서 월급 받은 걸로 맥주 한잔 사도 좋을 것을. (p.176)
온 밤중을 손 잡고 걷는 일이 대체 왜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대체 왜! 문기사에게 가서 승희네랑 데이트 해주라고, 제발 좀 그렇게 해주라고 말해지고 싶어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다른 사람의 사랑에 내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그 둘이 한 공간에 있고 끌어안기 위해서는 각자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온다. 소중한 밤이. 짧게 끝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아주 아름답고 찬란하고 두근거리는 밤이.
다시 빗소리와 뭐가 시끄럽게 구르는 소리가 빈 곳에 들어찼다. 이 소리도 이를테면 태풍의 노래였다. 문기사는 누워서 눈치로 승희네가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데 처음부터 그의 신경도 여인네 쪽으로 쏠려 있었다. 여인의 몽땅한 손이 다가왔고 동시에 그도 손을 뻗어 슬며시 잡았다.
"손구락이 영 기요이. 남자 손구락이 이렇게 질어서 어디다가 쓰까."
문기사는 올챙이처럼 파고 들어오는 손을 힘주어 감았다.
"콧구멍 팔 때 좋소."
"콧구멍 파요?"
"예."
"콧구멍 파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 침착하고 다정다감하다요."
"별걸 다 아시요."
주체를 못하고 어디론가로 흘러가버려야만 되는 바람처럼, 꼭 그렇게 알 수 없는 어디론가로 몰려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손을 통해 오가기 시작했다.
(중략)
이번에는 문기사가 빗소리를 밀어냈다.
"여자 손가락이 이렇게 퉁겁고 짧아서 어디다 쓰까."
"호미질 하는 데 쓰지."
"호미질 잘하지라?"
"처녀 때부터 해온 것이 그것인디."
"메느리가 호미질 잘하믄 집안이 잘된답디다."
"......"
"일을 얼마나 했기에 젊은 나이에 손가락 마디마다 다 굳은살이요?"
"그러게 말이요."
다시 침묵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거듭 보내고 받고 있었다. (pp.232-234)
승희네는 아마도 이 아무것도 없는 말들을, 정말이지 별 의미도 없는 이 말들을 잊지 못할것이다. 이날의 대화와, 그의 손가락을 잡았던 감촉과, 둘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기운을 결코 잊지 못할것이다. 밤마다 방안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자꾸만 자꾸만 이 날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기사는 다 잊겠지. 남자들의 기억력은 이럴때 아주 형편없다니까.
좋아하는 남자의 손을 잡던 순간을, 그 느낌을 잊기란 힘든 법 아닌가. 아무리 고개를 세차게 저어봐도 대체 그걸 어떻게 잊어.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도 두근, 심장이 팔딱 거리는데! 다시 또 두근, 와락 조여오기도 하는데!
승희네는 고생을 많이했다.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호미질도 해야하고, 아이들도 챙겨야 하고, 공장에 다니며 돈도 벌어야 한다. 그런 승희네에게 사랑이 허락됐으면 좋겠다. 문기사와의 예쁘고 알콩달콩한 날들이 승희네에게 찾아오기를 바란다. 그래야 승희네도 살아갈 재미가 있지. 승희네에게 그정도는 허락되어도 되잖아. 승희네는 문기사가 언젠가는 공장을, 이 마을을 떠날까 두렵기만 하다. 그런데 문기사는 "안 갈 테니께 걱정 마시요." (p.279)라고 말해준다. 그렇게 말해봤자 가버릴거라고 승희네가 재차 걱정을 하자 문기사는 "쫓아내기 전에는 절대 안 갈 생각이요." (p.279) 라고 말해준다. 이건 무슨 감동의 도가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는 연인이든 친구든 그러니까 어떤 관계로든 내 옆에 있다가 간다고 말할때 한번도 가지말라고 말한 적이 없다. 가고 싶어하는 것 같은 기미만 보여도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보내놓고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나는 슬펐고 아팠고 힘들었다. 가지 말라고 말하는데도 가버리면, 그러면 너무 아플까봐 차마 제대로 붙잡아 본 적도 없다. 이렇게 살아왔으니 아마 앞으로도 이런 성향은 변하지 않겠지. 그런데 놓고 싶지 않은 사람,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 사람을 이제는 붙잡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어쩌면 붙잡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누군가가 이제는 가야할 때, 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번에는 참지 않고 말해볼 참이다. 가지말라고. 계속 옆에 있어주면 안되겠냐고. 이번엔 제대로 바짓가랑이를 붙들어볼까 싶다. 라고 쓰지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밑줄 긋는 남자]의 여자주인공 '콩스탕스'의 이름이 무척 예뻐서, 나의 닉네임을 콩스탕스로 바꿔볼 까 했는데 관두기로 했다. 락방, 락방님, 다락님, 다락방님 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내내 좋았으니까. 콩스탕스, 라고 발음할때의 그 부드러운 느낌이 좋지만 이대로 두어야지. 나는 핸드폰을 개통한 이후로 한번도 전화번호를 바꾼적이 없고, 이메일 주소도 만든 뒤로 한번도 변경한 적이 없고, 알라딘에 서재를 만든 뒤로 한번도 닫았던 적이 없다. 아르바이트도 4년 내내 한 곳에서 했고, 이 직장은 8년째 다니고 있다. 나는 사랑도 한결같으며 대상도 한 사람만을 향한다. 그냥 그렇다는거다.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