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새 나는 좀 이상하다. 밥을 먹으러 가서도 혹은 술을 마시러 가서도 먹다 말고 멍때리며 한곳을 응시하곤 한다. 그러다가 한숨을 한번 쉬고 다시 먹던 걸 먹는다. 그때쯤엔 사실 처음처럼 맛있게 먹지도 못한다. 한숨을 자주 쉰다. 내가 인식하지도 못하는데 자꾸 한숨을 쉬는지 젊은 애가 웬 한숨이냐는 소리를 곧잘 듣는다. 어제는 영화를 보려고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내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완전 쌩쌩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기분이 가라앉은건가, 완전 가라앉아 보여요. 하아- 가슴에 뭔가 아주 묵직한게, 아주 단단하게 박혀있다. 다른사람은 힘이 들때 어떤 증상들을 보일까? 밥을 못먹을까? 잠을 못잘까? 나는 잘 못걷는다. 걷다 말고 멈춘다. 걷다가 내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 뜨린다. 마치 이 머리채를 쥐어 흔들면 내 고민들도 다같이 흔들려 사라져 버릴것 처럼. 그러나 한번도 내 뜻대로 된 적은 없다.
- 일요일인 오늘도 마찬가지로 한숨을 가득 쉰 채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또 아무것도 하고 싶지를 않아져서 나는 방안의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짚어 쓴채,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옆으로 누워있었다. 잠을 자려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렇게 누워있고 싶었다. 얼마만큼을 누워있었을까, 엄마는 내 방으로 들어와서 오겹살을 먹으러 나가자고 했다. 나는 괜찮아, 안먹어, 귀찮아, 라고 얘기했는데, 너 어제 며칠간 고기 못먹었다고 신경질 냈잖아, 그래서 지금 완전 우울한거잖아, 고기 먹으러 가자. 나는 알았다고 말하며 침대에서 나와서 오겹살을 먹으러 갔다. 엄마, 나 소주 한잔 마셔도 돼? 그래, 너 우울 풀리려면 소주 마셔, 그래서 나는 소주도 마셨다. 뭐, 소주를 마신다고 해서 뭔가 나아지진 않았다. 나는 또, 고기를 먹다 말고 벽에 기대어 앉아 멍때렸다.
- 오겹살을 다 먹고 밥을 볶아 먹는데, 밥을 볶아주시는 분은 고깃집의 사장님이셨다. 손님이 확 줄어들어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하셨고, 가끔 아들이 도와주러 온다고 하셨다. 아들도 직장생활 하느라 힘드는데 와서 도와준다고, 직장생활에 시달릴텐데 와서 해주는거 싫어서 가급적 도와달라는 말 안하게 된다고도 하셨다. 엄마는 아드님이 참 착하네요, 자기도 힘들텐데, 라고 대꾸해주셨다. 나는 아무말도 없기 고기만 먹다가, 소주만 마시다가, 그렇게 볶아지는 밥을 보다가,
"엄마들은 다 알고 계시는군요, 자식들 직장생활 하느라 힘들다는 거." 라고 말했다. 왜 그런말을 했지? 나는 힘들다는 걸 누군가 알아준다는 데에 갑자기 뭉클했던걸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엄마랑 고깃집 사장님은 동시에 말씀하셨다.
"그럼요, 알죠, 그걸 왜 모르겠어요." , "알지, 얼마나 힘들겠니, 직장생활."
- 아, 내가 직장생활이 힘들다는 건 아니다. 나는 직장생활 8년차. 이 일을 한순간도 좋아한 적은 없지만, 이것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쓸 만큼 힘든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왜 힘든지 안다. 그리고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나는 무엇이 다시 내 기분을 좋게 만들지도 너무나 명확하게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자꾸만 구석에 숨고 싶어져서, 자꾸만 아무말도 하기 싫어져서, 자꾸만 한숨이 나와서, 자꾸만 서운해서, 자꾸만 바보 같아서 나는 내 스스로 기분을 좀 바꿔보고 싶어졌다. 어떻게 하지? 뭘 하지? 그러나 역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책장을 둘러본다. 뭐 좀 좋은거 없나, 뭔가 따뜻해지는 거 없나, 뭔가 유쾌해지는 거 없나, 뭔가 날 좀 웃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 젓가락! 젓가락질 잘 하는 남자를 읽어야지.
이 대리는 테이블 한켠에 있는 플라스틱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어 내 앞과 자신의 앞에 열 맞춰 놓았다. 칼날 같은 인상과는 지나치게 동떨어진 행동이라 의외다 싶어서 몰래 남자를 훔쳐보았다. 뜨끈한 국수 국물을 들이켜더니 쇠 젓가락을 식탁 위에다 탁탁 작게 두드리며 키를 맞췄다. 그리고는 도시락 안에 담겨 있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내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지만 난 그 평범한 행동에 이상하게도 시선을 빼앗겼다.
지난번 식사 때는 정신이 없어서 보지 못했지만 이 대리의 손놀림은 근사했다. 단지 젓가락질을 하는 것뿐인데도 무기를 갖추어 든 병사처럼 날렵하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손놀림은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했다. (p.67)
그러니까, 흐음, 젓가락질 잘 하는 남자를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다. 내 앞에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젓가락질을 잘 한다면. 내가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다른 여자들 앞에서는 굳이 젓가락질을 잘 할 필요는 없겠고, 다른 여자들 앞에서는 굳이 이름을 가지지 않아도 좋을테다.
- 며칠전, 여동생한테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에 여자라고는 나 하나뿐이었으면 좋겠어" 라고. 여동생은 "그래?" 라고 되물었는데, 나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게 별 의미가 없다고 이내 생각했어. 만약 나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라면, 세상에 여자가 나 하나뿐이라고 해도 나를 선택하진 않겠지. 세상에 여자가 많아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게 아니니까."
"그렇지."
"그렇지만 순수하게 나를 좋아하는 거라면, 세상에 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나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내 옆에 바로 김태희가 같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음.................언니, 그건......쫌 아닌 것 같다."
"김태희 선택할까?"
"응."
세상은................그런걸까?
- 블랙베리 화이트 9700을 확, 질러버리면 나는 좀 기분이 나아질까?
- 일요일이 이제 한시간 이십분도 채 남지않았다.